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래도록 문학과 예술을 들여다보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우리시대의 평범한 시민이자 시와 소설, 영화평론 등에도 관심이 있는 문학도. 세상은 마침내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전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낙천주의자
일청담 분수대 옆에서
[김규종의 살아가는이야기] 너른 폭과 삶의 깊이 일깨운 겨울 일청담 분수대
김규종 
큰 추위가 몰아닥친다는 대한(大寒)인데 포근하다. 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언제나 그랬듯 ‘일청담’을 찾는다. 태양열로 작동하는 분수 두 개가 크지 않은 물길을 하늘로 올려대다가 제풀에 숙지고, 감꽃모양의 오각형 산책로를 거느린 작은 인공호수. 그 안에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살아간다. 봄이 오면 아주 작은 치어들이 떼를 지어 앙증맞게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지난 12월에 몰아닥친 한파로 볕이 잘 들지 않는 북사면에는 얼음이 얼기도 했다. 더러 부영양화로 호수물이 녹조현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무척 맑아 물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커다란 금붕어 몇 마리가 유유하게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산책로를 따라 서너 명이 앉을 수 있는 목제 벤치가 띄엄띄엄 놓여있다. 나는 그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다가 딱 마주친 비둘기 두 마리. 녀석들은 인간에게 워낙 익숙해 있어서 한 걸음 거리를 두고서도 별로 피하는 기색이 없다. 부리를 맞대고 비비다가 깃털을 골라주기도 하고, 제 날갯죽지를 다듬기도 하고 제법 분망해 보인다. 그 자리에 서서 녀석들 하는 양을 물끄러미 보자니까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장소를 옮긴다. 다른 녀석은 그냥 서 있고.

그 녀석을 자세히 살펴보니 외다리였다. 요즘 유원지나 공원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부상당한 비둘기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디 딴 곳을 찾는다. 그러다가 날개를 퍼덕이면서 내 뒤 잔디밭으로 옮아간다. 아까 움직인 녀석이 어느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햇볕 따사로운 벤치에 앉아 두 개의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와 하늘과 바람을 본다.

가차운 곳에 있는 키 작은 분수의 물줄기는 높지도 않고 힘이 세지도 않다. 물줄기는 다소 굵지만 둔탁하고 하나로 묶여 있는 형상이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파문이 호수 전체로 퍼져나간다. 먼데 있는 분수의 물줄기는 높기도 하고 여섯 줄기로 뿜어져 나온다. 거기서도 나름의 파문이 만들어지고 호수로 밀려나와 원형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잠시 생각한다. 이켠 분수의 파문과 저쪽 분수의 파문이 서로 만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저쪽 분수의 여섯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각각의 파문이 서로 만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까운 곳의 파문들은 호수 벽에 부딪치면서 되돌아오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퍼져나갔다가 회군한다. 하지만 먼 곳의 분수에서 만들어지는 파문의 운동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잔디밭을 눈길을 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녀석들의 움직임이 한결 적극적이고 입 맞추는 횟수가 잦다. 다리 멀쩡한 녀석이 외다리의 목 주변을 제 부리로 연신 다듬어준다. 깃털도 자꾸만 치장한다. 외다리가 자세를 낮춘다. 아하! 하는 생각이 든다. 짝짓기 중이었다, 녀석들은. 따사로운 일월 하순에 대를 이을 요량으로 한창 작업 중이었다.

외다리 주위를 빙빙 돌면서 분위기 탐색을 하던 수컷이 마침내 등위로 올라탔다. 한 3-4초 지났을까, 녀석이 지면으로 내려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물러난다. 외다리도 부리로 깃털을 다듬으면서 몸을 조금 떠는 듯하다. 나는 외다리가 처연하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형편에 알을 낳아 보겠다는 일념으로 수컷의 구애를 받아들인 것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영화 <오아시스>가 생각나고, 주인공 홍장군과 한공주가 떠오른다. 정신과 육신이 불편한 장애자들의 사랑을 그린 영화 <오아시스>. 난 참 많이 불편했더랬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자막이 운동을 멈추고 나서야 한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것을 나는 ‘주류의 감각에 함몰된 병든 자아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하였다.

외다리 비둘기와 성한 비둘기가 짝짓기 하는 장면에서 나는 장애자들의 대물림을 생각하였다. 그들에게도 반드시 가능한 사랑의 형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언제나 그러하듯 생각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다. 온전한 실천이 동행해야 생각은 덧없는 상념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 다시 그들을 바라본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은 따로 서 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느닷없이 녀석들이 호수를 가로질러 무리가 있는 곳으로 비행한다. 짝짓기가 끝나고 그들은 본거지로 돌아간 것이다. 혼자 외다리로 서 있는 암컷. 다른 녀석들과 장난치는 수컷을 본다. 나는 변변한 둥지도 없어 보이는 외다리의 성공적인 산란과 부화를 생각한다. 쥐와 고양이들, 그리고 동네 각다귀 패거리의 습격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참, 파문은 어찌 됐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분수의 파문들이 맞부딪치는 경계지점 근처에 나는 멈춰 선다. 그들은 충돌하지만 서로의 영역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상대방 영역으로 넘어서 원운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여섯 물줄기에서 만들어지는 파문도 똑같은 형국이다. 각각의 파문이 상대방 파문과 만나면서 서로를 타넘으면서 원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름의 독자성과 고유함을 유지하되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커다란 틀 안에서 평온하게 공존하는 파문들의 조화가 경이롭다. 자신에게 고유한 원형을 잃지 않으면서 상배방과 편안하게 교감하는 파문들의 운동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한낮에 짝짓기를 했던 비둘기들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어울려 그것은 공존의 미덕을 내게 일깨우는 듯하였다.

공자는 일찌감치 네 가지를 버렸다고 한다. 남의 생각을 함부로 헤아리는 것, 나는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 나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그리고 나만을 내세우려는 것.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그가 생각하였던 상생과 조화와 타협의 너른 폭과 삶을 바라보는 깊이를 새삼 생각한다. 그것을 다시 일깨운 겨울 일청담 분수대의 한낮이 시나브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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