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

[기고] 대중은 진보적인가?

미합중국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지금의 정국이 어디로 발전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촛불집회와 시위만으로 보면 상황이 더 진전될 기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노조와 같은 조직적 세력들의 참여 측면, 조선 따위의 극우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과 한국방송 지키기 운동 따위로 쟁점이 계속 확대되는 점 등은 최근 2주 사이 변화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온갖 깃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변화라면 변화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정세 분석하자고 하면, 행동 능력 없는 좌파들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세 분석이 없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 정세 분석은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촛불 집회, 시위 정국'이 길어지면서, 이런저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가 정리한 것을 보니, 이명박 이후를 논의할 '진보진영 협의체'를 만들자는 주장, '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제헌'에 앞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 따위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임으로써 전선을 한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 있는 주장들일 수도 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정세를 분석하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없는 당위적인 주장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위에 거론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시위 대중이 '진보적' 또는 '급진적'이라고 보는 듯하다. 이명박 퇴진을 전제로 한 이후 체제 논의로 옮겨가도, 제헌 목소리를 높여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여도, 시위 대중이 강하게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가 전혀 없겠지만, 아니라면 정세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세를 너무 앞서가는 주장은 현실에 유효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껏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 필요한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다고 본다. 그들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착각 말이다. 대중은 현재 단지 미합중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산업 민영화 따위의 민영화(사유화) 반대 목소리에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신문들의 해악을 깨닫고 공영방송의 중요성까지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희망에 빠져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몇달 전까지는 보수화로 치닫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진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얼마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그저 '낮은 투표율' 탓으로 돌리고 말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표면만 본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그럼 지금의 이 모습이 진보적, 급진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현재의 모습은 첫째 모든 권위의 거부이다. 이 거부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적어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를 가장 확실하게 특징짓는 현상인 '불신'이 계속 쌓이다가, '기존 정치 일반의 무능', 특히 '나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정치의 총체적인 무능'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로 터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지배층의 부도덕'(땅 투기, 병역 기피, 학력 위조, 거짓말)부터 '경제 침체'로 대표되는 '무능력'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로 질리다 못해, 이제 그들의 부도덕과 무능 때문에 '생명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쇠고기 이외의 문제들 가운데 건강보험 민영화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하게 얽히는 문제다. 물 문제, 전기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생존과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피부에 와 닿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대중의 급진성은 딱 여기까지다.

대중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대중의 급진성을 따지려면,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60년 동안 한반도 남쪽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파들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였고, 좌파들에게 국가는 '폭력적인 억압 기구'일 뿐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없으니, 시민도 없었다. 우파나 좌파나 모두 '민족'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을 민족이 대체했고, 그래서 이 '민족'은 보수적이고 진보적인(또는 저항적인)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 땅에도 '국가'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시민'의 발견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내세울 만한 나라다. 정보통신 강국, 세계 10권에 육박하는 경제 대국이다. 게다가 이런 경제력은 월드컵 축구 4강,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골프 강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태환과 김연아로 대표되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의 성과까지 가져다줬다. 가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황우석도 있었고, 할리우드와 겨루겠다는 심형래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에 정치 현실은 이런 자부심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외교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효순-미선 사건에 뒤늦게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온 것도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은 '굴욕적 대미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이제 우리도 '미국'에 좀 더 당당해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그런데 이런 대중의 요구와 기존의 국가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무능한 정부'로 대표될 수 없고, '폭력적 억압 기구'의 틀 안에 가둬둘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굴욕적 쇠고기 협상'이 터져 나왔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은 '국가'를 다시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경제 강국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이 이뤄냈고, 세계에 내세울 스포츠 강국은 '박태환'과 '김연아'가 이뤄냈다면, 정치(또는 민주주의)와 외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기존 권위에 대한 거부'도 '국가의 재구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자라오던 '시민'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인들은 진정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와 '시민'에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 끝에 발견한 '해법'이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 '국가'가 우선 광우병 쇠고기를 저지해야 하며 이어서 '시민'의 건강을 지켜줄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하고, 물과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이런 결론은 다시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이다. 결국 이제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탈 계급적 국가주의' 아니 '비계급적 국가주의'(사실 언제 한국의 사회 인식 일반이 계급적인 적이나 있나?)를 직시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덧붙이는 말

이 기고는 신기섭님이 자신의 블로그에(http://blog.jinbo.net/marishin/?pid=279) 쓴 글입니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참세상에 게재합니다. 필자는 블로그에 올린 원문의 마지막 부분을 좀 더 덧붙였습니다.

태그

국가주의 , 대중 , 계급 , 정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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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뻘거

    이진경 교수의 정신나간 듯 보이는 초-주관적 글보다 훨씬 냉철하고, 실천적이군요.

  •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점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너무 앞서나가시는 듯한 느낌은 확실히 있네요. 아마 말씀하신 '따위'의 의견들도 대중의 의식이 진보적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이미 헌법1조를 들고 나온 것만 봐도 그렇게 생각하기 힘듭니다. 대신 우리가 차분하게 주목해야 하는 바를 설명해주신 것은 깊게 고민해봐야 할 듯 합니다.

  • oNO

    한 줄기 서광같은 글이군요!!

  • 새여정

    그동안 나왔던 어떤 글보다도 냉정하고 정확한 글입니다.
    최근에 대중의 폭발에 다들 눈이 멀어 대중찬사하는 논객들이 온갖 말의 성찬을 늘어놓더니 금새 대중의 촛불이 시들어가니 내가 언제 그말을 했냐는 듯 다들 풀이 죽어 있습니다.
    이진경이 명바기 퇴진이후를 대비해한다는 참 웃기지도 않는 언사를 풀어놓더니--해낸게 있어야 퇴진운운하지. 겨우610집회에 참여한 대중에 놀라서 허우적 대다니-
    한 댓글에선 임시정부, 제헌의회까지 언급하더군요. 도데체 그 논리는 참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깜찍하더군요. 잘못쓰면 끔찍하구요. 대중의 폭발에 흥분하고 그 현상을 오독하고 마치 좌파의 세상이 곧 닥칠것인양 분홍칠하는 정세분석과 상상력은 제발 사라져야 합니다. 대중들이 볼때 골 때리죠. 저들은 어째 지맘대로 사물을 재단할까. 하고 비웃을 것 같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냉정한 분석이 전제되고 어떻게 하면 대중의 물결을 좀더 좌익화 할것인가. 좌파가 어떻게 그들과 융합할 것인가가 고민의 핵심이 되야 합니다. 시민이 노동자가 되고 노동자가 시민이 될때 6월 투쟁과 7월투쟁이 서로 빗겨나지 않고 한몸이 될때 우리는 임시정부도 생각할 날이 올것입니다.
    대중에 영합해서 호들갑떠는 글들이 아니라 좀더 냉철하고 시기적절하며 한걸음 나가게 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더 필요한 때입니다.

  • ..

    대중이 딱 거기까지라는 것에는 동의하면서도, 또한 지금의 변화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대중의 끝없는 변화)가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 20년(?), 바로 그 역사안에서 우리가 알건 모르건, 판단하건, 그렇지 아니던간에 세상은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변화(87년 이후 20년,의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끝모르 부격차로 인한 극한의 경제 상황과 만남, 자본의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보수화 개인화 자기보호본능에 빠졌던 대중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분노와 저항)에 만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촛불(수입쇠고기협상)로 대표되는 역사의 실현, 그 자체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가 볼때, 현시점에서 찾고 확인해야할 것은 대중의 상태와 조건보다는 소위 "권"들의 상태를 우선 점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 맞습니다

    위의 다른분들 말씀처럼 시원합니다만, 사실 문제는 이런 정세분석이 좌파든 운동단위에서 없었기 때문에 뭔가를 못하는게 아닌듯합니다. 대중운동의 과잉 상황에 대한 분석과 국가에 대한 태도, 그리고 이런 것들을 다음 과정으로 끌고갈 만한 준비를 고민하면서 스스로의 정치적 실력 부재와 예의 폐쇄성과 선도성, 전위라는 자의식 같은 것들이 현재 진보진영에게 더 큰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 모모

    잘 읽었습니다.

  • 아라

    대중은 진보적인가???
    이번 광우병 정국에서 대중은 필자가 주장하듯 권위에 반발했습니다. 이래서 진보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보적이지가 않다???
    419, 87년 대중들은 일렇듯 독재와 권위에 저항했던것 아닙니까?
    이게 진보가 아니면 어떤것이 진보란 말입니까???

    그런데, 필자는 국가를 넘어서지 못하는 대중들을 말하는 것같습니다. 월드컵에, 아니 요즈음도 태그기를 휘날리며, 애국가를 부르고, 빨갱이를 경계하는 촛불의 현장의 그것을 말입니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것인데요.
    이러한 행동들, 즉, 국가주의와 애국주의에 포섭될수도 있는 대중들이 이러한 행동들 때문에 진보적이라고 하지 않을수는 없다고 봅니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해보죠!
    한국의 대중이 '국가'를 넘는게 쉽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결정적인 순간에 다다르지 않는다면, 국가를 넘기는 어려울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 대중이 진보적인가? 에 대한 진단은 좀더 연구해봐야 합니다. 필자의 글에 대체로 동의를 하는데요.

    필자가 과제로 던지는 사항이기도 한데요.
    결정적인 문제는 좌파세력이 국가를 넘어서는, 계급적인 정치적 침로를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저는 이번 국면의 핵심한계는 이거라고 보는 건데요.

    잘못하면, 선진좌파의 자기 탓을 대중에게 돌리는 듯한 소리로도 들릴수 있습니다.



  • 흐음

    다 맞는 말씀입니다. 헌데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 이라는 사실을 어지간한 좌파들은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함께와 몇몇 철부지 좌파들 말고는 앞으로 나서는 자들이 없었죠.

    (좌파 얘기만 나오면 "폐쇄성과 선도성, 전위라는 자의식" 등등을 들먹이는 것도 무성의하고 낡은 비판입니다. 적어도 이번 국면에선)

    문제는 이겁니다. mb정권내내 곳곳에서 치열한 대결이 벌어질 거란 걸 어지간한 사람들은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뜻밖에도 지나치게 빨리, 예상보다 광범위하게 에너지가 분출됐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이른바 5대의제와 한미 FTA를 막아낼 수 있냐는 거죠.

    레디앙에 집권이냐 변혁이냐를 논의하는 토론이 실렸던데 어떻게 보면 그런 토론도 한가하다 싶어요.

  • 최원

    신기섭기자의 주장에 따르면, 촛불시위 대중은 월드컵을 개최하고 김연아 선수를 낳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국의 아직 후진적인 정치분야를 보수공사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더군다나 그 근본에는 (미국에 대한) 민족적, 국가적 자존심의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촛불대중은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이 그의 판단인데, 현재 대중들이 국가가 국가답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주권 그 자체가 초민족적 독점자본 및 그것의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강탈되어 있는 상황으로 인해 대부분의 국가가(심지어 미국마저) 더이상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헤게모니적 기능을 하지도 못하는 데에서 생겨나는 현상이지, 근대화에 지각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유별나게 생겨나는 현상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은 이제 국가를 더 이상 숭고한 것으로 바라보지도 않고, 더 나아가서 "제도정치/국가정치"를 통한 삶의 변화를 시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다. 불만이 표출되는 방식은 다르지만, 이명박과 유비되곤 하는 사르코지에 대해서도 거의 동일한 불만이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기자도 말하듯이 문제는 정치인들의 무능력이자, 국가의 무능력인데, 이는 단순히 어떤 특정인의 무능력의 문제도 아닐 뿐 아니라, 특정 국가나 특정 민족의 특수한 사정으로 인한 것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문제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조직되는 반정치(anti-politics)의 일반화와 국가(City)의 형해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대중들의 분노는 정당한 것이고, 대중들이 인민주권의 문제를 전면화한 것도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이러한 대중들의 지향과 욕망을 뒤늦게 깨달은 민족적 자존심이나 지키려는 것으로 폄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제대로 개입할 길을 찾지 못하는 무능력 앞에 선 좌파의 자존심이 아닐까. 정말 이 글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 금속노동자

    최원 씨, 활동가 입장에서 당신의 전혀 실천적이지 못한 글보다 신기섭 님의 글이 훨씬 값지군요.

  • ㅇㅇ

    최원, "신자유주의 하에서 주권 그 자체가 초민족적 독점자본 및 그것의 테크노크라트들에 의해 강탈되어 있는 상황"
    ->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주사파 주장하고 무슨 차이가 있나? 경험적으로 증명가능한가? 이제는 이런 말 들으면 또라이 같이 느껴진다.

  • 대중1

    나는 대중입니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공공재 사유화, 미친교육(영어몰입교육등),한미FTA,대운하는 반드시 막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이명박과 한나라당 민주당등 신자유주의세력 다 몰아내고 자주적인 정권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런후에 점진적으로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것을 고쳐갔으면 합니다. 사회주의는 원하지 않습니다. 한번에 사회주의로 바뀌는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같은 막장 불평등에서는 못살지만 어느정도 심하지 않은 불평등한 사회에서는 살수 있습니다. '모두 평등하게 살수 있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을 따르라고 하면 안 따라갑니다. 몰라서 혹은 알면서도 따르기 싫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느껴서 사회주의에 동의 할때까지 옆에서 앞에서 참고할수있게 보여만 줬으면 좋겠습니다. 운동권은 제일 급한 미친소 민영화등 한미FTA와 대운하를 막는 일을 도와줬으면 합니다. 이명박과 신자유주의 세력을 물리치는 일까지만 도와줬으면 합니다.

  • 김씨

    정세는 한쪽만 보고 분석하는게 아닙니다. 조금 축약해서 다른 주장에 댓글이면 적당하겠습니다.

  • 나그네

    솔직히 이런 글 답답하네요.
    대중이 선험적으로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러나 지금과 같이 대중이 자기 목소리를 광장에서 내기 시작한 시점, 그것도 정권의 존립기반 자체를 흔들면서 내기 시작한 시점에서 케케묵은 '시민의 비계급성'을 증명해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스스로를 계급적이라고 호명하는 좌파가 (오로지 그 '좌파'라는 사람들의 도식속에서만) 비계급적인 시민들에게 자존심 싸움을 거는 것 말고 이런 글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요?

    이미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는 시민들에게 국가주의냐 비국가주의냐라는 낡은 이분법을 들이미는 글쓴이의 인식이 개탄스러울 따름입니다.

  • 신기섭

    글을 쓴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의 다양한 의견 고맙게 생각합니다. 일일이 답변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모두 읽었으며, 비판과 지적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고민해보겠습니다.

    한가지만은 언급해야겠습니다. 최원님이 쓰신 글입니다.

    신자유주의가 극에 달하면서 정치가 사라졌다는 것, 그리고 주권 개념이 실종됐다는 것, 이런 현상은 전세계적이라는 것, 모두 동의합니다. (저도 촛불집회가 막 시작됐을 때, 이는 전세계적 현상인 정치 부재와 맥이 닿아있다고 쓴 바 있습니다. 다만 저는 제가 이렇게 인식한 것이 대단한 발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국제 상황에 약간 관심을 기울이면, 그리 어렵기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해해야 할 것은, 이런 조건이 각국에서 어떤 계기로, 어떤 양상으로 ’봉기‘ 또는 대규모 시위를 유발하느냐는 각국의 상황, 각국 인민의 인식 등에 따라 다르다는 점입니다.

    규정력을 지닌 전세계 보편적 상황과 개별 국가 상황의 특수성은 언제나 함께 고민되어야 할 겁니다. “신자유주의 하의 반정치”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반정치‘가 한국에서 어떤 맥락과 상황에서 제기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촛불시위‘라는 ’반정치‘에 개입할 길은 없습니다.

    두번째로, 대중의 지향과 욕망을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으로 폄하한다는 최원님의 지적은, 사실 제 글에 대한 오해가 아니고 왜곡에 가까운 것입니다. 읽는 사람 마음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읽는 것은 참으로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는 것은, 이런 식이면 논의의 진척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 글은 ’민족적 자존심‘이 아니라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강조하고 있고, 이는 무엇보다 경제적 성과에서 출발한다는 겁니다. ’민족적 자존심‘과는 하등 관계가 없습니다. 경제적 성과가 ’국가적 자부심‘을 유발했고, 그것이 마침내 광우병 위험으로 상징되는 ’개인의 안전‘에 도달한 것이라는 게 주장의 핵심입니다. 이 쯤에서 당연히 ‘국가는 나에게 무엇인가?‘가 정말 진지하게 제기되는 질문이며, 그래서 자연스런 귀결은 ’국가를 새로 구성하자‘는 것으로 갑니다. 이건 사실 굉장히 ’급진적‘입니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을 폄하하다니요? 대중들이 ’국가를 새로 구성하자‘고 요구하고 있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찬사를 찾기가 도리어 어렵습니다.

    문제는 ’국가를 새로 구성하자‘는 이 요구가 ’국가의 정당성‘을 전제로 한 ’국가‘ 만능 곧 국가주의로 갈 것이라는 점, 이것이 제 주장의 요지입니다. 그러니 ’국가를 새로 구성하자‘는 요구가 ’비계급적 국가주의‘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좌파 또는 진보세력이 제대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제 결론이구요.

    마지막으로, ’김씨‘라는 분의 “정세는 한쪽만 보고 분석하는게 아닙니다.”라는 말씀을 언급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글은 ’정세 분석‘이 아닙니다. 정세 분석의 전제라고 제가 생각하는 부분 곧 ’대중의 상태‘에 대한 제 의견의 제시입니다. 제가 정세를 분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제가 누구보다 가장 잘 압니다.

  • 꿈이

    그러니 대중은 '강하고 품위있는 국가' 를 원한며 딱 그만큼만 진보적이라는 말씀이군요. 저는, 누군가 저를 '국민(한국정부가 주는 국적을 가진자 - 열손가락에 지문을 찍어야하는)'이나 '시민(뭐가 '시민이죠?')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주민'이나, '동물', '지구인' 정도로 불러야 할까요? '한반도 남쪽에 거주(이동하는 것을 포함)하거나 이곳의 질서에 영향을 받는 지구인' 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근대'의 상징인 '민족'과 '국가'에 의한, 사람들,집단들간의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면, 그럼하면 운동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 제로

    신기섭씨는 대중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보는 것 같네요.
    반면 이진경씨는 대중을 하나의 단일한(다중적이진 않은) '흐름'으로 보는 거구요.
    전 이진경씨 주장에 공감합니다.그게 더 현실적이고 냉철하며 변증법적인 인식이라고 생각돼요.

    대중은 언제나 혁명가들의 기대를 때로는 한참 밑돌기도 했지만 때로는 그 기대를 완전히 뛰어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동성은 대중을 실체가 아닌 흐름으로 이해할 때 보다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의 현재를 추앙만 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 잠재력을 '딱 거기까지만'이라고 선 긋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해 보입니다.

  • 들사람

    제 생각에 신기섭님의 글은, 김강기명님의 글과 섞어 읽으면 일종의 상승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잖을까 싶슴다.

    촛불집회의 역동성을 둘러싸고 보이는 자족적 낭만화를 경계하는 글이랄 수 있겠는데, 역시나 신 위원 스스로 언급했듯이 포인트는 작금의 역동성에는 그 '진보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잘나가는 세계 속의 대한민국 정부'를 욕망하는, 이른바 (엔엘스런 민족주의와는 대별되는) '대한민국주의'로 수렴할 계기들이 내재하고 있다는 검다.

    달리 말해, 미친소 유통 문제로 생성된 작금의 흐름이 지닌 역동성은 어디까지나 지난 세기 초중반, 그니까 일본령 조선기 때 형성된 근대국가(!)를 원형으로, 1945년 이후 지정학적 재편 속에서 단속적 변주를 이뤄온 저 대한민국 국가/정부에 대한 "전면 포맷"의 열망이 발현됐다는 한에서만 진보적이랄까요.

    이런 대한민국의 유구한 연륜과 내력에 기대 참 조야하게 삐대온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에게야, 그 요구만으로도 (특히나 결과의 불확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몹시 성가시고 언짢으며, 어떤 본능적 공포를 유발하는 일이겠지만요.

    중요한 건, 이런 열망이 그 자체로는 더 나은 상황을 보장하진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전면 포맷에 대한 열망은 공화주의적 요구를 고리로 한다 해도 "제대로된 자유(민주)주의 정부"의 창출이라는 고루한 전망에 갇힐 수 있다는 얘기지요. 포맷의 잠재력이 고작해야 리셋 수준으로 오그라들고 만달까요?

    따지고 보면 30년 가까이 굴러먹어온 소위 "세계화 체제"의 동요가, 자본운동의 자유방임이 부른 지랄 같은 패악에 대한 반발인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적 통치술에 대한 신뢰 내지 지구문화적인 합의가 사실상 넝마 수준으로 너덜해졌음을 시사하는 징후라는 데 유념한다면 "대한민국주의"로 촛불의 열망이 오그라드는 상황은, 외려 그 열망의 "순수성"으로 인해 자기부정적, 자기파괴적 결과를 초래할 공산이 큼다.

    더구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형태의 "역사적 업"을 고려한다면 사실 큰 정도가 아니라, 필시 그런 결과를 초래하게 될 거고요. 이쯤 되면 순수가 아니라 순진에 가까운 게 되겠지만요.

    이러하니,
    현재의 역동적 흐름이 얼마든지 반동적인 방향으로 귀착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염두에 두자는 얘기로 읽힙니다. 제가 보기에, 신위원의 논지인즉슨.

    다른 한편으론, 소위 좌파를 자처해왔던 이들이 지적, 이론적 무기로 활용해온 "국가-정부론"을 "진정 좌파적인"ㅋ; 시각에서 전면 갱신해야잖겠냔 얘기로도 읽히고..

    아닌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부-국가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합의는 사실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늘상 불거져 나오기 마련인 정치적 필요조건이자 세속화된 종교처럼 일상화돼 있는데도,
    이런 "생동하는 조건"으로서 근대국가-정부를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지 싶어요. 풀란차스니 그람시, 알튀세르 얘기 좀 나오다, 누다 만 똥처럼 "진전된 논의"가 개운찮게 중단된 느낌이랄까요?

  • 좀 불공평하지 않나요?
    국가에 다시 귀속된다고 해서 진보적이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런 비판을 기존의 좌파들이 피해갈 수 있나요? 내가하면 로맨서, 남이하면 불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