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사유 사용자 '멋대로'

[비정규법 진단(1)]“ 버스회사에 버스기사마저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 없는 비정규직 백태

버스회사의 버스기사는 핵심 업무 종사자일까? 비핵심 업무 종사자일까?

<조선일보>는 지난 7월 16일 자 신문에서 “인천소재의 한 버스회사는 근로자 100명 중 86명이 비정규직”이라며 “비정규직은 버스기사와 정비·사무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매일 정해진 노선을 따라 운전하며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차내 서비스까지 하는 버스기사도 비정규직을 쓴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들은 대부분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계약을 맺었고 업무상 특별한 흠이 없으면 70% 정도는 2~3년 이상 계약을 갱신해왔다. 보도대로라면 이들은 2-3년 이상 계약 갱신을 했어도 정규직이 되지 못했다. 이 회사는 올해 계약기간 2년이 되는 30명을 대부분 해고하고 새로운 비정규직으로 대체한다는 방침이다.

만약 노동부 주장대로 기간제한이 4년으로 연장되면 이 버스기사들은 해고되지 않고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답은 ‘사장 맘대로’다. 현행 2년제에서도 ‘사장 맘대로’다.

<국민일보>가 7월 3일 자에 소개한 CJ푸드빌의 비정규직 사례도 비슷하다. 고모(23, 여)씨는 지난 1일부터 직함이 스태프에서 정규직 리더로 바뀌었다. <국민일보>는 “고 씨가 2007년 5월부터 등촌점 매장에서 손님을 안내하고 주문을 받고, 뜨거운 음식이 담긴 접시를 조심스레 날랐다. 불친절한 손님을 만나고, 점장에게 꾸지람을 들어도 묵묵히 버텼다”고 그녀의 평소 업무를 소개했다.

고 씨의 업무는 페밀리 레스토랑에서 고객을 직접 맞는 일이다. 레스토랑에서 손님을 안내하고 주문을 받는 일은 가장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지만 그녀는 비정규직 이었다. 현행 비정규법으로 그녀는 운 좋게 정규직이 됐다.

누구는 계약 해지되고 누구는 정규직이 되는 데 정해진 기준은 없다.


사용자 멋대로 핵심 비핵심 가르기

그동안 사용자들은 비핵심 업무나 주변업무는 비정규직을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계의 주장을 받아 정치권과 정부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해도 되는 업무를 규정하지 않았다. 사용사유 제한 규정을 기간제법에 넣지 않은 것이다.

이런 법의 허점 때문에 핵심업무와 비핵심업무의 구분은 사용자가 멋대로 했다. 사용자는 핵심업무조차 비핵심업무로 규정하고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2007년 일명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됐어도 비정규직의 난립을 막지 못한 데는 이런 법의 허점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고용불안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될 게 뻔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비정규직 사용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법의 허점을 외면했다.

지난 16일 오전 보건의료노조는 정부 과천청사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노조는 기자회견문에서 “산재의료원과 보훈병원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방사선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간호직, 의무기록사, 기술기능직, 행정보조, 산업위생기사, 영양실 등 병원에서 꼭 필요한 상시업무에서 일해왔다”면서 “필요없는 일자리가 아니라 비정규직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나서 누군가는 다시 일해야 할 자리”라고 강조했다.

비정규직을 계속 사용하게 되면 회전문 일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재계의 주장대로 이런 업무가 비핵심업무라면 업무 자체가 없어도 돼야 한다. 그러나 이 업무들은 없어지지 않고 다른 비정규직으로 채워지거나 외주화 등 간접고용으로 바뀐다.

외주화나 파견 같은 간접고용도 비정규직의 한 형태로 고용이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파견법은 파견할 수 있는 업무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정부는 이마저도 확대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보건의료노조는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돌보는 병원업무 공백과 차질을 없애고,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상시업무에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핵심, 비핵심이 아닌 상시냐 일시냐로 판단해야

최근 A씨는 휴대전화 요금제를 상담하기 위해 이동통신사 상담원과 통화를 했다. 상담원과 연결하는데 시간은 걸렸지만 인터넷으로는 요금제 차이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상담원의 친절한 설명으로 A씨는 만족감을 느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카드사, 은행, 이동통신사 등에 전화상담원(텔러)의 업무는 상시적이고 필수적인 업무가 됐다. 이런 사업의 고객들은 밤낮도 없고 식사시간도 없이 전화를 해 각종 문의를 한다. 그러나 관련 업계의 입장은 ‘텔러는 비핵심 업무’라 기존 정규직과 다른 직급인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상시적이고 필수업무인데도 당연하다는 듯이 비정규직을 써온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전기·가스·시설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1년 계약직 하청노동자들은 지난 4월 중순 핵심 업무라 파업을 할 수 없도록 정한 ‘필수유지업무’로 지정되기도 했다. 애초 병원이 이들 시설관리 업무를 외주 업체로 돌린 것은 비핵심 업무라는 이유였지만 중앙노동위원회는 필수적으로 유지해야 할 업무라고 결정했다.

이렇게 기업 맘대로 비정규직 업무를 정하는 현행 비정규법의 허점을 막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업무엔 비정규직을 못 쓰게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혜진 전국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대표는 “핵심과 비핵심을 가르는 기준이 아무것도 없다”면서 “병원은 의료가 핵심이고 식당은 비핵심 업무라 외주화 하겠다고 하는데 핵심 업무인 의료 쪽에도 비정규직이 들어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전에는 수습으로 표현된 ‘간호사 계약직’인 임시 간호사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혜진 대표는 “심지어 핵심과 비핵심은 기업의 필요에 따라 변한다”며 “상시적인 일엔 정규직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성희 한국 비정규노동센터 소장도 “기간제한으로는 자의적 기준을 제어 하는 데 미약해 비정규직 문제가 안 풀린다”면서 “핵심·주변으로 가르는 논리는 사람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기준을 정하지만 ‘상시·임시’로 나눈다면 직무를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성희 소장은 “상시·임시는 얼마나 일하나가 참조는 되지만 업무 중심구분이라 주관성이 약하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최소한의 극복 방법으로 기간제 사용사유제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유순 민주노총 비조직비정규 국장은 “사용자들은 기간제가 부차적 업무라는 주관적인 판단만 하고 부차 업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의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유순 국장은 “사용사유제한은 정규직의 산전산후 휴가, 산재 결원, 장기 연수 등 직무 교육의 빈자리, 개별수요 폭증으로 불가피하게 사용이 필요할 때 노동부 장관의 허가를 받아 사용하는 것 외엔 비정규직 사용을 불가능하게 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