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시대, 실천으로 기업의 담을 허물다

[인터뷰]이랜드 일반노동조합을 일군 홍윤경

이랜드와 까르푸 노동조합이 ‘이랜드 일반노동조합’의 이름으로 태어났다. 두 노조의 통합은 유통업계 최초로 자난 5월 만들어진 뉴코아 까르푸 이랜드 공동투쟁본부의 공동투쟁의 성과다. 통합 준비로 한참 바빴던 지난 12일 홍윤경 이랜드노조위원장을 만났다. 20일이 지난 오늘은 위원장이 아니다.

“통합 준비는 잘되는데 어려워요. 막상하려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너무 힘드니까…, 없던 걸로 하고 해산하자라는 우스갯말도 해요.”

이미 두 노조는 조합원 투표를 통하여 97%가 넘는 찬성으로 통합을 결의했다. 형식적 통합을 넘어 실천을 통해 하나가 되는 모범을 만들었다.

통합 높은 찬성이 두렵다

조합원의 높은 찬성률이 더 두렵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되는 게 희망이었지만, 그 길의 미래는 알 수가 없다.

“통합을 해서 어떤 성과가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통합을 하여 그 때부터 성과를 만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익숙했던 사업장별 조합 활동의 틀을 깨야하니 어렵고, 헌신이 더욱 요구되죠. 마냥 좋을 수 없는 이유죠.”

통합 이후, 만약 일이 잘 되지 않을 경우, 통합 때문에 되지 않았다는 욕을 먹어야한다. 모든 책임이 통합노조로 간다. 어려움과 두려움은 여기에 있다.

“통합에는 까르푸의 노력이 컸어요. 까르푸 조합원의 400명이 비정규직이어요. 전체 조합원의 40%가 넘죠. 까르푸가 연중무휴로 영업을 하듯 까르푸 노조 간부들은 연중무휴로 조합원들을 만나며 사업을 해요. 간부들에 대한 신뢰가 굉장히 높아요. 높은 찬성률은 통합의 미래를 조합원이 보고 보낸 게 아니라, 그 동안 까르푸 간부들이 보인 헌신성에 투표를 한 거죠.”

헌신성이 통합 이뤄

까르푸 간부들은 쉼 없이 현장을 순회하며, 조합원이 요구하는 문제는 그때그때 풀려고 노력을 했다. 높은 신뢰의 비결이다. 또한 비정규직 문제에 정규직 조합원이 소홀하거나 반대할 때는 정규직 조합원을 잃더라도 원칙을 분명히 했다. 물론 정규직이 떠나기는커녕 조합은 단단해지고 커져갔다.

웃음이 예쁜 그를 만나는 날은 분당경찰서와 안산경찰서에서 조사받는 날이다. 동대문에서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분당경찰서를 찾아갔다.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등으로 전국 각지 경찰서에 십 수건의 고소고발이 되어있는 사람. 왠지 그의 웃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다.

홍 윤 경. 그는 신앙인이다.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그가 이랜드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순복음교회에 다녔던 홍윤경은 신앙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동아리 선배가 신앙인이 와서 일을 할 곳이 이곳이다”라는 한마디에 가차 없이 이랜드를 선택하였다 .

스무 살의 홍윤경에게 일터는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다. 신앙과 선교의 장이다. “교수님이 ‘니가 왜 그곳에 가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미 다른 직장에 합격을 했거든요. 근로조건이 더 좋은 것도 아닌데 이랜드로 간다니 교수님이 고개를 갸웃한 거죠.”

이랜드는 신앙

입사한 그는 찬양팀에 들었다. 매주 월요일 일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찬양팀은 앞에서 찬송을 인도하는 일을 한다.

“근로조건은 열악하죠, 업무량은 많죠, 하지만 직장에서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는 게 좋았어요. 노동조합을 만든 날도 예배 찬양팀장으로 찬송을 인도하였어요. 예배 끝나자마자 조합 가입원서를 동료에게 돌렸고요.”

1992년 홍윤경은 노사협의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신앙인 홍윤경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노동조합이 뭔지도 몰랐어요. 노동운동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요. 급여는 적지, 일은 많지, 신앙심만으로 버티기는 힘겨웠죠. 좀 더 나은 근무조건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참여했어요.”

그 해 노사협의회에서 급여를 25%를 올렸다. 수치로는 높지만 그간 이랜드 성장에 바친 직원의 헌신과 희생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92년 노사협의회가 끝나자 경영진은 긴장을 하였다. 이렇게 노사협의회를 하다가는 이제껏 직원의 희생으로 이룬 성장과 신화가 물거품이 될 위기다. 경영진들은 노사협의회 위원 선거에 경영진 입장을 대변할 위원들이 뽑히도록 작업을 한다. 홍윤경은 위원을 사퇴한다. 93년 노사협의회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단 한 번 만에 협상을 마무리한다.

자연스럽게 ‘노사협의회로는 될 수 없구나’하는 생각이 직원들에게 퍼진다.

노사협의회는 NO

“노조를 만들지 않고서는 직원들의 근무조건이 바뀔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거죠. 학습모임이 생겼고, 노동조합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죠.”

6개월 뒤, 1993년 10월 이랜드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종교, 특히 기독교가 보수적이지 않는가? 노동조합운동은 진보적인데 신앙과 노조 사이에 갈등은 없었냐고 묻자, 생글생글 웃던 홍윤경은 표정이 바뀌며 따지듯이 말을 한다.

“예수가 있을 때 어디에 있었어요? 부자와 제사장 곁에 있었나요? 가난한 자와 약자의 곁에 있었잖아요. 어떤 이유로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게 사랑이잖아요. 보수적인 신앙의 잣대로 보아도 노동조합과 기독교 정신은 나눠질 수 없어요.”

노조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활동이 신앙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우친다. “선교는 노동자와 함께 있어야 해요. 노조가 선교의 길이고, 노동운동이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거라고 믿어요.”

노조는 선교의 길

십 수 년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한 번도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노조활동에서 참다운 사랑의 길을 찾고 있다.

이랜드노동조합은 남다름이 있다. 남다름의 처음부터 홍윤경은 함께 했다. 이랜드노동조합이 걸어온 길을 보면 남들보다 앞서 문제를 제기하고, 타협하지 않고 싸워온 발자취가 있다. 물론 이랜드의 노조탄압이 다른 회사보다 앞서가고, 강하다는 말과 통한다.


“이랜드노조를 누군가는 극좌파래요.”

이랜드노동조합은 1997년과 2000년에 파업을 하였다. 93년에 노조가 만들어졌는데, 4년이 지나도록 정식 단체협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임시협약의 시효가 지나자 회사는 전임자를 일방 해지하는 등 노조를 없애려고 하였다. 1997년 파업은 이렇게 시작했다.

당시 노조의 요구안에는 ‘1년 이상 된 계약직 직원의 정직원화’가 있다. 지금이야 비정규직이 천만 명에 이르고,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십년 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다.

97년 서른 살의 사무장인 홍윤경은 말한다. “94년 노조를 처음 만들 때 대부분이 대졸 사무직 직원이었어요. 하지만 노조는 사내의 물류배송기사 등 현장에서 가장 열악한 곳의 처우개선을 요구했어요. 판매직 직원의 해고에 맞서서 싸웠고요.”

서른의 홍윤경

57일의 파업으로 노동조합은 매장안의 계산대 직원의 130%를 정직원으로 확보하고, 계약직직원의 정규직화를 약속받았다.

비정규직 투쟁을 남의 일처럼, 심지어 정규직 조합원이 구사대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오늘을 생각하면 이랜드노동조합의 투쟁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0년 파업의 발단도 정규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2000년 6월 27일 노조는 규약을 개정하여 도급, 용역, 파견노동자도 노조에 가입하게 한다. 비정규직 분회가 파업에 돌입하자 사무전문직 등 정규직들도 비정규직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을 벌였다.

또한 사업장을 뛰어넘어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공동투쟁을 벌이며, 노동계에 비정규직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260일이 넘는 파업으로 정규직화를 이루어냈다.

2000년, 서른 중반의 홍윤경은 교육홍보 실장이었다.

서른 중반 홍윤경

조합 만들 때 800명이 넘던 이랜드노조는 지금 두 자리 수의 조합원만이 남았다. 원칙이 옳고, 투쟁이 모범이라고 해도 비판을 비껴갈 수는 없다. 이랜드가 노조에 가한 탄압이야 노동계에서 혀를 두를 정도다. 하지만 초기부터 간부를 한 홍윤경에게 묻고 싶었다.

“맞아요. 탄압이 심했지요. 하지만 회사탄압이 셌다고 하소연만 할 수는 없죠. 원칙을 지키며 열심히 싸웠으니 위안하며 넘어갈 일도 아니죠. 반성을 해요. 지금도 조합에는 가입하지 않지만 노조가 살아있기를 바라는 직원들이 많아요.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고. 조합에 가입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직원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죠. 누군가는 조합을 지켜주기 바라고 있어요. 하지만 이 간극을 줄이지 못한 것은 분명한 실패지요.”

통합노조가 돌파구가 될지 안 될지를 지금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 만들어갈 숙제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길을 걷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지를 아는 홍윤경에게 답을 요구하는 일은 고문일지 모른다.

이랜드노동조합은 단체협약 시효가 끝이 났다. 조합비의 공제도, 노조 전임자도, 노조사무실도 회사는 인정하지 않는다. 단체협약을 가지고 1년 6개월째 싸우고 있다. “쟁의기간 중에 위원장을 맡았는데, 쟁의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통합노조에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통합노조에서 무슨 일이 홍윤경에게 주어질지는 모른다. 무슨 일을 맡든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물론 거기에는 현장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다. 여태껏 그래왔듯이 홍윤경은 씩씩하게 일을 잘 할 것이다.

불혹을 앞둔 홍윤경의 몫

사진기를 들자 웃는 모습을 찍어달라고 한다. 자신이 항상 웃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걸까.

홍윤경은 조합원을 만나려고 홈에버 분당점으로 들어가고, 나는 지하철역을 향한다. 자꾸 고개가 뒤로 돌아간다. 그가 계속 내 곁에 있는 착각에 빠진다. 내 귀에는 자신감 넘치며 쉼 없이 말을 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쟁쟁하다. 작은 몸, 갸름한 눈, 그가 뿜어내는 열정이 내 곁을 맴돈다. “당신 하는 일을 이해해. 하지만 꼭 당신이 해야 해. 애들한테는 누가 대신할 수 없는 엄마의 몫이 있어.” 엄마의 몫? 홍윤경의 몫?

자신이 고갈되어 간다던, 책을 읽으며 고갈된 가슴을 채우고 싶다던 홍윤경. 그에게 엄마의 몫보다 홍윤경의 몫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세상을 펼쳐주고 싶다.
덧붙이는 말

인터뷰는 진보생활문예지인 '삶이 보이는 창'의 도움으로 이뤄졌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삶이보이는창' 1월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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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목록
  • 좋다

    기사가 너무 좋아요

  • 현장에서

    홍윤경 동지를 저도 잘 압니다.
    참 따뜻하고 순수하고 성실하며 열정적인 사람.
    갈수록 살벌 피폐해져가는 노동운동판에
    그이 같은 동지가 있어 그나마 힘이 납니다.
    '이랜드일반노동조합' 아자!

  • 유정무

    오랫만에 이랜드노조 기사를 보았다. 기사 속에 나온 여러 어려움과 갈등 그리고 홍위원장의 그 노력이 정말 사진에서 보듯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렇다 투쟁은 아름다운 것이다. 투쟁은 정당하며, 투쟁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이랜드노조가 하고 잇다. 그리고 홍위원장의 헌신으로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다. 홍위원장을 비롯하여 집행부와 조합원 동지들 모두 건강하시길...., 진정한 노동자는 이랜드 노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