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래도록 문학과 예술을 들여다보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우리시대의 평범한 시민이자 시와 소설, 영화평론 등에도 관심이 있는 문학도. 세상은 마침내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전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낙천주의자
치자염색
우리 뒤를 잇는 다음 세대의 빛깔과 내면은 무얼까
김규종 
지난 3월, 아직 겨울 끄트머리가 대기와 대지와 우리들 육신에 포진하고 있던 날 트럭 운전사에게 화분 두 개를 샀다. 분재치자 화분과 그보다 작은 치자화분. 작은 화분의 치자는 꽃봉오리 하나를 달고 있었는데, 녀석은 4월 중순께 하얀 빛깔의 달콤한 꽃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봄볕이 완연한 5월에 나는 분재치자에서 큰 행운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비록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다섯 송이 치자꽃향기와 빛깔은 되우 잊히지 않을 기억을 선물한 것이다. 아파트 12층 베란다에서 혼자 이슥하도록 고혹한 치자향기와 자태에 경탄하는 시간을 가지곤 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분재치자에는 큼지막한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다. 6월부터 달린 초록빛깔 열매는 여름과 가을을 지나면서 선홍빛으로 바뀌었다.

더러 손으로 만져보면 열매는 나날이 단단해져가는 것이었다. 치자염색에 대한 생각이 미친 것은 늦가을 무렵이었다. 올해는 가을이 깊도록 날씨가 벗하기 좋았던 터라 마음도 푸근한 시간이 많았다. 11월 중순에 치자열매를 따서 볕이 잘 드는 베란다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잘 말리려는 심산이었다. 3주 정도 말리니 녀석들은 아주 딱딱해지는 것이었다.

나흘 전에 치자열매를 작은 절구에 넣고 오래도록 빻았다. 아주 가는 고춧가루처럼 되도록 지극정성으로 30분 가까이 정성들여 절구질을 했다. 그리고 대략 2리터 정도의 물을 부었다. (라면 3개 반 정도 끓일 수 있는 분량의 물이다.) 하룻밤을 묵힌 다음 보자니까 염색물은 노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것을 조금 큰 그릇에 옮겨 담고, 흰 양말 네 켤레를 넣었다.

인터넷 정보는 백반이나 소금을 같이 넣으라고 했다. 요즘처럼 초겨울 추위가 사나울 때 백반을 구하러 밖으로 나갈 만큼 나는 바지런하지 못하다. 그저 약간의 굵은 소금을 넣고 다시 하룻밤을 보냈다. 일요일 저녁에 노랗게 물든 양말을 여러 번 물에 헹궈내서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염색물은 많이 줄었지만, 속옷 하나 정도는 더 물들일 수 있을 듯했다.

주저하지 않고 하얀 반팔 속옷을 물에 담갔다. 오늘 아침에는 노랗게 물든 양말을 신고 학교에 나갈 모양이다. 그전에 속옷을 헹궈내어 건조대에 널 요량이고. 미색의 치자꽃이 초록 열매를 달고 있었는데, 계절과 더불어 그것은 새빨간 빛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열매에서 나온 염료는 노란색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불가사의한 자연의 신비였다.

무릇 염색(染色)이라 함은 주어진 색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는 것을 뜻한다. “一揮掃蕩 血染山下” (일휘소탕 혈염산하: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칼에 새긴 글월이라고 한다. 그의 흉중에 있었을 왜구와 명군에 대한 오래고 깊은 증오를 생각한다. 초록의 산하를 선홍빛 피로 물들이려는 장군의 열망이라니!

요즘에 거리에 나가면 인총들, 특히 젊은 세대의 머리는 타고난 빛깔과 거리가 먼 경우가 다반사다. 연전에 사학과 교수 한분은 현란한 두발염색에 염증이 난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형형색색은 아니더라도 흑발과 거리를 둔 여러 가지 색깔의 두발에서 획일주의와 전체주의의 해체를 보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남한의 자가용 승용차 색깔은 거개가 군청색이나 검정색이었다. 이른바 높은 분들이 그런 색깔의 승용차를 애용하였던 때문이다. 대통령이 넥타이 없이 하얀 와이셔츠 옷깃을 양복 옷깃 위로 드러내놓을 양이면 모든 공무원이 그 꼴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요컨대 군대식의 일사불란 그 자체였다. 교복과 빡빡머리, 단발머리는 또 어떠했던가!

우리 머릿속에도 알게 모르게 남들과 다르면 안 된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절대로 튀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되었던 탓이다. 군부독재와 전체주의를 그토록 혐오했으면서도 실상 우리 내부 깊은 곳에는 다른 맥락이되 동일한 빛깔의 획일주의 잣대가 굳건하다. 우리한테는 두개의 윤리와 잣대가 엄존한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어린 세대나 젊은 세대에게서 나는 유쾌한 가능성을 본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싶어 한다. 물론 예외도 있고, 그들 방식이 기껍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예전 우리세대처럼 주눅 들지 않은 분방함이 좋은 것이다. 물론 어떤 녀석들은 당당하지도 못하고 빛깔도 여전히 흐릿하지만 그래도 나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하얀색을 노란색으로 바꾼 치자열매를 보면서 나는 어떤 색깔을 가지고 세상을 살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색으로 나의 내부를 치장할지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뒤를 이을 다음 세대 아이들은 얼마나 자유롭게 그들만의 색깔과 내면을 만들어갈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내년 봄에도 하얗고 아련한 치자꽃망울과 향기를 만났으면 좋겠다. 치자염색도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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