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년 차 그녀의 이야기

[추석 여자 이야기②] B여사의 명절 대처법

참세상 편집국에서는 추석을 맞아 여자들 얘기를 해보기로 했다. 다양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참세상 편집국 성원들이 조용히 수다를 떨던 중 낸 아이디어 였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 자신의 얘기를 공개적으로 한다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거나 다들 사는 모양인데 특별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그녀들은 자신을 조금 숨기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가명으로 글이 나간다는 점,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편집자 주

B여사의 명절 대처법

추석이다.

누군가는 기혼에 아이까지 있는 여성은 ‘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출근을 한다’고 했다. 그 말 참 잘 지었다. 어찌 그리도 잘 묘사를 했는지.

명절도 그렇다. 기혼 여성에게는 명절이 ‘휴식’이 아니라 ‘또 다른 일과 스트레스’의 연장이다.

나는 월요일 저녁 무렵이면 허리에 묵직한 돌멩이를 달아놓은 듯 뻑적지금함을 참으며 앉아서 열심히 전을 부치고 있을 거다. 한 시간 동안 계속 앉아서 전만 부치고 있다가 일어나면 척추를 타고 전기가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겠지.

명절 음식은 먹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이지만, 이 음식들의 재료를 일일이 손보고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고통’이다.

이럴때는 자연스럽게 잔머리가 굴러간다.

난 둘째 며느리, 그러니까 가부장적 한국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챙겨야 하는 첫째 며느리에 비한다면 그래도 책임을 약간은 면제 받은 사람이다.

1단계: 최대한 늦게 간다

사실 잔 머리라고 하기에는 뭐 하지만, 조금 늦게 간다. 그러면 첫째 후덕한 전통적 한국 며느리를 자신의 역할로 삼고 있는 형님이 이것저것 준비를 다 해 놓으신다. 생선도 다듬어 놓고, 동그랑땡 반죽도 다 해놓고, 이미 몇 가지 다른 전들은 다 부쳐져 있다.

바로 그 타이밍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아주 급한 일이 있었던 것처럼...

“어머, 어머 형님, 죄송해요...일찍 오려고 했는데...” 나의 첫 멘트는 결혼 5년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주 내가 빨리 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헉헉대는’ 모션이다. 그리고 1분의 지체도 없이 가방을 바로 내려놓고 형님 옆에 찰싹 붙어 “뭐부터 해야 해요”라며 적극적인 의지를 표하고 이리저리 일거리를 찾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2단계: 일 못하는 며느리 되기

그 다음은? 사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지만, 명절 때는 일을 못하는 게 축복일 수도 있다. 아주 느긋하게 천천히 일을 한다. 절대로 일을 아주 잘해서 혼자서 다 해치울 수 있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 게다가 ‘후딱후딱’은 나에게도 너무 가혹하다.

동그랑땡과 전을 살짝 태워(?) 내 입속으로 가져가는 건 전을 부칠 때 단 하나의 즐거움이다.

생선굽기는 결혼 1년차 시절 정말 비싸고 좋은 생선을 뒤집으면서 부러뜨린 바람에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국을 끓이는 건 간을 잘 못맞추는 것도 있고, 대개는 형님이나 시 할머니가 이미 고깃국물을 내 놓았기 때문에 내 차례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단, 주의사항. 일 못한다는 타박에서 자존심을 꿇지 않는 무딘 성격이다. 난 가끔 날 타박하는지 조차도 잘 모를 때가 많다.

한참 전을 다 부치고 나면, 이제 가족들의 수가 제법 불어나있다. 시아버지도 계시고, 할머니...이제 가족들이 몰려앉아 식사를 할 시간이다.

3단계: 신랑과 같은 시각에 밥상에 앉기

일을 잘 하는 신랑을 만난 것이 복이긴 하다. 우리 신랑은 꽤 일을 잘 해서 심지어 가끔은 내가 전을 태우면 나보고 저기 앉아 있으라고 하고, 자기가 직접 부치기도 하니까.

그러나 신랑과의 본격적인 신경전은 2단계 부터다.

음식을 준비 할 때 설사 ‘평등’했다고 해도, 역시 밥상에 앉는건 순서가 있다. 설사 전을 몽땅 다 신랑이 부쳤다고 치더라도,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서 나보다도 먼저 숟가락을 드는 사람은 항상 신랑이다. 그리고 난 내 밥과 국을 맨 마지막으로 퍼 가야 하는 사람이다.

분명히 옆에서 전도 담고 국도 퍼고 냉장고에서 김치고 꺼내오던 신랑이 어느샌가 보면 꼭 먼저 밥상 앞에 반듯하게 앉아서, 나에게 “어서 와서 먹어”라고 마무리 한다.

명절의 밥상은 나의 힘이 미치는 ‘우리끼리’만의 밥상과는 확실히 성격이 다르다.

이번 명절에는 반드시 내가 먼저 앉아서, 시아버지, 시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나도 국좀 줘~”한 번 해봐야겠다.

4단계: 모든 질문의 화살은 신랑에게로

밥을 먹고 나면 슬슬 질문들이 나올 때가 되었다. 요즘은 어떤 일을 하느냐, 일은 잘 되느냐 등등... 이건 어디까지나 의례적 질문들이다. 그러나 명절 질문 중 단골메뉴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형님네도 딸 둘, 나도 예쁜 딸 하나. 얘네 셋이서 한참 예쁨을 떠는 절정기가 되면, 시아버지가 한 마디 하신다. “아이쿠, 우리 **이 동생볼려고 이렇게 예쁨떠냐~”

그러나 난 못들은 척한다. 그러면 신랑이 마크하기 위해 나선다. “뭐 그런 얘길. 괜한 소리 하지 마요.”

그래 시댁에서의 모든 질문은 신랑이 답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괜히 내가 얘기 했다가는 그 대화의 대상이 나에게로 쏠리기 때문이다. 모든 곤란한 질문은 그 나마 힘의 균형에서 나보다는 그나마 우위에 있는 신랑에게로 몰아라.

5단계: 사위의 지위를 깎아 먹어도 좋다

사실은 4단계가 제일 어려웠다. 내 나름대로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집에서 맛난 거 먹고 잘 대접 받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첫 명절에 집에 갔을 때 신랑은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는 나를 데려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 황당한건 결혼 전과 다르게 우리 집에서 조차 시댁에서의 상황이 연장, 아니 더 악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랑은 어느새 아빠의 옆에 딱 붙어서는 아빠를 따라한다. 첨에는 재미삼아 “물좀 가져와바라~”이렇게 따라하더니, 2년차, 3년차가 되니 이제 아예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아니, ‘자기네 집에서는 내가 일했으니까, 우리집에서는 자기가 일해야 하는 거 아냐?’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우리집은 우리집이다. 밥상의 법칙은 다르다. 우리집 밥상의 법칙에서 제일 늦게 오는 사람은 친정엄마다. 또 기분이 나빠진다.

난 일단 맨 안쪽에 내 자리를 잡는다. 신랑은 되도록 부엌에 가까운 쪽으로 앉힌다. 그리고 마구 시킨다. “김치 쫌만 더~” 이렇게 내가 신랑에게 일을 시키는 걸 본 나의 부모님들은 첨에는 아연 질색하더니 이제 우리 엄마 어떻게 변했냐고?

가끔 집에 내려가면, 우리 엄마 신랑에게 이렇게 말한다. “밥솥에 밥있고, 냉장고 안에 00있으니 챙겨먹고 쉬게~”그리고 휙 마실을 나가신다.

가끔 내가 내 신랑의 위신을 깎아먹었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참 잘한 일이다.

그런데 막 잔머리를 굴려 명절을 보내고 나면, 꼭 내가 TV 드라마에 나오는 못된 며느리 동서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막 들 때가 있다. 사실 내가 일을 안 하면 그 만큼 형님에게 그 일이 돌아가니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은 아니다. 곤란한 질문과 토론은 모두 다소곳한 모습으로 ‘난 몰라요. 신랑에게 다 물어보세요’라는 바보같은 태도도 사실 그리 ‘주체적인(?)’ 대응은 아니다.

결혼 5년차인 나의 명절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 음...이 명절의 딜레마도 결국은 가족을 둘러싼 정치적 관계를 엎는 것만이 답인가보다. 명절은 ‘전복’을 상상하기에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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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 가족 , 명절 , 추석 , 기혼여성 , 여자 , 전복 ,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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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적,부침개,두부,각종 전 부치고 온갖 음식 해다가 한상 차려놓으면 식용유와 가스 사오라는 심부름외엔 게임과 TV시청으로 하루를 보낸 남동생께서 먼저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그리고 내가 절을 할때 술잔을 반대로 돌려라 절을 왜 그렇게 하냐 등등 훈수를 ... 정말 한대 콱 쥐어박고 싶다.
    아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이후 6년간 내가 이 짓을 설,기일,추석 일년에 세번씩 고정으로 하고 있다 ㅠ ㅠ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테지만 집안의 남성과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결국 엄마와 부딪히고 싸우게 된다. 그럴 때 더 힘듬.

  • ㅋㅋ

    남일같지 않고 재밌네요. ㅋㅋㅋ... 잘 대처하시길... 저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