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AIDS 감염인들, “말할 게 있 ‘수다’”

HIV/AIDS 감염인 인권증언대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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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만의 외출...

“우리는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에이즈라는 질병이 세상에 알려진지 25년, 한국에서 첫 감염인이 발생한지 21년. 한참이 걸렸다. 강산이 두 번은 바뀔 세월이었지만, 그들에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듯한 세월이었다. 그들에게 덧씌어진 낙인이 아직도 견고하지만, 그들은 용기 있게 입을 뗐다. 비록 이제야 입을 떼지만, 이제 더 이상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을 것이다.

17일 대학로에 위치한 한얼소극장, 25년 만에 외출을 나온 HIV감염인과 AIDS환자들이 모였다. 100여 석 남짓의 객석은 이들의 첫 외출을 마중 나온 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형석, 요한, 석주 씨의 첫 외출이 시작되었다.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HIV/AIDS 감염인 인권 증언대회, 말할 게 있 수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감염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것. ‘혹시 이 곳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오지 않았을까’, ‘혹시라도 언론에 내 얼굴이 나가지는 않을까’, 첫 외출의 설레임보다 혹시 있을지 모를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날 감염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감염인들은 겹겹이 쌓여있었을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풀어놓았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많은 감염인들 죽음을 택하려 한다”

12년 전, 미래가 사라졌다고 믿었던, 죽어서라도 주위 사람에게 병명이 알려질까 두려움에 떨었던 형석. 유난히 작은 목소리와 떨림, 그는 1994년 11월, HIV 감염사실을 확인한 이후 한동안 술과 함께 절망의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병세가 악화돼 한때는 하반신이 마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기도 했었다. 많은 감염인들이 그렇듯 형석 씨도 적절한 치료시기를 놓쳐, 고생을 해야만 했다.

질병으로 몸이 불편한 것은 제쳐두고,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질병과 그에게 새겨진 낙인. 가족들조차 등을 돌렸다. 병원비가 없어 가족들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한 때를 회상하며 “에이즈라는 병은 가족에게 조차 도움을 받지 못하는 그런 병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형석 씨는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신이 감염된 12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조금 변한 점도 없지 않겠지만, 감염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다”며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감염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죽음을 택하려 한다”고 말했다.


“맞아 엄마, 나 에이즈 걸렸어. 나 너무 힘들고, 위로받고 싶어..”

이제는 감염인 인권단체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석주 씨 또한 2004년 감염 이후 삶은 엉망이 되었다. 원치 않는 직장 내 HIV검사로 인해 감염사실이 직장 상사에게 알려졌고, 더는 직장을 다닐 수도, 다닐 용기도 없었다. 직장상사는 감염사실을 확인한 후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지만, 2주 만에 보직발령을 받게 된 석주 씨는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석주 씨에게 있어서도 감염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줘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감염인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히 프라이버시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한국사회에서 감염인이라는 사실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단절을 각오해야 했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술을 먹고 엄마한테 하소연을 했어요. ‘엄마, 나 너무 아프고, 힘들어. 나 몹쓸 병에 걸렸어’라고 말했더니, 엄마가 ‘너 혹시 에이즈 걸렸니’라고 묻는 거예요. 속으로는 ‘맞아 엄마, 나 에이즈 걸렸어. 나 너무 힘들어 죽겠어. 엄마한테 위로받고 싶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 못했어요. 전 에이즈냐고 묻는 엄마에게 결국 ‘에이 엄마는.. 내가 설마 그런 병 걸렸겠어’ 라고 말했죠”

석주 씨는 이날 자신의 ‘증언’이 증언이 되지 않는 사회를 소망했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에이즈에 대해 툭 까놓고 얘기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며 “이 사회에서 질병이 질병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에이즈라는 질병을 덮고 있는 온갖 은유들이 지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뚝 까놓고 얘기합시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증언대회에는 직접 참석한 감염인들 외에도 2명의 감염인이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최초라는 말은 항상 솔깃하다. 이날 감염인들의 증언대회는 국내최초였다. 25년 만의 감염인들의 외출, 그리고 세상과의 소통. 너무도 오랜 세월을 돌아 그들이 세상에 ‘툭 까놓고 얘기하자’며 말을 건넸다.

‘불쌍한 감염인들을 도와주세요’가 아닌 ‘툭 까놓고 얘기하자’고 한다. 최근 정부는 에이즈 예방 효과를 높이고, 감염인 인권을 증진시키겠다며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감염인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개정을 추진하며, 정작 감염인 당사자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편견과 왜곡 그리고 공포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감염인 문제를 단 한번에 해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해결의 단초를 찾기 위해 감염인들이 첫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는 ‘여기까지 밖에 오지 못했지만, 목숨을 걸고 여기까지 온’ 감염인들의 손짓에 정부 그리고 이 사회가 응답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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