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월드컵과 사람들]붉은 악마에게 ‘정치’는 없다?

현장 취재

이지안 mulu@kdlpnews.org    이문영 moon@kdlpnews.org
6월 10일, 쏟아 붓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울 시청 앞 광장에 모인 13만의 사람들(사진). 그들 대부분은 붉은 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정말 온 국민이 붉은 악마가 된 것 같았다.

15년 전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었던 장면과는 무척이나 다른 모습이었다. 반미시위를 우려,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기동단 53개 중대가 부산을 떨고 있었지만, 광화문에서 만난 박성규(23)씨는 이에 대해 ‘지나친 간섭’이라고 말했다. “발언을 의도적으로 막는다는 자체가 시민적 권리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축구·쇼트트랙 반미’가 아닌 ‘정치적 반미’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했다. 월드컵 열기가 하늘을 찌르던 이날, 3일 뒤에 있을 지방선거에 대한 붉은 악마들의 생각을 들어봤다.

붉은악마 회원인 신정혁씨(가명·23)는 정치에 대한 불신을 토해냈다. “사람들이 월드컵에만 열광하고 지방 선거에 관심 없는 걸 탓하기만 하면 되나. 정치는 축구만큼 재미가 없다. 축구는 정직한 반면 정치는 온통 거짓말투성이다. 그놈이 그놈인데다가 뽑아줘도 어차피 죄다 썩어버릴 테니 난 기권할 거다.”

경기가 끝난 뒤 시청 앞 광장을 청소하고 있던 임 아무개씨(27) 역시 “13일까지 찍을 사람이 없으면 투표 안하고 찍을 사람 있으면 투표하겠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그는 지금까지 투표를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이들의 반응은 보통 세 가지 유형 중 하나였다. 신씨처럼 처음부터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며” 한 마디로 잘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가 불만이라고 하면서도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 투표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는 모순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홍진호씨(22·가명)가 두 번째 경우로, 그는 “꼭 선거만 닥치면 후보들은 서민이 왕이라고 입에 발린 소리만 한다. 뽑아놓으면 아무 것도 안 하면서…”라며 정치인들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서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라도 투표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엔 “싫다”고 말했다.

또한 세 번째 유형으로, “투표는 할 예정”이지만 후보가 누구인지,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몇몇 정치인 팬클럽 회원들은 응원 중간 중간에 유인물을 통해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모습을 보여 대조를 이뤘다.

노사모 회원들이 배포한 유인물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모두 정치인이 될 필요는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투표에는 동참할 필요가 있다. 한국 대표팀을 향한 우리들의 응원이 16강 진출의 초석이 돼 축구강국에 기여하듯, 우리들의 적극적인 선거참여는 제대로 된 대한민국 일꾼들을 선출하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정치후진국의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날 시청 앞 응원전에 결합한 이문옥 팬클럽 ‘깨끗한 손’ 회원 20여명 또한 “깨끗한 서울을 위해 꼭 투표합시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6.13 지방선거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다.
[ 92호] 6.17 ~ 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