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넘는 현대 공동체운동을" vs "맑스 과연 희망인가"

[맑스코뮤날레](3부-1) - 맑스와 현 시기 한국의 좌파운동(강수돌,강내희)

맑스코뮤날레 이틀 째, 3-1부 '맑스와 현 시기 한국의 좌파운동'은 오전 11시부터 시작되었다. 최갑수 서울대 교수가 사회를,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현대 공동체운동과 맑스'를, 강내희 중앙대 교수가 '맑스와 한국 좌파 문화운동의 방향'을 발표하였다.

강수돌, "가치법칙 부정으로 맑스를 넘는 현대 공동체운동을"

강수돌 교수는 고려대 서창캠퍼스에서 경영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기존의 경영학은 돈의 경영학이지만 삶의 경영학이라는 관점에서 공부와 삶을 고민하고 있다"고 운을 떼었다. 이어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전선은 이론적 한계가 있다. 한쪽은 자본, 한쪽은 생명 대립 축이 기본이고 그 가운데 교접합으로 노동이 위치하고 있다"며 현대 공동체운동에 대한 고민의 전제를 피력했다. 노동은 '생명'과 '자본'의 긴장이 모두 걸려있으며, 생명을 자본으로 넘겨주는 역할을 노동이 하고 있다는 언급과 함께 발표문을 펼쳤다.

강수돌 교수는 발표문에 대해 "하나는 현대 공동체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맑스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고, 또 하나는 맑스를 넘는 것이라면 어떤 과제인가, 어떤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하나의 문제로 실천적 과제를 짚고자 한다"며 현대 공동체운동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또 직접 실천하는 배경을 △현대 공동체운동의 출발점은 일차적으로 현실 자본주의 삶의 구조가 초래하는 모순에 대한 환멸 △노동조합운동의 전망과 연관 △물질적 성취를 이뤘지만 관료주의, 생산력주의, 산업주의, 가부장주의, 인간중심주의, 획일주의 등 토대와 상부구조 모두에서 모순과 한계 △중앙집권적 권력 불평등 체제의 한계 △두 체제(자본주의, 사회주의) 모두 파이를 가능한 크게 생산하는 것,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에 이의 제기를 안 한다는 것 등 다섯 가지를 꼽았다.

이어서 강수돌 교수는 '생활구성체'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창조하려는 운동을 동기나 강조점에 따라 생산공동체, 마을공동체, 교육공동체, 소비공동체, 화폐공동체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한국과 세계 여러 곳의 공동체운동 사례를 들었다. 특히 야마기시 마을이나 덴마크 스반홀름의 '연찬회'를 예로 드는 대목에서는 "공동체 식구들끼리 대화하는 방식이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비판적인 논평보다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인다"고 말했다. 이로부터 "대화와 소통의 방식에는 상대방을 느껴보려는 소통과 때려 눞이려는 소통이 있고, 진실성 실현 방식이 항복 받아 이기는 방법도 있지만 남의 입장을 나의 입장으로 받아안으면서 자기 논리를 펴는 방법이 있다"며 감정이입과 상대방의 입장으로 들어가서 느끼고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사적소유와 생산수단에 대해 "개인이 소유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 많다. 집, 교육, 의료 등은 개인의 사적 소유를 떠난 공유 뿐만 아니라 네그리의 전유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농지, 농가 등 살다 남은 개인의 유산을 국가가 아닌 마을 차원으로 돌려주는 방법"을 제기하며 "토지나 집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니라면 집 한 채 사기 위해 평생을 살아야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나아가 "인간을 대상화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의 인간과 자연이 상호 도와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는데 "식물, 똥, 나도 산다라고 하면 모두가 주체"라는 이야기다.

한편 어른 65명, 아이 42명이 모여 사는 스반홀름 공동체 예를 들었는데 불과 14명이 230헥타를 경작하려다보니 불가피하게 기계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경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기계를 사용한다. 완전 기계를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미니멈으로 쓰자는 것인데. 맑스 이론에서 규모 문제는 잘 못 찾아 봤지만 공동체 규모, 생산 단위에 있어 미니멈과 맥시멈이 있겠고, 이 공동체를 재생산할 정도의 효율성은 있어야 한다. 생태성을 침해 안 하도록 하는 미니멈 조절 협의의 동태적 과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강수돌 교수는 공산주의(코뮨주의)에 대해 "미래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현실 변화 운동이다"라고 간명하게 말하고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공산주의 운동이다. 운동으로서의 삶으로서의 과정으로서의 운동, 따라서 조직보다는 운동이,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강수돌 교수는 최근 자신이 살고 있는 조치원 신안리 마을의 예를 들기도 했다. 행정도시와 관련한 건설자본이 15층 짜리 아파트를 올리려고 하는데 이에 맞서 마을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했다. 강수돌 교수는 시공업체인 건설사의 노조위원장에게 전화해서 "지금 이 이슈는 노동운동과 생명환경운동이 결합되는 절호의 찬스다. 자연파괴로 가지 않게 하자. 그렇데 조합원의 결의를 모아달라"고 요청했는데, 노조위원장은 "이야기는 좋은데 대의원대회 안건에도 올라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노조로서는 말 자체는 좋은 이야기고 인정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이다. 강수돌 교수는 여기서 더 나가서 "이 딜레마를 끌어안고 정면돌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친자연, 친환경의 다양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환경 파괴하는 자동차를 그만 만들자고 하고, 대안자동차 만들거나 자전거 만들자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수돌 교수는 "이제 남은 과제는 '맑스주의냐 공동체주의'냐 따위의 도식적 질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가 직면한 삶의 고통을 올바로 극복하기 위해 그 어떤 이념적 딱지도 떠나 '진실한 실천적 방도'를 개방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모색하는 일"을 강조했는데 가치법칙을 부정하는 행동들, 가령 백화점에 가서 100원 주고 텔레비전을 가져온다거나 노동가치를 따지지 않고 선물을 주는 운동 등이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것이 새로운 화폐관계로서 맑스와 더불어 맑스를 넘어가는 현대공동체 운동의 맥락을 가지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홍성태, "100년, 200년 보는 공동체운동 전망 가져야"

강수돌 교수의 발표에 대한 토론은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맡았다. 홍성태 교수는 "공동체를 해방으로 보고, 현대사회를 억압으로 보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강하게 띠는데, 현대사회에서 공동체가 상업적으로 남용 오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으로 민족공동체나 웹 커뮤니티 붐 같은 것도 그러한 성격을 갖는다는 지적이다. 지금으로서는 공동체운동이 "섬처럼 살지만 섬 바깥의 것을 다 끌어다 쓴다"며 이제는 공동체 운동의 가치를 장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홍성태 교수는 공동체운동이 오웬에서 시조를 찾는 경우가 많고 과학적 사회주의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지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한계는 명백하다며 "문맹사 적으로 볼 때 현대 사회 거대 물질운동의 소산, 원천에서의 변화, 사회변화, 생태주의의 근본 문제 등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석유고갈로 자동차 문제, 이동 제약으로 이어지면 지역공동체화 라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으며, 자원고갈에 따른 문명의 전환을 준비할 필요가 있는데 문명 쇠퇴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서 공동체운동이 미래를 준비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또한 "현재의 공동체운동을 보완하는 가운데 거대 사회 해체가 사회공동체화 될 수 있기까지는 50년, 100년, 200년이 걸릴 수 있으므로 현실 가치와 장기적인 가치를 고려하면서 공동체운동의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며 거시적 전망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강내희, "좌파 문화운동, 이데올로기 비판 과제와 역능 강화의 과제"

이어서 강내희 중앙대 교수가 '맑스와 한국 좌파 문화운동의 방향'을 발표했다. 주어진 시간이 짧은 데 대해 "맑스코뮤날레 부집행위원장으로서 전체 진행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말로 말문을 열고 발표를 시작했다.

우선 '맑스 왜 희망인가'라는 맑스코뮤날레 전체 주제를 언급하며 '맑스(주의), 왜 한국 문화운동의 희망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발표문에 따르면 이 질문은 곧 의문을 부른다고 되어 있는데, 자본에 의한 인간과 자연의 지배를 강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지배국면을 떠올리면 계급 적대가 중대한 문제이지만 '비환원주의-비본질주의적' 단서를 달더라도 중심을 상정한다는 게 관계들의 위계를 전제하는 것으로, 여전히 본질주의와 환원주의가 작동하는 게 아니냐 라는 것이다. 한국 좌파 문화운동의 방향을 구상하면서 '맑스 과연 희망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도 이러한 경향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2절 '맑스와 문화'에서 강내희 교수는 맑스는 세 가지 방향에서 문화를 생각한 것으로 보고 "좀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의 파생 효과로, 어떤 실질적인 것 또는 진실의 왜곡된 재현으로, 따라서 이데올로기로 봤다"고 살폈다. 한편 문화를 부차적인 소외나 왜곡 또는 이데올로기로 보는 것과는 다른, '자유의 영역'으로 상정하는 경향을 언급하고, 독일의 관념론, 영국의 낭만주의 전통 등에서 문화나 예술로 지칭되는 인간 활동의 일컬은 쉴러의 '미적 교육'을 설명하였다. 또한 "맑스의 문화이론은 문화를 의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생산관계로, 그리고 결국은 생산력의 문제로 치환한다며 비판하는 존 브렝크먼"의 문제의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강내희 교수는 3절 '이데올로기 개념의 필요성'에서 브렝크먼의 비판이 맑스의 중요한 논지를 놓치고 있다고 언급하고, "맑스가 제출한 이데올로기 개념은 현단계 사회모순을 이해하는 유일한 접근법은 아닌 셈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폐기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이의 연장에서 강내희 교수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맑스주의에 내재한다고 본 '이데올로기의 동요' 문제를 살핀 후 다시 맑스주의가 제출한 '계급투쟁'의 문제 설정을 유지하는 긴장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내희 교수는 4절 이론적 반-인간주의와, 5절 실천적 인간주의와 문화운동을 이어 발표했다. 특히 진보적 인간 주체 형성 전략으로서 "문화운동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자신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 문화운동에는 역능 강화의 과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6절 '한국 좌파 문화운동의 방향'에서는 "이론적 반-인간주의와 실천적 인간주의의 통일로서의 문화운동, 이데올로기 비판과 역능 강화라는 과제를 떠맡은 문화운동의 실천 전략은 1980년대 문화운동을 지도한 리얼리즘 전략과는 크게 다르다"고 언급하고, "물질적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문화라는 개념에서 새로운 문화운동의 과제가, 문화운동을 기본적으로 문화적 실천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유물론적 관점이 도출될 수 있다"고 요약했다.

신병현, '자율성, 다양성은 신자유주의 관리대상으로 포획되는 경우 많아"

강내희 교수의 발표글에 대해 신병현 홍익대 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신병현 교수는 "노동자문화, 기업문화, 신자유주의 통치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어 인문학적인 문화나 예술에 대한 논의는 덜 익숙하다"고 전제하고, "이론화 작업이 어려운 일인데 용기를 내서 애 쓰셨다고 본다"고 평했다.

신병현 교수는 강내희 교수의 발표글이 '이데올로기적 문화비평'의 성격을 갖는다고 짚고,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개입 방식이 현대의 신자유주의 통치 시기에서 과연 어느 정도로 문화운동의 이슈들과 연관해서 개입이 가능할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나아가 "문화에 대한 좌파의 관심은 반엘리트적, 실천, 대중중심적, 이데올로기적"이고 "한편으로는 이론 강조, 한편으로는 실천 강조로 늘 동요하는데 이론화 작업 충동을 가지면서 실천적 탐색을 하는데 다양한 삶을 추구하는 다양한 관심들이 있다"고 말하고. 다양한 삶의 형식들이라는 관심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할 것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80년대 이후 자율성, 다양성이 신자유주의 통치 도구로서, 관리대상으로서 포획되어지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좌파가 이와는 다른 결을 만들어내기 위한 심각한 기획을 하지 않으면 우려스럽다는 주장을 펼쳤다.

해고노동자, "방어적인 노조운동에게 생명환경운동 과도"

발표와 토론이 마무리되고 청중 질문이 이어졌다.

이태준 인천 시민은 강수돌 교수의 발표에 대해 "첫째, 공동체운동이 자칫 웰빙 바람으로 변질될 수 있다. 경제적 여유 있는 사람들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경제적 소외를 일으키는 문제가 있다. 둘째, 공동체 마을로 가면 공동육아도 하고 대안마을 활동을 하는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 비정규직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공동체운동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할 수 있나, 셋째, 자본 논리를 바꾸자는 운동과 공동체운동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등을 물었다

오창엽 프로메테우스 기자는 "발제문에 있는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을 이데올로기로 보시고 맑스가 문화를 이데올로기로 본다고 했는데, 문화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더 큰 범주다. 문화와 그것들과 이데올로기의 범주 구분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발표자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고 과학을 진실의 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문화과학은 이데올로기과학이 되고 문화운동은 이데올로기운동이 되고 문화교육은 이데올로기교육이 되버린다. 이해하는 데 많이 헷갈린다"라는 질문을 던졌다.

발전 해고노동자라고 밝힌 한 활동가는 현대 공동체운동에 대해 "공동체가 소규모, 지역에서 국가 세계적으로 확장되어야 자본 극복 대안이 될텐데 그런 현실적인 수단이 있는지, 자칫 잘못하면 현실도피주의로 갈 수 있다"고 지적하고 "현장 노동자로서 노조 관련 말씀드리면 노동조합에 그런(강수돌 교수의 신안리 개발 반대 관련 생명환경운동) 문제제기를 하면 과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노조운동은 방어적인 운동이다.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고용 조차도 지키기 힘들고 밀리고 있는데 생명환경운동까지 받아 안을 여건이 안 된다"고 말했다.

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강수돌 교수의 발표에 대해 "강수돌 선생의 공동체 이야기는 역사유물론의 지평을 떠난 측면에서 제기되는 것 같다. 물질적 생산관계와 인간이, 그리고 자연과 관계 맺는가를 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강내희 교수의 발표에 대해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 지배이데올로기 측면으로 많이 접근하는 것 같은데 지배이데올로기와 사회적대적 관계에 있는 노동 대중을 생각한다면 저항이데올로기 담지자를 같이 보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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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창엽

    오창엽 프로메테우스 편집국장은 "도덕 종교 형이상학 과 문화와 의식 범주가 다르다. 과학은 진실을, 이데올로기는 허위라고 하는데 문화과학은 이데올로기가 과학이 되고 문화운동이 이데올로기 운동으로 보여지는데, 맑스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지 않고 이론주의 반인간주의로 실천을 고민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일단 제가 자기소개를 할 때, "프로메테우스 오창엽 기자입니다."라고 했으니 기자가 더 좋겠습니다. 강내희교수님이 제 질문을 듣지 못하시고 그래서 대답이 없어서 좀 난감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저의 질문은 이렇습니다.
    {발제문에 있는 도덕, 종교, 형이상학 등을 이데올로기로 보시고 맑스가 문화를 이데올로기로 본다고 했는데, 문화는 그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더 큰 범주다. 문화와 그것들과 이데올로기의 범주 구분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발표자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고 과학을 진실의 편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문화과학은 이데올로기과학이 되고 문화운동은 이데올로기운동이 되고 문화교육은 이데올로기교육이 되버린다. 이해하는 데 많이 헷갈린다.
    저의 생각을 밝히자면 맑스의 휴머니즘과 자연주의는 Praxis 즉 맑스의 실천철학이지만 변유, 사유 등은 '과학주의' 즉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다. 그러므로 이론적 '반인간주의'나 과학을 강조할 게 아니라 오히려 휴머니즘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제 말을 제가 쓰면서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정확하진 않지만 그런 뜻이지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맑스는 이데올로기를 배격했는데, 맑스레닌주의자들이 과학을 강조하며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만들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데올로기 운동을 강조할 리가 없지요. 기사를 수정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너무 길면 빼도 좋습니다.

  • 취재팀

    정확하게 정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