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부리]의 행.페이야기
박미선, "딴세상을 여기로 가져오는"(Bring elsewhere home) 페미니즘, 여성, 소수자들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이론가. 이론과 실천으로서 페미니즘과 급진 이론의 혜안들을 '따로 또 함께' 나누는 페미니스트 네트워커. '행.페'는 '행동하는 페미니즘'의 줄임말
단결보다는 돌파를
[너부리의 행.패이야기] 불협화음을 봉합,억압하기 보다는 민주적으로 열어젖혀야
너부리 
누구의 위기인가? 무엇의 위기인가?

권력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권력이든. 크고 작은 '혁명'들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반성할 줄 모르는 권력이 반성을 강제로 토해내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그렇지만, 권력이 반성하지 않는 만큼이나 이러한 압력 행사도 힘겹고 어렵다.

지난 해 일련의 사건들과 올 들어 민노당 당직 선거와 민주노총 보궐선거의 혼탁함을 멀리서나마 인터넷으로 접하면서 내내 든 생각이다. 길지는 않지만 짧지만도 않은 세월 힘들고 고된 투쟁을 통해서 얻은 자그마한 권력(자본권력과 비교해 보라)을 겨우겨우 얻어놓고서 이제는 그 자그마한 '권력'을 위기를 팔아먹음으로써 연명하는 것 같다.

'진보' 진영의 '위기'가 상투어가 된지 꽤 되었는데, 이것은 달리 보자면 '위기' 운운하면서 득을 보는 내부 세력이 이미 자리잡았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위기 운운이 도대체 누구에게 득이 되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여성/대중인가? 아니다.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이 '위기'는 '진보' 세력이 자기의 자식들을, 즉 내부의 여러 차이들을 먹어치우면서 추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을, 그리하야 '진보'의 이름으로 획득했던 지지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나는 '진보'진영 내부의 '위기'운운이 세력의 위기라기 보다는 일차적으로 정당성 확보의 위기이자 비젼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처럼 대중도 움직인다. 그것도 아주 역동적으로. 휩쓸리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이익을 철저히 추구한다. 대중은 교육 및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진보' 혹은 변혁과 대중의 이익/욕망이 맞지 않았을 때 대중은 '주변'의 자리에 머무르곤 하지만, 변혁이 유의미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대중은 스스로 변혁의 중심이 되어 왔다. 변혁에서 세력 문제는 일차적으로 정당성을 통해서 확보되고 비젼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강력해지고 확장된다.

대부분의 언론에 보도된 용어를 쓰자면 "진보세력의 내부 권력 투쟁" ("파행") 역시 부분적으로는 전술과 관련해서지만 많은 부분 권력투쟁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20세기 반체제운동들의 역사가 일러주듯, 운동으로서 진보진영은 모두 곧 내부투쟁에 휘말렸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위기'와 무능력, 비젼없음을 가장하여 '진보'세력 내 기득권(알고보면 골목대장 수준인 것을)을 보수하려 하고, 다른 한편 하위 억압들에 대한 의도적 맹안을 지속하면서 '단결'과 '통합'을 엉터리로 강조하는 작태다.

자신들의 정체성들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단결, 통합한단 말인가. 물론 정치적 실천에서 의견의 분화란 마땅한 것이다. '진보' 혹은 변혁의 이름으로 명확하게 하고자 하는 정체성들과 비젼들이 있다면, 그것들에 있는 다양한 차이들 역시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도 있다. 즉, 그 차이들을, 내부의 불협화음들을 단결이니 연대의 이름으로 억압적으로 봉합하려 하기보다는 민주적으로 열어젖히는 것이야말로 변혁의 과정일 것이다. 복잡한 이해관계와 힘들의 관계 망 안에서는 똑똑한 유물론자-실천가들도 저능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단결보다는 돌파를, 당위가 아니라 가치포장유통을

지금 여기 변혁세력에 필요한 것은 단결이 아니라 돌파다. 돌파(break through). 단결해서 뭉쳐만 있으니깐 문제다. 때로 힘이란 뭉친다고 세지는 게 아니다. 뭉치면 현상적으로 커보일 수는 있어도, 뭉침의 병참술에는 뭉친 힘에 대한 자기기만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로서는 독약 기능이 더 크다.

커보이는 현상에 스스로 기만(당)하(기를 욕망하)므로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힘이 얼마나 되는지를 결코 알려고 하지 않거니와 알지도 못한다. 현상에 스스로를 기만하므로, 현상보다 더 크게 가지고 있는 힘에 가치들이라는 망치를 매고, 비젼이라는 헤드라이트를 켜고서 잠재적인 그 거대한 힘을 발현하여 휘두르질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이란 남의 마음에, 수많은 열정들에 스파크가 일도록 불을 지를 때라야 세력이될 수 있다. 그런 다음은 그 불이 방향성을 가지고 (타오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번지고 날라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주장에 대한 지지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나 우선순위를 공유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넓은 집단의 사람들에게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변혁과 진보의 정당성의 근거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물론 '사회적 대타협'이니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편가르기(정체성이든 계급성이든)를 제대로 해서 미래비젼들을 경합시키고 구체적인 전망을 짜내며, 사안에 따라 보다 역동적인 연대의 능력을 좀 실험해 보자는 것이다.)

사회 변혁이 물질적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 여기 더 절박한 것은 사회변혁을 올바름, 필연성, 당위의 측면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몇 십 년 동안 그래왔다). 오히려, 사회변혁의 가능성의 측면에서 논해야 한다. 열린당의 남성 신데렐라들이 '왕비'로 '간택'당할 수 있었던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큰 역할을 하긴 했지만, 그 거대한 저류를 이룬 것은 대중의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이 신데렐라들은 자신들이 '왕비가 되면'하고 약속했던 것들(즉 의회권력 획득 및 이후의 개혁)을 이행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이행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대중은 "그래 니네들한테 권력을 주었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어"하는 환멸로 반응하고 있으며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아픈 인식만이 넘쳐난다.

문제는 이러한 대중의 환멸이 민노당이나 민주노총, 범진보세력으로 연결되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는 점이다. 지금여기 진보'정치'진영은 열린당에 대한 이러한 대중의 환멸을 진보진영의 지지로 이끌어 낼 보다 해방적이고 실천가능한 가치들을 만들어 바지런히 유통시켜야 하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지난 몇 십년간의 억압적인 역사로 인해 부정적 이미지와 뉘앙스가 잔뜩 묻은 투쟁, 단결, 계급 등 좌파 진영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어휘들과 레토릭일랑은 확실히 버리고, 대신 보다 구체적인 내용과 가능한 비젼들을 가지고, 또한 보다 광범위한 대중에게 어필할, 좀더 쉽고 섹시하고 알딸딸한 어휘들과 레토릭을 써서 말이다.

이를 위해서 변혁세력은 다양한 해방적인 관점들에 스스로를 바지런히 성실하게 개방해야 한다. 특히나 사적인 영역에서 스스로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하는 온갖 미세한 억압들과 비민주적 습관들, 자기 안의 모순들을 성찰할 때, 지금 여기 절박하게 필요한 새로운 가치들이 무엇인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것들을 어떻게 달콤하게 포장해내서 유통할 수 있을 것인지를 알 게 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페미니즘의 통찰로부터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페미니즘을, 급진적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여성우월주의 정도로 이해하는 게 꼴통중의 최악 꼴통이라는 점은 잘 아시리라. 페미니즘이 머냐고 여자들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떠보기만 할 것이면서, 괜시리 묻는 척하면서 훈장질 하려 하지 말고, 대신 각자 찾아서 공부하시라. 답은 우선적으로 각자에서 나와야 하고, 나름의 답들을 지닌 각자들이 각자의 패를 쥐고서 따로 또 함께 만났을 때 불길이든 작은 물길이든 열릴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 실천에서 나타나기 마련인 의견분화를 통일성으로 해소하려는 욕망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을 해방적 실천이자 이론으로 유지시켜 주는 것들 중 하나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자픈 게 있다. 나는 이제까지의 남성(노동자)중심적인 변혁적 실천과 변혁 이론은 페미니즘의 통찰과 조우해야만 자기변혁에 성공하고 살아남아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본다. 우선 맑스주의의 계급, 노동 등의 핵심 개념들이 화석화된지 오래라는 점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즉 변혁적 실천의 레토릭-망치가 되기 위해서는, 변화중인 상황에 정합적인 재개념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예컨대 계급 개념의 경우. 성(sex/gender) 개념을 절합한다면 계급 개념은 강력한 변혁의 개념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노동의 경우는 예컨대 성노동 개념화가 (페미니즘을 포함한) 변혁이론 진영의 변혁 역능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역할을 할 것이다. 모순들이 가장 중층결정적으로 얽혀있는 것인 성노동(sex work)을 가부장적 자본주의 및 남성중심적 지배 질서에 맞서서 정교하게 벼려낼 수 있다면, 변혁(이론)진영은 단연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많은 구성-지지집단(constituency)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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