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구미 불탄 공장 위를 지키던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박정혜 씨가 지난달 29일, 600일 만에 땅으로 내려왔다. 앞선 6월 19일에는 서울 청계천로 한화빌딩 앞, CCTV 철탑에 올라 97일을 보냈던 조선 하청 노동자 김형수 씨가 땅을 밟았다.
아직 고진수가 남아 있다. 아직 고공에 사람이 있다.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고진수 씨가 오늘도 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 아스팔트 도로 위 10미터 높이 철제 구조물에 올라 폭염과 폭우를 온 몸으로 마주하고 있다.
세종호텔은 지난 2021년 12월, 민주노총 조합원 12명을 무더기로 정리해고했다. 노동조합에 따르면 사측은 코로나 19로 인한 경영위기를 해고 이유로 들었으나, 정리해고 후 1년 만에 호텔이 흑자 전환을 달성하고도 해고자들을 복직시키지 않았다.
정리해고 투쟁은 어느덧 3년을 훌쩍 넘겨 4년 가까이 이어져왔다.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에 맞서 투쟁해온 시간"은 15년이 흘렀다. 해고노동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투쟁을 이어가고 있으나, 지난 시간 세종호텔을 실직적으로 소유·운영하는 대양학원 재단과 세종호텔 사측은 노동조합과의 교섭을 거부하고, 정치권 등의 '중재' 시도에도 응하지 않아 왔다.
올해 2월 13일 새벽, "신발 속 거슬리는 모래알을 넘어 나와 일터를 지키는 위협적인 송곳이 되겠다"며 시작한 고진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의 고공농성은 8월 31일로 200일을 넘겼다.
그런데 최근 대양학원 재단 이사회와 사측이 해고자 복직 문제와 관련해 노동자들과 대화에 나서는 모양새다. 이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이 이어온 고된 투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참세상은 1일 오전,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과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공에 오른 고진수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세종호텔정리해고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3년이 넘는 투쟁의 과정에서 처음으로, 최근 대양학원 재단 이사회가 세종호텔 해고자들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고, 세종호텔 대표가 참여하는 교섭 일정도 잡게 되었다”면서 “일단 마음이 조금 복잡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달 14일, 세종호텔의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세종대학교 학교법인 대양학원의 재단 이사회가 처음으로 세종호텔 해고자 복직 문제를 회의 안건으로 상정해 논의했다. 이사회는 이날 회의를 통해서 해고자 복직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에 대해 의견을 모았고, 구체적 해결 방안은 세종호텔 오세인 대표가 마련하는 안을 지지하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오세인 세종호텔 대표는 지난 28일, 세종호텔정리해고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교섭단이 세종호텔 로비에 진입해 한 시간 가량 교섭을 요구한 끝에, 9월 둘째 주에 서울고용노동청이 주선하는 교섭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교섭 날짜는 9월 1일에 확정하기로 했다.
고진수 지부장에 따르면 세종호텔 사측은 1일 아침, 공대위에 9월 12일로 교섭 일정을 제안했다. 이에 오는 12일 오후 2시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세종호텔 오세인 대표를 포함한 사측 대표 3인과 노동자측 3인, 서울고용노동청 관계자 3인이 첫 교섭을 진행할 계획이다.
2021년 12월 세종호텔 정리해고 후 첫 교섭이다. 노동조합과의 대화를 줄곧 거부해온 사측이 결국 교섭에 나서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고진수 지부장은 이에 대해 “사립학교법인인 세종호텔 자본의 특성상, 정부 재정이 많이 투입되는 등 정부의 관리감독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정부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요구하며 투쟁해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실제 세종호텔을 소유한 세종대학교 재단의 경우, 온갖 비리를 저질러 온 그 전례를 봤을 때도 여전히 마음먹고 들여다 보기만 한다면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며 “우리는 학교법인의 수익사업체인 세종호텔 노동자의 해고 문제도, 실질적으로는 재단 관계자들이나 주명건을 위시한 이들의 사익을 채우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교육부 등을 통해 재단 이사회를 압박하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고 지부장은 “그런 노력들이 이어지는 것과 함께,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 이후 퇴진 투쟁 국면에서 고공 농성을 시작하고, 광장의 힘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단에서도 실제 조금이나마 압박을 느껴, 이사회에서도 처음으로 해고자들의 복직에 대한 안을 마련해보라는 고무적인 결과가 나오고, 세종호텔 사측도 교섭에 응하게 된 것이라 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다만 이사회나 사측이 국정감사 등을 앞두고 당장의 면피를 위한 행보에 나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며 마음에 남아 있는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해고노동자들이 사측과의 교섭에서 요구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고진수 지부장은 “처음부터 저희들은 최소화된 요구를 해왔다”면서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는 6명의 해고노동자에 대한 복직과 해고 기간에 대한 임금 지불 △해고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각종 소송 취하 및 소송 비용의 각자 부담 △부당한 해고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법적으로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보장, 이 네 가지를 처음부터 계속 요구해왔고 지금도 똑같다”고 밝혔다.
세종호텔 사측에 교섭을 요구하는 해고 노동자들. 세종호텔정리해고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제공
고공에서의 200일, 해고 이후 4년 만에 교섭을 앞두고 고진수 지부장이 고공에서 땅으로, 노동자와 시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고진수 지부장은 “우리 박정혜 동지가 너무 긴 시간 동안 고공에서 버텨왔고, 이제는 내려와야만 하는 상황에서 내려온 것”이라며 “이제 정부와 정치권 등에서 고용승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조치들이 나와야 하는데, 여전히 새 정부와 여당의 행태들은 미온적이고, 자신들의 정치적인 성과로만 포장하려고 하는 듯한 모습들을 보면서 참 안타깝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역으로 그만큼 조직 노동의 힘이 여전히 참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고 짚고는 “시민들과 종교단체, 사회운동 단체 등 시민사회 각계에서는 오랜 투쟁의 과정에서 큰 역할들을 해주고 계신데, 정작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 노동에서는 우리의 투쟁들을 더 너르게 연결하고 확장하는데 힘 있게 나서지 못하고 있어 고민이 깊다”고 말했다.
그는 “세종호텔 정리해고 문제는 해고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주명건 일가 등 소수의 사익을 위해 세종대학교와 세종호텔에서 온갖 전횡을 벌이는 대양학원 재단 자본으로부터 피해를 입는 세종대학교 학생들, 대학과 호텔의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면서, 이에 “대양학원 재단의 비리에 맞서 세종대학교 학생들과도 함께 연대하고, 또 우리의 투쟁이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나올 일터의 현실을 바꾸는 싸움이라는 점도 더 알려내고”싶은 마음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측이 “대학 총학생회, 교직원 노동조합, 호텔의 친회사 성향 노조인 ‘세종연합노조’ 등의 일부 집행부를 회유하고, 노동자들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분리시키는 전략에 따라, 해고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가로막는 현실에 화가 나고 답답하다"면서 그럼에도 세종대학교 학생, 노동자들을 비롯해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서로의 고민과 현장을 연결하는 투쟁을 힘 있게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고진수 지부장은 끝으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결국 “자본가와 우리 노동자들 간의 계급 투쟁”이라고 강조하면서 “이 투쟁이 복직이라는 형태로 꼭 마무리될 수 있도록 관심과 연대를 요청드린다”고 마음을 전했다.
한편,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과 사측의 첫 교섭을 앞두고, 노동계와 시민사회도 다시 한 번 마음을 모은다.
너머서울과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등은 세종호텔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민사회·노동조합 연대 기자회견과 신문 광고를 제안했다.
신문 광고 연명 및 모금에는 오는 5일 밤 12시까지 참여할 수 있고, 기자회견은 9월 8일 오전 11시에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