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인들을 위한 소박한 출발

[레인보우]‘전파매개행위’와 HIV/AIDS 인권


1987년 8월, 미국 플로리다 남부의 한 집에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다. 집에는 사남매와 그들의 부모 등 여섯 명이 살고 있었다. 첫째부터 셋째까지, 삼형제가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된 가족이었다. 그들은 혈우병을 앓고 있었는데 감염된 혈액응고제제를 투여 받은 탓이었다. 한 해 전인 1986년에 감염 판정을 받은 이들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소송 끝에 연방법원에서 복귀 명령을 받아냈지만 이번에는 다른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화재가 발생한 것은 그로부터 겨우 삼주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이 가족은 결국 마을을 떠났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사건이지만 (이 마을은 곧 많은 비난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미국의 흔한 모습이기도 했다. HIV/AIDS(후천성면역결핍증)는 198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미대륙은 특히 확진자 수가 많았다. 1987년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세계적으로 6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중 4만 8천 명 가량이 미국의 감염인이었다. 당시 미국 확진자의 90% 이상이 사망했지만 정부는 무관심했고 언론은 선정적인 보도를 일삼았다. 현재까지 30년 넘게 활동해 오고 있는 액트업 뉴욕(ACT UP NY)이 탄생한 것이 1987년 3월의 일이다. 레이건 정부가 이듬해 11월 에이즈위원회를 발족했지만, 여전히 HIV/AIDS를 공중보건의 문제가 아니라 성 윤리의 문제로 ― 제도를 개선하고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비난할 기회로 ― 접근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1987년 9월, 한국 정부는 ‘후천성예방결핍증예방법안’을 제출해 그해 말 제정하고 이듬해 1월부터 시행했다. 이 법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감염의 예방조치 없이 행하는 성행위” 및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하여 타인에게 전파할 수 있는 행위”로 규정되는 이른바 ‘전파매개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있다. 위반 시 벌금형 없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HIV/AIDS에 대처할 뚜렷한 방법이, 정확히는 진지하게 대처할 마음가짐이 없었던 시기, 그저 편견과 공포의 악순환만이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법이다. 2008년 개정으로 성행위는 법조문에 더 이상 명시돼 있지 않지만, 체액이나 혈액을 교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법정에서는 감염인의 성적 행위에 유죄 판결을 내린다.

최근 <한겨레> 보도를 통해 헌법재판소가 이 조항의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기사에 따르면, 심판 제청은 해당 조항 위반 사건 재판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신진화 판사가 지난해 11월 낸 것이다. 그는 정의가 불분명한 ‘체액’과 ‘혈액’이라는 용어의 사용, 무조건 징역형을 내리도록 하는 과도한 벌칙 조항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의 행위를 수사·처벌의 대상으로 규정해 감염인의 행동자유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HIV/ 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는 환영 논평을 통해 “현재 대부분의 법정에서는 전파매개행위를 ‘콘돔 없는 성행위’로만 간주하여 현대 의학의 발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확실한 기준도 없이 처벌”하기에 고지 여부나 전파 가능성 등에 상관없이 감염인을 처벌 위험에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예방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개개인의 사적영역에 대해 통제하고 감시하며 공동체의 붕괴와 갈등을 조장”해 왔다고 평했다.

수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감염과 발병이 늘어가는 상황을 두고 사람들은 ‘에이즈 위기(AIDS crisis)’라 칭했다. 하지만 이 위기는 단순히 HIV 감염 여부를 검사하고 이를 관리·치료할 기술이 부재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적절한 예방 조치와 이를 가능케 할 사회적 인식이 부재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에이즈는 그저 의학적으로 확산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확산된 것이라고, 바이러스의 전염성 때문이 아니라 낙인으로 인해 확산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90년대 중후반 이후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확산 속도가 둔화했고 현재는 발병과 감염 가능성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약까지 개발됐지만, 여전히 어떤 나라들 혹은 어떤 계급들은 문자 그대로의 ‘위기’에 노출돼 있다. 유엔 에이즈 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2018년 현재 전 세계 감염인의 절반 이상이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고 사하라 이남 지역 청소년 신규 감염인의 80%는 여성이다. 같은 시기 질병통제센터 통계는 미국 인구의 13%에 불과한 흑인/아프리카계가 신규 확진자의 42%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조에는 “이 법은 후천성면역결핍증의 예방·관리와 그 감염인의 보호·지원에 필요한 사항을 정함으로써 국민건강의 보호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먹을 수 없다면 무의미하고, 또한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모두 똑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건강’을 위해 특정 집단을 위협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이들의 의료접근성을 보장하는 것, (신약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이에게 2차적 낙인이 가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포함해) 감염인에게 낙인을 가하지 않도록 사회의 관점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국가의 의무일 것이다. 전파매개행위 금지 조항은 그간 많은 비판이 있었음에도 제정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올랐다. 이 조항을 지우는 것, 국가가 앞장서서 찍어온 낙인을 지우는 것은 지난 시간 감염인들이 온몸으로 겪어온 삶에 비하면, 이들이 펼쳐 온 운동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박한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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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

    에이즈 약은 싸졌습니까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비싸다고 그랬잖습니까. 에이즈도 아프리카 원숭이에서 시작된 감염병, 감옥의 수감자들에게 실험을 하다가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설, 세균전쟁, 동성애에 의한 병, 성 행위에 의한 병 등으로 알려졌었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정확한 원인을 모르고 있습니다. 티브이를 보니까 그 병에 걸릴 때는 등에 빨간 점이 생긴다는 말도 그랬는데 말입니다. 에이즈가 새로운 병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그 전부터) 존재했던 병균 같은 것이었다고도 했었는데 말입니다.

  • 아저씨

    미국을 쉽게 비판일색으로 대할 수 없는 원인과 배경이 있습니다. 미국은 양극화가 가장 극심한 나라이지만 다문화, 다인종 국가이고, 중국은 인민자본주의 체제이지만 한족 중심이라서 그 한계가 존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에 어떤 번역서를 보니까 미국이 맑스-레닌주의 연구도 가장 앞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 한반도와 같은 곳은 예전에 중국이라는 대국을 항상 봐왔지만. 미국의 변화를 매우 중요하게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맑스가 살아있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 또는 사회주의가 미국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그 선진적인 곳이니까 말입니다. 샌더스의 선거바람이 궁금해지네요.

  • 아저씨

    어제 노동사회과학연구소의 채만수분을 처음 사진으로 그 실물을 봤습니다. 얼굴인상이 참 환하더군요. 그 분의 글도 90년대 중반부터 간혹 한번씩 봤는데 어제 사진을 보니까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오늘도 한번 보려고 노사과연을 들러보니까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네요. 난 그분의 글이 민중주의와 사회주의를 오가서 별로라고 판단을 해왔답니다. 지금 그분하고 같이 연구하는 분들도 대체로 민중주의에서 머물거나 사회주의의 이론적 혼돈에 머물러 있답니다. 그러니 제가 본 미국인의 번역서는 저들이 맑스-레닌주의 햇갈리는 초등학생들이라고 할라치면 대학원 이상의 수준을 지니고 있었답니다. 서울대가 세계에서 차지하는 순위도 보면 저 아래지요. 아마도 노사과연이 인정을 받기 시작하려면 마르크스의 기초이론부터 레닌의 서적들, 한국에 많이 나왔던 사회과학을 일관성 있게 쓸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은 금방 햇갈려하고, 싫증과 짜증을 내거나, 또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하면서 외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채만수 소장님의 경우에도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기보다는 시류에 타지 않는 일관성이 더 긴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많이 아는 것이 그 빛을 더 발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노사과연은 사회주의 국가권력과 자본주의의 시장,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사회주의 경제를 뒤범벅으로 알고 있는 듯 합니다. 한마디로 그것이 사회주의라는 것입니다. 노사과연을 냉정하게 볼 때는 시류주의자들이고 권력지향주의자들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채만수 소장님, 그 인물은 환하게 아주 좋데요.

  • 아저씨

    얄마, "합시다" 투는 설익은 친구나 낯선 동료들간에 하는 말이야. 니가 선배라고 부르거나 니보다 나이든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 아냐. 니 계속 그러면 니는 동지라고 볼지라도 상대는 니 뒤통수를 계속 노린다. 개코능력 수준으로 계속 합시다. 합시다. 그래봐라.이 출세길이 열리나. 니가 가고자 아는 길이 쉽게 열리나. 니하고 가까운 사람들도 니를 대체할 사람을 계속 물색하겠다.

  • 아저씨

    똘끼충만노정협의 제국주의론 읽기
    거그서 초과착취론이 나온기라. 니덜은 와 핵심을 놓치부노, 그저 그냥 지들의 민족해방론으로 대부분을 채워버리는구만. 어이구, 똘끼만땅노정협, -똥물 티어 같이 비난받는- 똘끼충만땅 노사과연! 거기서 레닌의 약한고리론도 나오지 않았었나.

  • 아저씨

    쌈해가 이긴 넘하고 전쟁을 해서 이긴 국가는 칭찬받더만,
    니들은 개도 아니면서 와 주먹질이나 물고늘어졌쌋노. 아이구, 법률이나 잘 알면 또 몰라. 그것도 진단서도 없는 주먹질을, 또 쌍방폭행이 와 걸리겠노. 치료값 물어주면 끝나겠지. 할 짓 없으며 맨날 그것만 물고늘어지는고만. 그렇게도 고상하게 살고 싶으면 차라리 명산으로 들어가서 고사리를 꺽어먹으며 사상을 하던가.

  • ㅎㅎㅎㅎㅎㅎ

    땡초들의 역사를 알고싶노, 땡초들이 처음부터 산에서 거주한지 아냐. 아니다. 중국의 예로다가 들어줄라치면 유교와 불교의 논리가 지배적인 사상으로다가 경쟁을 한기라. 그래서 유교가 마을에 있던 땡초들을 산으로 몰아낸기라. 알것나. 땡초들이 쫓겨났단 말이다. 무슨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냐. 역사적으루다가 볼라치면 절하고 땡초가 다 산으로 쫓겨난 것이다. 땡초가 그 무거운 절을 들고 산으로 도망갔단 말이다. 그래서 결국 유교가 불교를 이겨서 지배적인 사상이 된기라. 간혹 땡초들 땜에 나라가 망했다는 말 들어봤지. 그것은 땡초가 산에서 불당을 들고 궁궐로 들어간 예가 되것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