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래도록 문학과 예술을 들여다보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우리시대의 평범한 시민이자 시와 소설, 영화평론 등에도 관심이 있는 문학도. 세상은 마침내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전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낙천주의자
겨울 문턱에서
김규종 
창밖 풍경이 다채롭다. 여러 빛깔들이 어우러져 내뿜는 자연의 자태가 사뭇 아름답다. 매양 왔다가 사라져가는 계절이고 자연의 이법이련만 거기에 새삼스런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덧없음에 대한 인간의 깨달음에는 처연함이 숨어있는 듯하다. 가을날 차분하게 물든 형형색색의 이파리들과 그것들이 선사하는 파스텔 질감의 거리풍경은 자연스레 생의 만년과 살아온 나날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학기에 ‘평생교육원’에서 영화를 강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지난 학기에 영화강의를 개설하려 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던 터라 즐거운 마음으로 강의를 시작하였다. 강의원제는 ‘21세기 라이프스타일’이었다. 그것의 부제로 첨부된 것이 <영화로 세상보기>. 부제가 본래 내가 생각한 제목이었으니, 본말이 전도된 수업인 셈이다. 하지만 어떠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 그만인 것을!

평생교육원 명예대학원 1-2학년을 대상으로 한 영화수업은 이제 삼분의 이 정도 마무리되었다. 경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이 좋아서 종신토록 남아있고 싶어 하는 노인들이 주축이 된 명예대학원. 그분들에게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리라 생각하고 수업에 임하였다.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청중으로 삼아 펼치는 대중강연이 어떠할지 여러분 상상에 맡기도록 한다.

5공 수괴가 1983년 대청댐에 지어 주로 여름 휴양지로 썼고,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청남대의 본래 명칭은 영춘재(迎春齋)다. 남쪽의 청와대란 의미를 가진 청남대는 지난 2003년 4월 18일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2005년 8월 4일 200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절대 권력자들의 휴식공간이나마 몸소 확인해보고자 하는 이 땅 민초들의 드센 바람이 어떠한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얼마 전 평생교육원 수업 때 몇몇 노인들이 청남대 관광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간 말은 ‘전두환-노태우 그 XX들!’이었다. 강의실은 일순 고요해졌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언젠가 그곳에서 청남대 수비군인들에게 쫓겨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내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순서를 정한 사람들처럼 차례대로 일어나 나의 오류를 질타했다.

요약하면 공식적인 강의시간에 전임 대통령들을 그런 식으로 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이니까. 이야기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내가 그동안 강의시간에서 비판했던 전임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 그러니까 박정희와 그 졸개들, 이른바 티케이로 불리는 자들에 대한 예찬이 뒤를 이었다. 끝내는 광주항쟁에 대한 집단적인 반발도 나왔다. 왜 하필이면 다른 곳이 아니라 광주에서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는지. 국가는 그런 폭도들을 죽여도 좋다는, 아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난감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왜 박정희는 일제 만군 육사에 들어갔고, 왜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 했으며, 왜 광복군으로 변신하여 귀국하였고, 왜 남로당에 가담하였다가,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혼자 살아남았고, 왜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였으며, 왜 인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대구사람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박정희는 왜 자기가 아끼던 가신 김재규 총을 맞고 죽었는지. 난 그 이유를 모른다. 왜 그랬을까.

나는 노인들에게 전직 대통령들을 쌍욕으로 비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참 우울한 이야기는 그들이 즐겨 하는 이야기였다. 어느 정당 대변인이 말했다는 전직 여성 법무장관과 현직 장관이 호텔에서 나왔으니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는 이야기. 남북화해와 협력에 힘쓴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을 희화화하여 비하하는 이야기 등등.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럼없이 ‘노무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에게 대구의 전직들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한다.

마침 그날은 한글날 다음날이었다. 소중화 (小中華) 사상에 찌든 집현전 학사들의 상소를 뿌리치고 한글을 창제하여 청사에 길이 빛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남긴 세종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주었다. 1992년부터 유네스코가 제정한 문맹퇴치를 위한 ‘세종상’과 1997년부터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된 한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덧붙여 알려주었다.

한글이 그렇게 세계에서 대접을 받는 가치 있는 문화유산이 되었는데, 정작 그 나라에서는 한글날을 국경일에서 제외하였다는 사실을. 그런데 그렇게 일이 되어버린 것은 여러분의 노태우 대통령 ‘각하’ 시절부터라고. 노인들은 저으기 동요하였다. 강의를 마치면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다가 잠시 생각하였다: “야, 케이, 너 참 못됐다!”

나는 하이에나(승냥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표범이나 치타가 어렵사리 잡아놓은 먹이를 당연히 제몫인양 물고 가는 그들의 낯짝을 보면 왜 그리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나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같은 전직들을 떠올리면 언제나 그들이 하이에나와 똑같다고 생각한다. 난 그들을 반드시 ‘학살자’라고 부른다. 권력을 위하여 동족의 가슴에 총과 칼을 쑤셔 박은 하이에나들. 그리고 조선시대 소중화에 함몰되었던 정신 나간 인간들과 똑같이 하이에나들에게 충성을 다하였던 새끼 하이에나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틈틈이 하지만 근면하게 금과옥조로 내세웠던 국가와 민족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를 마음대로 유린한 승냥이 패거리의 후예들이 여전히 득의양양하게 백주대낮을 활보하고, 구국의 선봉을 자임하겠노라고 포효하는 우리시대의 참으로 어두운 자화상을 본다. 과거는 지난 시대 인간들의 관(棺)과 함께 확실히 못질을 쳐서 완전히 매장했어야 할 것을. 우리는 여전히 지난 시대의 망령들과 그것들의 하수인인 하이에나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미래가 과거를 이기는 것은 미래가 과거를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부를 외부에 남겨둔다면 미래는 과거에 패배한다.”(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에서)

가을이 깊어간다. 곧 겨울이 찾아올 테고, 한해가 시나브로 우리 곁을 떠날 것이다. 시간과 더불어 우리는 보낼 것은 반드시 보내야 한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보내면 된다는 생각으로 60년 세월을 보냈고, 오늘날 완전히 일그러진 대한민국을 본다. 나는 노인들을 더 이상 설득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소중한 생명과 무상한 권력과 괴로운 이땅의 민초들과 지진으로 고통 받는 파키스탄 인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작은 변화라도 있기를 기대하지만, 아니면 또 어떤가. 봄은 또 올 것을!
- '케이'는 글쓴이 성에서 따온 영어의 첫 글자로, 부정적인 일과 대면할 때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쓰는 습관적인 어조임. 참고로 필자는 가능하면 영어사용을 피하고자 노력하고 있음.
- '라이프스타일'에 대해서는 강의 첫시간에 통렬하게 비판하였음. 언어와 문자생활에서 제 나라 말을 이토록 업수이 여기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일본을 빼면)
[알엠] 보육료 감면 받기 (0) 2005.11.11
[김규종] 겨울 문턱에서 (0) 2005.11.01
[최인기] 깍두기 형님들과 행정대집행 법 (0) 2005.11.01
[지문반대] 주민등록번호 그만 쓰자 (0) 2005.11.01
[완군] ‘셧다운(shut down)제도’ 도입을 외치는 자들이여 '셧더마우스(shut the mouth)' 하라! (1) 2005.10.28
[정병기] 진정 검찰의 독립을 가로막는 자 누구인가? (0) 2005.10.18
[김규종] 잊혀진다는 것에 대하여 (0) 2005.10.17
[지문반대] 죄짓고 살지 말지어다... (0) 2005.10.17
[박미선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차이와 변혁을 가져오는 대항기억의 반복을" (0) 2005.10.12
[김규종] 트럭 운전사 (0) 2005.10.08
[김규종] 며느리밑씻개와 금강산 관광 (0) 2005.09.20
[김규종] 옛일을 생각한다 (0) 2005.09.12
[해미] 끊임없이 죽음 부르는 건설 현장 (0) 2005.10.10
[시다바리]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 해체 요구'와 '의료기업과의 제휴' (0) 2005.10.06
[장귀연] 쓰레기통과 허리케인 (2) 2005.09.26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