반영과 표현의 변증법, 예술

[기획특집]우리는 철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

참여 예술과 순수 예술

사회주의 사회는 미적으로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며 단조롭다는 생각은 러시아 혁명 직후에 폭발적으로 분출된 다양한 예술적 실험들과 높은 성취를 알지 못한다면 흔히들 하는 생각이다. 오늘날의 예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20세기의 새로운 미학적 시도와 이론의 많은 부분도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일부였다. 그런데 왜 사회주의에는 미적으로 열등하다는 이미지가 씌워졌을까? 마르크스주의의 예술론을 정리하며 대답을 찾아보자.

대체로 예술이란 단어는 예술작품과 예술가를 연상시킨다. 예술가는 능동적인 주체인 창작자고 예술작품은 객체다. 하지만 예술을 구성하는 다른 요소들도 있다. 외부세계든 예술가의 내면이든 간에 예술가가 작품의 소재나 주제로 삼는 대상도 있고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향유자도 있다. 예술가는 대상을 인식하고 자기 식으로 소화해서 예술작품으로 표현하고 표현된 예술 작품은 향유자에게 수용된다. 이런 과정 밖에서 혼자서 존재하는 예술가도 예술작품도 그리고 예술체험도 없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예술의 대상, 예술가, 작품, 향유자까지 모든 계기들의 상호작용을 강조한다. 예술은 이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관점을 기억하자.

마르크스주의에서 예술의 대상은 사회적 현실이며 예술가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예술작품 속에 충실하게 담아서 예술작품의 향유자인 대중들에게 온전하게 전달해야 한다. 그 결과 대중의 정치의식은 성숙되어 정치적 실천의 주체로 성장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예술관을 들으면 세뇌, 선동, 검열 등을 떠올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예술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는 검열관과 그 뜻에 순종하는 예술가와 수동적으로 세뇌되는 수동적 대중은 마르크스주의 예술관이 근본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운동은 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편견은 더 강화되어서 흔히 참여 예술이라 부르는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예술 전반이 예술적으로 열등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참여 예술과 대조되는 순수 예술의 옹호자들은 미적인 것은 순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을 순수 예술과 참여 예술로 나누는 예술관은 예술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는 것과 짝을 이룬다. 예술의 순수함이란 형식이 내용으로부터 자유롭거나 예술에서 더 본질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용은 학문, 도덕, 종교, 정치 등의 영역과 겹쳐지지만 형식은 그것들과는 별개로 온전히 예술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다. 즉 진리와 선이 예술의 내용을 이루고 아름다움이 형식의 몫이므로 형식이 예술을 예술이게끔 해준다는 생각이다. 내용을 강조하면 예술은 작품 외부에 있는 대상을 작품에 충실하게 반영해서 내용을 올바르고 풍부하게 하는 것을 과제로 삼을 것이다. 반영의 반대편에 표현이 있다. 표현을 중요하게 보는 예술관은 예술창작의 주체인 예술가의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본다. 객관세계에 대한 명료한 인식이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예술은 주관적인 것이어야 한다. 앞의 예술관이 리얼리즘이고 뒤의 생각을 대표하는 예술관이 표현주의다.

리얼리즘과 표현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예술론은 리얼리즘을 분명히 지지한다. 리얼리즘은 예술가의 주관보다 객관적으로 있는 세계에 대한 반영 즉 내용이 예술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리얼리즘의 주장이 타당하려면 객관세계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 예술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예술작품의 향유자들에게 오해 없이 전달해 계몽의 효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객관세계에 대한 주관의 보편적 인식능력이 리얼리즘의 인식론적 전제다. 객관세계가 예술가를 통해 예술작품 안에서 재현되는 과정이 “반영”이다. 표현주의는 불가지론과 연결된다.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아예 불필요할 때 예술은 내면의 밖으로의 표출을 과제로 삼을 것이다. 리얼리즘과 표현주의가 각각 내용과 형식을 반드시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얼리즘은 내용을 우위에 두고 그에 어울리는 형식과의 통일을 이루려 했고 표현주의는 형식적 실험을 강조하며 발전해 나갔다. 그래서 아주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인식론에서의 가지론-반영-내용 중시-리얼리즘-참여 예술이라는 계열과 불가지론-표현-형식 중시-표현주의-순수 예술이라는 계열을 대립시킬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의 미적 열등함에 대한 비판은 대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현실사회주의 사회의 공식 예술관을 향해 있다. 획일적인 형식, 편협한 정치적 입장, 예술품 창작과 향유의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과정, 향유자인 대중의 수동적 역할 등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의 부정적 측면으로 지적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자본주의 진영의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다양한 예술 그리고 도덕적, 정치적 의무로부터 쿨하게 거리를 둔 “순수 예술” 또는 철저히 상업화된 예술과 대비되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토대를 제공한 이가 게오르그 루카치다. 그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에 근거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노선이 예술의 내용이 되어야 하며 그 내용에 부합하는 예술적 형식도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용과 형식의 통일을 강조하지만 그의 예술관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하나의 완고한 규범을 강요하는 논리로 전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가능성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비예술적으로 실현되었다. 루카치의 예술관이 마르크스주의의 예술관을 지나치게 협소하고 경직되게 해석했다는 비판은 루카치의 당대에도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루카치식의 리얼리즘과 표현주의가 대결했지만 나중에는 그 둘을 넘어서려 했던 이른바 ‘리얼리즘 논쟁’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려 한다. 당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예술관은 위에서 언급한 두 계열을 벗어나 예술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려 했다. 이 논쟁은 당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술의 창조적 힘으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드는 더 큰 창조적 과정에 기여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역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에른스트 블로흐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너무나 파편화되어 있어서 사회에 대한 합리적이고 총체적인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인식이 불가능하면 인식에 기반한 반영으로서의 예술은 자본주의의 실상을 보여줄 수가 없다. 파편화된 세상에 어울리는 것은 오히려 표현주의적 예술이다. 순진한 가지론을 전제로 한 리얼리즘보다 표현주의적 실험이 더 혁명적일 수 있다. 루카치는 이런 관점과 예술적 실험들을 퇴폐적이라고 단죄했다.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여기에 마르크스주의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개입해 루카치는 틀려먹었고 블로흐도 잘한 게 없다며 이렇게 주장한다. 블로흐의 견해는 세상에 대한 과학적 인식과 재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불가지론이다. 이를 전제로 한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내면이 주관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불과하며 세상을 바꿀 수 없는 퇴폐적인, 부르주아적인 예술일 뿐이다.

브레히트는 루카치에 대해서는 형식주의라고 비판한다. 묘사해야 될 현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방식 그리고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에서까지 엄격한 표준을 제시했다는 의미다. 루카치가 모범으로 제시한 작품은 부르주아 예술가 토마스 만의 소설이었다. 루카치는 고전주의처럼 바람직한 내용과 그에 걸맞는 형식적 규범을 준수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민중의 예술적 역량은 미숙하므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지지하는 교육받은 계급의 미적 기준 즉 기존 사회의 미적 기준이 다시 새로운 사회의 미적 기준으로 재활용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술의 혁명적 생명력은 형식적 실험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브레히트는 루카치에게 동의할 수 없었다. 예술의 다양한 형식적 실험이야말로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고 예술이 현실에서도 실천적 효과를 낳을 수 있는 근거다. 루카치식의 리얼리즘은 예술적 실험들을 억누르고 동시에 정치적 혁명화의 가능성도 억눌러서 의도와는 반대로 대중들을 보수화시킨다는 것이 브레히트의 생각이었다.

브레히트의 잘 알려진 연극기법인 ‘낯설게 하기’는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몰입을 의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동일시와 몰입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거부했다. 그래야 대중은 기존의 미학적, 정치적 규범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브레히트는 현대의 여러 가지 실험적 퍼포먼스들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 이 형식적 실험이 오히려 진짜 리얼리즘이라는 의미에서 전투적 리얼리즘이라 불렀다. 현실을 반영하느냐 마느냐 또 어떻게 해야 제대로 반영하느냐가 아니라 현실에서 어떤 실천적 효과를 낳느냐가 리얼함의 기준이 되었다.

급진성 거세하는 현대 자본주의

그러나 상업화된 대중문화, 이데올로기 조작의 정교함을 경험한 현대에 와서 형식적 실험은 상업화된 대중문화의 엄청난 소화력 앞에서 무기력함을 보여주었다. 블로흐나 브레히트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어떤 놀랍고 새로운 형식적 실험도 자본주의의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을 다양하게 해줘서 노쇠한 자본주의의 생명만 연장시켜 주었다. 논쟁의 당사자 중 하나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이미 20세기의 전반기에 대중문화 비판을 통해 이런 현실을 지적했다. 예술은 대중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반성하고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것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을지, 그것이 가능한 조건이 무엇일지를 고민하던 아도르노는 유약한 지식인 엘리트들의 사고에서의 반성에 매달렸다. 체제 내로 편입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부정 외에는 실천적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관주의에 빠졌다. 이런 비관주의는 예술의 형식이 순수하게 존재할 수 없고 실천적 효과의 면에서도 무력함을 지적한 것이기도 하다.

내용도 마찬가지다. 급진적 내용이 예술을 급진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가 혁명적인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급진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충분히 그 급진성을 거세할 수 있다. 헐리우드 영화 중에서도 자본주의와 미국사회를 비판하는 소재와 관점은 늘 존재했다. 나치를 피해 망명한 브레히트를 받아준 것도 헐리우드였고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집단이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아도르노가 핵심 구성원인)에게 연구실을 제공한 곳도 미국의 대학이었다. 그들의 급진성은 헐리우드라는 영화 제작과 유통의 시스템, 미국식 학문과 교육의 제도 안에서 혁명성이 제거된 다양하지만 안전한 문화적 종자의 역할만을 했다. (문화적 다양성이란 말은 급진적 사상도 희귀종 동식물처럼 보존해주는 지배계급의 치밀함을 보여줄 뿐이다.) 내용만이 예술의 의미와 실천적 효과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술을 지배하는 매체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어떻게 경험하고 이해하며 창조해야 하는가? 다시 강조하지만 예술의 소재, 예술가, 향유자 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체에 의존해서 일어난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물질적 매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창작자인 예술가나 향유자인 대중이나 매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창조하고 전달하지 못한다. 예술이 기술적,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목소리든 몸짓이든 색이든 도형이든 간에 공기의 진동, 빛의 파동, 몸의 운동 같은 물질을 통해 존재하고 전달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물질적 조건은 자연적이기 보다 인위적인 기술에 의존한다. 입을 사용한 구전에서 인쇄술의 도입으로 문학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다. 예술이 예술가의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행위라는 착각은 특히 ‘기술복제의 시대’가 오면 완전히 깨진다.

오늘날 예술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기술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매체가 오히려 예술을 지배한다. 그리고 매체를 누가 소유했는지가 예술의 성격과 향유방식도 결정한다. 적어도 현대의 예술에서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완전한 동의도 가능하지 않고 정치 이데올로기나 상업적 목적에 종속되지 않은 ‘예술을 위한 예술’은 위선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실질적으로 소유한 록펠러 가문과 미국의 정보기관이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맞서 순수하게 추상적이며 형식적 실험에 집중하는 추상표현주의자 잭슨 폴록을 현대 미술의 스타로 키워낸 일화나 지하경제의 자금관리 수단으로 전락한 고가 미술품 시장의 사례는 예외적 스캔들이 아니라 현대 순수 예술의 일반적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80~90년대의 이념과 분위기를 경멸하던 젊은이들이 같은 시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예능에 열광하기도 한다.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저예산 독립영화의 소재가 되어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상영될 때와 재벌기업이 소유한 종편에서 방송될 때 대중에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중요한 것은 내용과 형식이 아니라 누가 왜 어떤 매체를 통해 그 소재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느냐다.

예술의 기술적, 사회적 조건

리얼리즘 논쟁의 주변에 발터 벤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생산으로서의 예술과 생산자로서의 작가’라는 흥미로운 생각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생산의 한 가지라는 말이다. 예술을 여타의 생산과는 다른 독자적인 영역으로 보기 때문에 예술의 자율성이란 개념이 나온다. 예술의 자율성을 둘러싼 미학적 논쟁이 순수와 참여 예술 논쟁이다. 벤야민은 사회 현실의 총체와의 연관 속에서만 예술이 존재하는데도 그것에서 독립된 자율적 예술이라는 환상을 가졌기 때문에 참여 예술과 순수 예술, 내용과 형식이라는 문제 틀에 갇히게 되었다고 본다. 이 문제들을 전복시켜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을 다르게 볼 수 있다. 예술의 내용을 좀 더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채워 나가는 것과 더 아름답고 혹은 더 큰 감동을 주는 형식을 구현하는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둘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예술적 경험이 일어나는 조건을 반성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 같은 예술의 기술적 조건의 변화와 현대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조건이 예술의 존재방식, 기능, 의미 그리고 무엇보다 실천적 효과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낡은 이야기라고 여긴다. 혹은 예술의 자유로운 실험이나 예술을 통한, 예술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지는 사회 비판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기존 사회 안에서 만들어졌고 인정받는 아름다움, 세련됨의 기준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 미적으로 부족한 것 사이의 양자택일도 여전히 요구된다. 그 덫을 넘어서자. 아름다움과 추함의 예술적 경험이 일어나는 과정과 조건을 반성하자. 특정한 대상에 대해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느끼는 우리의 미적 기준이 어디서 유래해 우리 안에 자리 잡았으며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고민해 보자. 그 과정은 아름다움과 예술이라는 영역 밖의 세상으로, 예술이 존재하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반성까지를 포함하는 큰 문제로 우리를 확장시킬 것이다. 현실 밖에서 미리 정해져 있는 바람직한 예술의 기준을 선험적으로 찾으려 하기보다는 예술이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분석, 반성하고 혁명적으로 변경함으로써 예술의 바람직한 효과를 낳으려 했던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이 지금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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