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부리]의 행.페이야기
박미선, "딴세상을 여기로 가져오는"(Bring elsewhere home) 페미니즘, 여성, 소수자들의 활동을 적극 지지하는 페미니스트 이론가. 이론과 실천으로서 페미니즘과 급진 이론의 혜안들을 '따로 또 함께' 나누는 페미니스트 네트워커. '행.페'는 '행동하는 페미니즘'의 줄임말
진보의 도전들
"다른 목소리들을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너부리 
작년 말에 나온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일상의 정치학>을 어렵사리 구해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위기'에 처했다는 진보진영'의 '위기'는 위기라기보다는 실제로 역사의 밑바닥 흐름이자 동력인 '진보'의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보진영 '위기'운운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역사의 흐름인 진보의 도전들에 소위 '진보'진영이 태업을 일삼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신자유주의라는 알딸딸한 당의정을 입고, 거기에 '대세론'까지 업은 전지구적 자본, 권력의 농간과 횡포로 인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반복되는 논의들과 비판들이 있지만, 변혁의 진전은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변혁의 진전에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진보' 진영이 힘들을 모아 세력화하면서 이런 저런 비판과 '대안'을 내놓는 동안, 세상 변혁의 '주체'를 자임했던 진보진영은 어느 새 자기변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다른 한편,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진영이 내놓은 '변혁'담론들, 이데올로기들보다 몇 천 배는 더 많을 법한 '부자되는 법들'(self-help)에 관한 책들이 팔렸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생산, 재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을 욕망할 수밖에 없는 구조탓이기도 할테지만, 달리 보자면, 성취되지 못한 채로 남은 사회변혁의 갈망들과 열망들을 접수하는 데 성공한 것은 '진보'진영이 아니라 역시 자본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러한 성취되지 못한 사회변혁의 갈망들과 열망들에, 해방적인 언어, 해방의 언어, 다른 사유를 선사해주는 책이다. 희망컨대, 이 책은 이런 열망들이 서로 횡단함시롱 그 횡단의 소통실험들에 확실히 물길을 내고 불을 지피는, 그리하여 때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이루게 하는 하나의 수원(水原)이자 기폭제가 되는 것이 그 운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은 페미니즘 내부뿐만 아니라, 확장하자면 '진보'진영 내부의 자기변혁이 어느 지점들에서 절실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positively) 시작될 수 있는지에 대한 성찰적 영감들로 가득한 책이다. 우선, 진보, 정체성, 운동이란 경합에 열린 대화이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오는 상처들에 취약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세력화, 권력화, 제도화, 조직보위 및 강화의 논리에서 보자면, 내 안과 밖의 타자들의 차이들이 몰고 올 상처에 취약해진다는 것, 자기 자신과 타자들에 대해서 섬세해진다는 것은, 이제껏 '실천'되어 온 남성위주의 '단결통합'질에 타격처럼 보일 수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정확하게 왜 그간의 '단결통합'질이 지배구조의 통합적 일부였던가 하는 모순과 아포리아의 지점을 찬찬하고도 통렬하게 살핀다. 단결통합질이 내놓은 (알고보면 사이비인) 보편이 아니라, 보편으로 화하지 않는 특수, 차이들을 섬세하게 (그러므로 유물론적으로) 맥락화하고, 내부의 차이들을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대화와 소통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보편화, 동질화, 자연화, 민족화가 주는 편안한 '순수'나 (알고보면 사이비인) '본질'보다는,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소통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는 횡단의 정치를 추구하자는 것.

이러한 횡단의 정치는 조직을 위해서 개인을 억압하거나 개인을 위해서 조직을 '배신'하는 이분법적 왕따 정치가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차별로 만들어내는 사회 구조들에 대한 유물론적 인식(의 핵심은 몸이다)에 기반하여, "다양한 피억압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이다. 계급이 단순히 돈에 관한 것이 아니듯, 즉 계급은 물적토대 및 행위들을 결정하고 보여주는 가치들에 관한 것이듯 (내가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새로운 신념들 및 가치들도 더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 억압 역시 젠더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각도로 보여주는 이 책은 불평등, 불의, 고통을 단일 원인으로 규명하려는 왼갖 (남성중심적) 환원론(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지만)에 대한 훌륭한 해독제이다. "단일 원일은 주장하고 '주적을 규탄, 타도'하기 보다는 문제가 전개되는 맥락에 대해 사유할 때, 문제가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할 때, ... 다른 상상력을 가질 때, 저항의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쓰여진 이 책은, 진보, 정체성, 운동 등등에 고착된 본질은 없으며, 구체적인 맥락과 (역사적, 관계적) 정황에 따라 그 주요양상 및 일차적 모순은 달라진다고 말하며, 어째서, 어떻게 그런지 또한 보여준다. 무엇보다, 자기들 내부의 차이를 억압불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고, 또한 (예컨대 여성=페미니즘식의 환원주의적 폄훼가 아닌 방식으로) 타자들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다른 목소리들을 들을 수 없는 사회는, 갈등없는 사회가 아니라 가능성이 없는 사회다."

그래서 그 다음은? 직접 읽어보시라. 이 책은 요약해서 소개하면 이 책이 지닌 풍성한 수맥을 다 잘라버리게 되는 그런 종류의 성찰과 영감가득한 책이니. 진보 진영들 내부에서 이런 저런 목소리들과 주장들, 비판들은 많지만 나날이 갈수록 빈곤화되고 각개격파되는 지금의 상황을 삐딱하게 보자면, 마치 싸우지 않고 혹은 덜 싸우고 유리한 상황이 되기를 기다리기만을 기다리면서 불평(알리바이성 비판)만 일삼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역사의 동력으로서 진보가 제기하는 도전들을 페미니즘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희망을 건설하는 따로 또 함께 열망의 공동체, 전망좋은 움직임으로 꿈틀대고 있는 우리는 지금 여기 진보가 던지고 있는 도전들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가? 그리고, 페미니즘의 도전들에 어떻게, 무슨 패를 가지고, 열린 '대화'에 참여할 것인가?

2006년 '진보 진영'의 자기변혁(self-help through self-transformation)을 위한 필독서: <페미니즘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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