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감염인, “통제와 감시 아닌 인권증진을”

감염인·인권사회단체, 감염인 인권증진 위한 본격 활동 돌입


감염인·인권단체, ‘에이즈예방법 대응 공동행동’ 발족


정부가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이즈예방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HIV/AIDS 감염인 당사자들을 비롯한 인권사회단체들이 ‘감시’와 ‘통제’ 중심의 정부 에이즈 정책을 비판하며, HIV/AIDS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

HIV/AIDS인권모임 나누리+, 한국HIV/AIDS감염인연대 ‘KANOS'(카노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인권단체연석회의 등 50개 단체와 개인들로 구성된 ’HIV/AIDS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에이즈예방법 대응 공동행동‘(공동행동)은 4일 국회 앞에서 발족 기자회견을 열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부의 에이즈예방법 개정 논의의 전면적 재구성과 감염인 인권보장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보건복지부 이번 에이즈예방법 개정안에 대해 △반인권적 용어 정비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해소 △사회불평등으로부터 보호 강화 △적극적인 예방 및 지원체계 마련 등의 내용을 담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복지부의 설명과 달리 공동행동은 개정안에 대해 “감염인들을 감시하고 통제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겠다는 것이 에이즈예방법의 역사를 지탱하고 있는 패러다임”이라며 “복지부 개정안은 감염인들과 에이즈를 바라보는 후진적 시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에이즈예방법은 1987년 제정된 이래 현재까지 네 차례의 개정을 거쳤지만, 감염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본질적 내용들이 수정되지 않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에이즈예방법 개정안에 대해 △실명관리체계 △강제검진 △사생활 통제 △감염인의 노동권 보장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검사만 익명으로 하면 무슨 소용 있나”

복지부는 이번 개정안을 통해 그간 몰인권적이라는 지적을 받아 온 감염인관리명부를 폐기하고, 익명검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간 HIV검사에서 양성판정을 받게 되면, 감염인은 개인정보와 추정감염경로 등의 정보를 담은 감염인관리명부에 의해 ‘관리’되고, 이는 자치단체와 보건복지부로 보고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개인정보 노출은 물론이고, 명부작성과정에서 성정체성을 드러내야 하는 등 인권침해 요소가 여러 차례 지적되어 왔다.

복지부는 이 같은 문제점이 개정안에서 익명검사 조항 등이 신설돼 해소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공동행동은 여전히 비밀보장과 익명성이 보장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공동행동은 “이번 개정안은 익명검사 조항을 두고 있지만, 검사 후 의사 또는 의료기관이 신고해야 할 정보의 내용을 보건복지부령으로만 두고 있어 감염인 정보 중 어떤 내용이 보고되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며 “개정 이전의 제도를 통해 유추해본다면 여전히 감염인에 대한 실명신고와 보고체계가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검사가 익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양성으로 판정이 난 경우 신고와 보고가 실명으로 이뤄진다면 익명검사가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HIV감염인들을 질병 퍼뜨리는 시한폭탄으로 여기고 있어”

또 복지부 개정안은 감염인이 주소를 이전할 때 관할 보건소에 신고를 의무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공동행동은 “HIV감염인들을 마치 질병을 퍼뜨리고 다니는 시한폭탄처럼 여기고 있다”며 “감염인들의 이동의 자유를 침해할 뿐이며, 전염병예방과 아무런 상관없는 감시의 수단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전염병예방법은 ‘발생 또는 유행 즉시 방역대책을 수립’해야 하는 1군전염병에 대해 주소이전 시 신고의무를 부과하고 있으나, HIV/AIDS는 3군전염병에 해당된다.

또 공동행동은 개정안이 ‘치료 및 보호조치’(에이즈예방법 제15조) 조항을 통해 감염인에 대한 ‘치료’와 ‘보호조치’를 강제적으로 실시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반발하고 있다. 김진섭 카노스 대표는 “기존에 예방법의 ‘강제처분’ 조항에서 ‘치료 및 보호조치’라고 말만 바꾼 인권침해 위험성이 있는 조항”이라며 “오히려 문제는 감염인들이 치료 접근 시 높은 비급여 부담과 병원에서의 비밀누설, 차별 등으로 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공동행동은 에이즈예방법에서 ‘예방조치 없이 행하는 성행위’,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는 행위’ 등을 금지하는 전파매개행위금지 조항(에이즈예방법 제 19조)도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전염이 되어 타인의 생명에 해를 입혔다면, 형법상으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하다”며 “에이즈예방법에 전파매개행위금지 조항을 두는 것은 감염인들을 관리의 대상으로 놓고 통제하려는 의도라고 밖에는 보여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감염인 인권증진 정책이 가장 확실한 에이즈예방책“

이날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감시’와 ‘통제’ 그리고 ‘공포의 확산’으로 일관해 온 정부의 에이즈예방 정책의 패러다임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또 이들은 에이즈라는 질병의 원인을 ‘부도덕한 개인’으로 돌리는 것은 진실도, 에이즈 예방을 위한 길도 아님을 분명히 했다.

김진섭 카노스 대표는 “아직도 에이즈는 단순한 질병이 아닌, 공포와 두려움 나아가 죽음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며 “사회의 낙인과 차별로 감염인은 제대로 치료를 받기는커녕 자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감염인들이 처한 현실을 지적했다.

이어 그는 “현재도 하루 2.1명꼴로 에이즈에 감염되는 사람이 늘고 있지만, ‘감시’와 ‘통제’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에이즈 정책은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며 ”감염인 인권증진에 기반하는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실질적인 에이즈예방책“이라고 강조했다.

“이제는 감염인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권미란 공공의약센터 활동가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 3세계 국가들에서 에이즈가 많이 발생되는 이유가 진정 그들이 부도덕하기 때문인가”라고 물으며 “오히려 에이즈 문제의 본질은 가난한 국가들에 대해 비싼 약값을 받아 이윤을 챙기려는 초국적 제약회사들의 탐욕이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비감염인의 안전을 위해 감염인들을 범죄자 취급하고, 인권침해를 방조해서는 안 된다”며 “한국정부는 에이즈라는 질병의 낙인과 차별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발족한 공동행동은 수십 년 동안 강요된 침묵을 깨고, 감염인 당사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에이즈가 발견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그간 한국사회에서 HIV/AIDS 감염인들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숨죽이고 살아가야만 했다. 언제나 그들은 도덕적 지탄과 혐오의 대상이었고, 국가가 만들어 놓은 ‘감시’와 ‘통제’의 틀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해왔다. 당사자들 그리고 인권사회단체들이 연대해 출범한 공동행동이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HIV/AIDS 그리고 질병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가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