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햇살 한 조각

[통역안내사 집중취재](6) - 나는 노동자로 다시 태어났다

계약직 관광통역안내사 집중취재 기사를 6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부득이 취재원의 이름을 가명으로 한 점 양해를 구합니다. - 편집자 주

녹색재킷에 검정스커트. 국가대표 선수의 유니폼이 아니다. 관광통역안내사 안미애의 제복이다. 안미애는 녹색 재킷을 너무 좋아하고, 앞으로도 녹색재킷을 입고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벌써 이 옷을 입지 못한지 1,000일이 넘었다. 하지만 안미애의 붙박이 옷장에는 녹색 재킷이 걸려있다. 꼭 다시 입으리라는 다짐처럼 아직도 반듯하게 걸려있다.

국가대표 노동자

2006년 12월 21일. 안미애는 1,000일을 하루같이 바라만보며 옷장 문을 닫아야 했던 제복을 꺼내들었다. 절대 울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옷장에서 녹색제복이 나오는 순간 무너졌다. 제복을 부둥켜안고 운다.

“당신! 회사에서 필요 없다는데 뭐야!” 16년 일한 직장에서 쫓겨나면서 안미애가 들은 이야기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울부짖으며 사정한 그는 시장판 시래기보다 못한 소리를 들으며 쫓겨났다.

차장이라고 하지만 입사 후배인 상사에게 당신, 하는 막말을 들은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렇게 쫓겨난 안미애는 울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구걸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인권위도 쫓아가고, 노동부도 달려가고, 정당도 찾아다녔다. 부당한 해고가 분명한데 하소연할 곳 없었던 그는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여보, 우리가 자식을 키우는데 정의의 곁에 있어야지, 어렵고 힘들다고 불의에 물러서서야 되겠소.”

정의의 편에 서서

남편의 말이 힘이 되었다. 지방노동위를 시작으로 중노위, 행정소송, 고법, 대법에 이르기까지 남편의 이 말이 지친 안미애의 어깨동무가 되었다. 안미애. 올해 마흔 넷, 열 살배기 딸이 있다.

그리고 안미애는 녹색재킷을 꺼낼 수 있었다. 안미애의 해고는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고, 시래기 취급을 하며 버린 회사는 대법에서 패소를 했다.

“제가 팀장을 맡고 있었죠. 제 팀원이 고객의 요청으로 회사에서 지정하지 않은 사우나를 안내했어요. 그 날은 폭설이 내렸는데, 호텔 주변에는 회사가 지정한 업소가 없었어요. 고객은 눈이 오는데 차를 타고 사우나는 가기 싫고 걸어서 갈 곳을 안내해 달라고 했고요.”

팀원은 지정되지 않은 곳으로 고객을 인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폭설이 내린 관계로 호텔 가까운 곳의 사우나를 안내했다.

고객의 요구

하지만 한 달정도 지난 뒤, 이 사우나 시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불만사항이 접수되었고, 팀장이었던 안미애는 회사에 불려갔다.

“자초지정을 알아보니 팀원이 했더라고요. 마침 그 팀원이 한 달 징계를 먹었어요. 공항에 마중을 나갈 때, 고객 도착시간 한 시간 전에 도착해야한다는 규정을 어긴 거죠.”

팀장인 안미애는 징계 중인 팀원을 다시 징계를 받게 할 수 없어 자신이 했다고 진술서를 썼다. 자신은 16년을 근무한 팀장이고, 징계 중인 팀원보다는 징계가 가볍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팀원이 한 일은 어차피 팀장인 제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고, 팀장으로 후배 직원을 이 정도는 감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회사는 다시 안미애를 호출했다.

“안미애 씨, 진술서 내용이 맞나요?” 다짜고짜 묻는다.

“네.”

“그럼, 가보세요.” 해명할 기회도 짬도 주지 않고 나가라 하더니 ‘해고’라는 통보가 왔다.

해명할 시간도 없이

“제가 16년이나 일한 일터고, 회사도 저를 믿고 팀장을 맡겼는데, 이렇다 저렇다 말할 기회라도 주고 잘라야죠. 어찌 이리 짜를 수가 있나요.”

안미애가 해고되었다는 말에 동료들이 탄원서를 들고 회사를 찾아가 사정했지만 ‘일벌백계’라는 말로 무시했다.

실제 잘못을 저지른 팀원은 대표이사 집에까지 가서 사정을 했다.

“제가 한 일입니다. 저를 해고해 주세요.” 발밑에 꿇어앉아 빌었건만 소용이 없었다. 물론 이 직원도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안미애의 해고도 바뀌지는 않았다.

2004년 봄은 매섭고 잔인하게 안미애를 찾아왔다. 그리고 천 날이 지난 2006년 겨울, 따사롭게 복직 판정을 받았다.

따사로운 겨울이 오다

“부당해고로 중노위에서 복직 판정을 받았는데도, 회사의 항고로 대법까지 간다는 게 너무나 길고 억울해요. 해고는 서민에게 생존을 다투는 문제인데…. 서너 달, 일 년도 아닌 몇 년 씩 걸려야 하는 게 이해되지 않아요. 서민들은 죽으라는 말 아닌가요. 빨리 판결해서 먹고 살 수 있게 해야지, 법을 지키다 죽으라는 말인가요. 정말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어요.”

남편의 배려와 동료의 격려로 버틴 안미애. 이제는 웃으며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봄은 멀다. 회사는 대법 판결 뒤에도 차일피일 복직을 미루고 있다.

“안미애가 잘해서 대법에서 이긴 게 아니다. 복직시켜 절차를 밟아 다시 해고하면 된다. 또 민사까지 가서 질질 끌어도 된다.” 회사는 공공연히 직원들에게 말을 한다고 한다.

“회사가 불법으로 나오지만, 나는 합법입니다. 나를 엄마로 여기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다시 녹색 제복을 입고 일을 할 겁니다.”

안미애는 왜 녹색재킷을 버리지 못한 것일까? 자살하고 싶은 수렁에 빠지면서도. 안미애에게는 관광통역안내사가 천직이기 때문이란다.

버릴 수 없는 천직이기에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일본어였거든요. 다른 과목은 잘 되지 않는데, 일어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험점수도 좋았고요.”

학교를 마친 그는 일어를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 여행을 좋아했던 그에게 관광통역사는 딱 맞는 천직이었다. 국가자격시험에 합격을 한다.

“저희 회사는 관광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여행사에요. 일본 관광객 유치는 국내 제일이고요. 특히 국가대표 제복을 본 따서 만든 녹색재킷은 저에게 자랑이자 자긍심이에요.”

정규직으로 입사한 그는 임신을 이유로 그 동안의 호봉이 사라진 계약직으로 발령이 난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슴 뿌듯했다. 회사도 계약직으로 발령이 난 안미애에게 경력과 공헌을 인정해 수당은 없지만 팀장의 직책을 맡긴다.

정규직에서 계약직이 되어도 좋았다

“하루 서너 시간도 자지 못하는 근무를 연속하면서도, 밤 열두시가 넘게 일하고 택시비도 되지 못하는 수당을 받으면서도, 내가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일이기에 일을 했어요.”

안미애는 전속관광통역안내사로 계약직이다. 정규직일 때와는 달리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고, 퇴직금도 없다. 월 20만원에 근무수당 7천 원. 여기에 여행사가 지정한 쇼핑업체에서 고객이 쇼핑을 하면 일정정도의 수수료가 더해진다.

관광객이 많고, 지갑이 팍팍 열릴 때는 한 달 수익이 백만 원이 넘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좀체 관광은 해도 물건을 사지 않는다. 이제 굳이 한국이 제품과 가격에서 후발국에 비해 인기가 없는 탓도 있다.

안미애 씨가 2004년 해고 전에 받은 수수료 수입을 평균 잡아보니 한 달에 45만원 남짓. 여기에 잔업이 포함된 급여 20만원, 이것저것 끌어모아도 한달 평균 수입은 70만원을 넘기지 못한다. 16년 동안 한 직장에서 일한 베테랑 관광통역사, 국내 제일의 여행사 팀장의 월급이었다.

국가대표 여행사 팀장... 월급 70만원

요즘 동료들의 월급은 더욱 비참하다고 한다. 최저임금에 한참 미달된 20만원의 급여를 받으며, 쇼핑 수수료로 빈 생계의 공간을 메꾼다는 것은 갈수록 허망한 꿈이라고 말들을 한다.

계약직이 정규직이 되어도 신세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2004년에 포괄임금제도라는 것을 만들어 관광통역안내사한테는 최저임금을 보장하던 제도를 없앴어요." 자부심의 상징, 녹색재킷의 국가대표 여행사 직원의 오늘이다.

안미애는 서울지역여성노조 관광통역안내사 지부의 최초의 조합원이다. 안미애의 복직싸움이 지부를 만든 힘이 되었다. 대법원에서 계약직원을 자유소득업자로 분리했던 관행을 부정하고 노동자라고 판정을 내렸다. 안미애의 승리만이 아니라 법으로 보장받지 못한 관광통역안내노동자의 인권 승리까지 안아온 것이다.


안미애의 복직이후 지부의 조합원은 늘어가고 있다. 이제 노동자로서 관광통역안내사가 목소리를 내세울 때가 온 것이다.

회사는 교섭의 자리에 나오지만 아직 대화는 되지 않는다. 공공연히 조합원들에게 “노조 가입해서 어디가지 가겠냐”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그것도 껌을 짝짝 씹으며 위협적으로 말을 했다고 조합원들은 분노를 한다.

노동자이며, 노동자로 대우받지 못하는 이들은 이제 당당히 요구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노동자라고. 최저임금을 보장하라고. 임신출산 휴가를 보장하라고.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노동자 선언

임신을 하면 정규직을 계약직, 파트타임으로 내 몬 회사에게. 고된 일에 하혈을 하면서도 숨을 죽여야 했던 모성을 되찾기 위해. 허벅지까지 쌓인 눈 속을 헤치는 산악가이드까지 시키며, 직원의 안전은 뒤로 한 채 돈에 눈 먼 회사를 향해. 잔업 수당도 없이 일을 해야 했던 동료를 위해.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관광통역안내사를 위해.

안미애와 관광통역안내사 노조가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안미애의 이야기가 비정규, 미조직,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고, 권리를 되찾는데 한 조각 햇살이 되리라 믿는다.

“아세요. 회사가 법원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우리에게 산재보험을 가입해준 것은 적선을 해 준거라고 한 걸. 관광통역안내사는 일을 하며 뒤로 가라오케에서 암암리에 수입을 많이 올리는 자유소득업자라고 한 것을.”

소중한 안미애의 직업은 회사의 손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반듯이 다려져 옷장에 걸린 녹색재킷이 쓸쓸하고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