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에 상당히 경도" vs “가치법칙 근원 정의는 오류”

[맑스꼬뮤날레](주관단체) - 자율평론

맑스 꼬뮤날레가 열린 첫날 오후 자율평론 주관의 토론에서 발제자와 플로어간에 격렬한 토론이 이뤄졌다. 이날 세션에서 ‘비물질 노동과 가상실효적 포섭’을 발제한 조정환(자율평론 )씨와 플로어의 이경천(맑스와 자본론 연구소)씨는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에 관한 입장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했다.

왼쪽 조정환씨, 오른쪽 이경천씨

이경천 씨는 먼저 조정환 씨에게 “맑스이론이 시대적 부합성을 잃었다고 보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맑스는 가치라는 범주, 가치법칙이라는 범주에 기반해서 수많은 범주들을 재구성 했으며 이러한 범주들 자체들이 가치법칙이나 가치라는 범주의 재구성이거나 그러한 범주에 관철된다고 봐야 한다”면서 “가치법칙을 폐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맑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또한 이경천 씨는 “조정환 씨가 다분히 무정부주의 자율주의자인 네그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도 맑스 이론을 꼼꼼히 분석해 보게 되면 기본적으로 가치법칙에서 파생된다”면서 “가치법칙이 맑스 이론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 범주인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맑스이론의 부정으로 나아갈 뿐 아니라 대안을 부재하게 만드는 무정부주의로 귀결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정환 씨는 “가치법칙에서 모든 것들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경천 선생님의 독특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단언 했다. 조정환 씨는 “계급투쟁이라는 것마저도 가치법칙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맑스하고도 정면에서 사실상 대립하는 것”이라면서 “‘공산당 선언에서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말했지 가치법칙의 역사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조정환 씨는 덧붙여 “가치법칙이 그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의 핵심적이고 우선적인 원리라는 생각에 정면에서 철저하게 반대하고 싶다”면서 “가치법칙이 끝난다 할지라도 맑스는 끝나지 않고 맑스의 정신과 맑스의 눈은 결코 그 위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경천 씨는 다시 반론을 전개했다. 이경천 씨는 “조정환 선생께서 계급투쟁을 마치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풀이를 하면서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주의주의 내지는 자율주의에서 얘기하는 계급투쟁이론으로 전락시키려는 의도가 있다”고 다시 지적하고 “ 가치법칙을 무시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자율주의의의 가장 결정적인 맹점이고 이것 때문에 자율주의가 정통 맑스주의에서 철저하게 비판을 받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조정환 씨 역시 이경천 씨의 반론에 재반론을 펼쳤다. 조정환 씨는 “가치법칙을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계급투쟁과 가치법칙은 분화되지 않지만 가치법칙을 근원적인 계급투쟁만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근원적 원리로 정의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일시적으로 등장했던 하나의 전략 형태를 영구화하고, 가치법칙이 위태로워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 맑스주의의 위기이고 혁명의 전망의 위기라고 설파할 때, 지금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적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반박했다.

조정환vs이경천 토론의 일부 요약

이경천 : 맑스이론이라는 것이 시대적 부합성을 잃었다고 보십니까?

조정환 : 신앙 고백을 하라고 하시니...(웃음)
우리가 하나의 생각들을 검토하고 그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역시 현실화되어진 것과 현실화 되어지고 있는 것에서 맥박치고 있는 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19세기에 태어나 19세기에 죽은 사람이죠. 그래서 맑스는 우리가 지금 겪는 많은 것들을 함께 겪지 못하고 현실적인 체험에서 우리가 겪는 것과 판이하게 다른 것을 느끼고 살고 있습니다.

맑스는 초기 헤겔, 포이에르바하 비판에서 사회주의 비판과 어떻게 부르주아 사회를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대안까지 총제척인 가르침을 제시한 사람입니다. 맑스가 이론의 현실적인 체계속에서 서술하는 것들의 다양성 중에서 꽤 많은 부분이 우리시대의 현실 적합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맑스의 잘못이 아니라 시대적, 역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그 기나긴 역사과정에서 파악해야 하며 맑스 개인 비난으로 귀속되어서는 안됩니다. 서술된 이론체계의 꽤 많은 부분들이 현실 적합성을 상실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 당시의 노동에 대한 맑스의 분석으로서 결과로서의 사회속에서 추상노동으로 종합될 수 있지만 분산된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물질노동을 분석의 초점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화된 시간의 공간화 자체만을 문제 삼을 수 있었고 시간의 초시간화, 혹은 실제적 포섭 같은 것을 자기이론에 담을 수 없었다는 것이 맑스 이론의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물론 상당한 해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근대성 속에 매몰된 사람은 결코 아닙니다.

사회적 노동과 같은 점은 정치경제학 비판 같은 것으로 서술되고 있는 데 바로 지금 우리가 읽어도 우리 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가능 한 역사를 넘어서는 사람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혜안의 원천은 어디 있는가. 맑스라는 사람이 역사속에 살면서도 현실속에 완전히 봉인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역사적 개인으로서의 맑스와 주어진 역사적 경험을 넘어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맑스의 속뜻을 통해 읽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한된 시간속에서 제한된 역사성을 극복하고 극복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를 고민해 갔던 맑스 자신의 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경천 : 제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것 같은데 저는 맑스 이론이 시대적 적합성을 가지고 사람들이 이것에 대한 진정한 맑스가 자신의 이론속에서 남겨낸 수많은 범주들이 있을 텐데 그러한 범주들이 현실에서 이론적 적합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그런 답변을 기대 했는데요. 어쨌거나 본질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주관적으로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양식이라는 것은 비물질 노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와 같은 비물질 노동이 지배적이라고 본다면 본질적 정치경제학에서, 경쟁 자본주의 시대에 관철되어있던 가치법칙이 유효성을 상실해 버린다는 그 말씀이시죠. 그런데 맑스 이론을 통독하다 보면 흥미로운 사실은 발견하는데 맑스라는 사람은 가치라는 범주, 가치법칙이라는 범주에 기반 해서 수많은 범주들을 재구성 해내죠. 대표적으로 조정환 선생님께서는 직접적으로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표현을 썼지 비물질적 상품이라는 표현을 안 썼는데요. 이러한 상품도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수많은 이러한 범주들 자체들이 가치법칙, 가치라는 범주의 재구성이거나 그러한 범주에 관철된다고 봐야 하는데 이렇게 가치법칙을 폐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맑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과연 쉽사리 상품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 선생님께서는 다분히 무정부주의 자율주의자인 네그리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는데 그 사람 같은 경우에 계급투쟁을 필요이상으로 침소봉대 시키거든요. 그런데 이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도 맑스 이론을 꼼꼼히 분석해 보게 되면 기본적으로 가치법칙에서 파생되거든요. 이처럼 가치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맑스 이론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적 범준데 이것을 부정하고 나서 맑스 이론에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 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맑스이론의 부정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결국 대안을 부재하게 만드는 무정부주의로 귀결하는, 그런 이론을 설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의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조정환 : 우선 상품에 대해 말하자면 비물질적 상품이라는 말이 발제에는 나오지는 않았지만 하트나 네그리의 제국에 보면 비물질적 상품을 생산한다는 표현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품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얘기 해 본다면 자본론의 맨 첫줄은 부르주아 사회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상품들의 더미입니다. 상품의 무더기라고 말하는데. 맑스의 자본론 첫줄에서 제시된 관점에서 재조명해 보면 무더기라는 표현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맑스는 농민들에 대해 농민들이란 피티와는 달리 푸대 속의 감자들이라고 표현 하면서 개체들 간의 네트워크의 횡적인 단절성을 얘기 했습니다. 즉 감자을 담고 있는 외적인 힘(주권이나 권력)이라는 틀에 의해서만 묶여질 때만 집합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존재라는 비판이었죠. 맑스가 부르주아 사회를 바라보는 첫 문장이 부르주아 사회를 감자 푸대처럼 취급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상품들이 부르주아 사회라는 감자 푸대 속에 무더기로 담겨 있다는 느낌인데요. 그것은 근대자본주의의 초기국면에서 이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초기국면에서 물질적 생산물들, 상품들은 생산되면 유통되고 분배되고 소비되어야 하는 분산된 것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것들을 연결 짓는 것은 국가가 사회간접 자본들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엮어졌으니까요. 그러나 탈근대에서는 각각의 상품들이 감자 푸대안에 있지는 않는 것이죠. 상품으로 취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형식적 관계를 넘어 내용적 축면에서 고찰해 보면 개개의 힘들은 결코 절대적으로 분리 되서 감자처럼 집합화 될 수 있는 분산된 개체가 아닌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에너지들이 보편적(공통적) 네트워크 속에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무더기라는 표현은 현대 상품을 지칭하는데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지금 이경천 선생님은 가치법칙에서 모든 것들이 파생되어 나온다고 생각하시는데 이것은 이경천 선생님의 독특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계급투쟁이라는 것마저도 가치법칙에서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은 맑스하고도 정면에서 사실상 대립하는 것이고요. 예컨대 공산당 선언에서 세계사라고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말했지 가치법칙의 역사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계급투쟁의 과정은 가치법칙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인간들만의 역동적인 사회적 관계이지 시간을 분절하고 있는 자본의 근대적인 지배전략이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유일무이하게 지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저는 가치법칙이 그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의 핵심적이고 우선적인 원리라는 생각에 정면에서 철저하게 반대하고 싶습니다. 가치법칙이 끝난다 할지라도 맑스는 끝나지 않고 맑스의 정신과 맑스의 눈은 결코 그 위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경천 :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는 말을 했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그 말은 맑스나 엥겔스가 한말이 아닙니다.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에는 ‘그 말이 고전적 브루조아지가 한 말이다’라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계급투쟁이 가치법칙과는 서로 무관하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셨는데 사실은 무연한 것이 아니라 맑스는 그것을 초역사적 계념으로 만들지 않고 자본주의의 특수한 역사적 개념으로 계급투쟁을 재해석하거나 재구성하기 위해 가치법칙과 연관을 지으려고 하는데, 선생께서는 계급투쟁을 마치 초역사적인 현상으로 풀이를 하면서 맑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갖다가 주의주의 내지는 자율주의에서 얘기하는 계급투쟁이론으로 전락시키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이거는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시각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맑스의 계급투쟁을 가치법칙과 무관한 상태에서 얘기하게 되면 맑스계급투쟁은 주의주의밖에 안됩니다. 다시 말해 의지는 의지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계급투쟁이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의 내면에선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객관적 조건에서 나오는 것인가. 선생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로 환원해 버리는데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서 밝히는 것은 계급투쟁의 특정한 성격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자본과 연관해서 그것은 분명 가치법칙과 연관된 것인데 가치법칙을 무시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말라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자율주의의의 가장 결정적인 맹점이고 이것 때문에 자율주의가 정통 맑스주의에서 철저하게 비판을 받는 지점입니다.

조정환 : 지금 제가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이 무관하다고 말씀했다고 주장하시는데 그건 결코 아닙니다. 그 양자 간의 관계에서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우선성을 이야기 한 것이고 가치법칙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가 채택한 계급투쟁의 전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긍냥 살아가다 보면 가치법칙으로 살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거든요. 인간들이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의 노동활동의 성과물들을 교환이라는 방식으로 변환해서 맞바꾸고 그걸 통해서 공통적 사회관계를 구축해 나아가게 된 어떤 과정. 여기에 끼어들어서 그 교환 과정을 착취와 축적의 과정으로 변환시키고자하는 욕망이 작동한 것이고 그것이 부르주아지가 원하는 독특한 계급의 형성을 가져온 것이니 만큼. 이미 가치법칙의 형성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지의 등장과정이 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축과정이 있는 만큼 계급의 형성과정을 맑스는 계급투쟁과정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가치법칙을 부르주아지의 계급투쟁의 전략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한에서 계급투쟁과 가치법칙은 분화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치법칙을 근원적인 계급투쟁만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근원적 원리로 정의하는 것은 역사 속에서 일시적으로 등장했던 하나의 전략 형태를 연구화하고, 그것이 위태로워지고 흔들리게 되는 것이 맑스주의의 위기이고 혁명의 전망의 위기라고 설파할 때, 지금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부르주아적 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