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오래도록 문학과 예술을 들여다보며 삶의 의미를 반추하려는 우리시대의 평범한 시민이자 시와 소설, 영화평론 등에도 관심이 있는 문학도. 세상은 마침내 어둠을 뚫고 빛을 향해 전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낙천주의자
과속하지 말고 찬찬히 달릴 일이다
[김규종의 살아가는 이야기] 속도에 대하여
김규종 
일정한 거리를 어느 정도 시간에 도달했는지 가늠하는 개념이 속도다. 그리고 그것은 통상 초속 내지는 시속으로 표현된다. 이를테면 “얼마 전 동해안 지역에는 초속 20미터가 넘는 강풍이 불어닥쳤다”라거나, “고속도로 달릴 때 120정도가 적당해”라고 말한다. 물론 후자의 경우 그것은 시속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속도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속도감은 시대와 공간에 따라 변화를 겪었다. 1830년대 유럽에 보급되기 시작한 열차는 시속 30킬로미터를 갓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의사들은 인간의 육신이 그렇게 ‘빠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크게 우려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시속 1,000킬로미터로 날아가는 비행기 여행이 보편화된 오늘날 그런 옛이야기는 웃음거리처럼 들린다.

나는 속도를 즐기는 편이다. 하지만 작은 차를 운전하기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161킬로미터를 넘겨서 달려본 적이 없다. 속도계에는 180까지 나와 있지만 실제 주행시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조폭들이 선호하는 에쿠우스 같은 대형차가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볼라치면 부아가 치밀어오른다. 여윳돈이 생기면 배기량이 큰 차를 사서 200까지 몰려고 한다. 나이가 더 들면 두려워져서 그런 작은 도전의욕도 사라질까 저어하고 있으니 말이다.

베란다에 지금 귤과 자스민, 찔레가 꽃망울을 터뜨려서 참 환하다. 작년에 처음 찾은 제주도에서 법대 교수한테 선물 받은 귤나무에 꽃이 피었는데, 옅은 베이지색에 작은 별 모양을 하고 있다. 자스민은 자줏빛으로 피어 짙은 향기를 발산하는데, 질 무렵이면 흰색으로 변색하는 특징이 있다. 야생상태의 찔레는 대개 흰색인데, 이사올 때 사온 찔레는 붉은색과 주황의 중간색을 띄고 있다. 이달 중순 무렵이면 다시 치자꽃과 만날 듯하다.

속도를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꽃을 들먹이는 이유는 뭘까? 창밖엔 아카시꽃이 한창이다. 어릴 때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던, 달디단 향기를 품은 하이얀 빛깔의 아카시꽃. 1980년대 중반에 조선일보가 한반도 산림의 주적으로 지목하여 손가락질 받았던 아카시. 고급가구를 만드는 양질의 목재와 풍성한 꿀을 제공하고, 토질을 윤택하게 하며, 빨리 자람으로써 산사태를 예방하는 구실까지 하는 아카시를 적으로 몰아간 유수한 신문사의 무지와 저돌성이란!

요즘 꽃들은 예전처럼 개화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전에는 산수유가 피기 시작하면서 매화가 하늘로 단아하게 몸을 열면 봄이 온 것을 느끼곤 했다. 목련과 개나리, 명자꽃, 진달래 등속이 주위를 환하게 만들고나면 벚꽃이 한꺼번에 밤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 무렵 전후로 과수원에 가면 복숭아와 사과, 배나무 등에도 고운 자태 뽐내는 꽃들이 지천이었다.

그리고는 솜처럼 동글동글하게 모여 수줍게 웃음짓는 옥매와 키 작은 제비꽃, 꽃잔디, 붓꽃, 냉이, 민들레가 촘촘하게 대지를 채워나갔던 터다. 또 얼마 지나면 무뚝뚝한 영산홍과 화사한 철쭉이 향기 드높은 수수꽃다리와 함께 봄의 절정을 노래하면서 보랏빛도 고운 등나무의 개화를 반기곤 하였다. 그리고 허천나게 먹어댔던 아카시가 뒤를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엔 녀석들이 단체로 아우성이다. 그것도 거의 한꺼번에. 그런 형국을 보면서 나는 21세기 초두를 어지럽게 질주하는 우리사회를 생각하곤 한다. 마치 백화제방 혹은 백가쟁명 시기를 연상시키는 시끌벅적하고 빡빡한 하루하루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는 나름의 사연과 까닭과 진실과 열망을 가지고 그날을 살아간다. 그것도 너무나 치열하고 간절하며 장렬한 형식과 내용을 담고서!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와 나의 이웃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나의 생각과 주장이 이웃의 그것들과 상호 충돌하거나 모순되는 일이 예전보다 훨씬 잦아졌다는 사실이다. 사회와 역사를 추동하는 단일한 지도노선이나 강력한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수천 수만가지의 목소리들과 얼굴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확실히 21세기는 다양성과 대채로움의 시기이며, 서로 다른 개개인들의 시공간이다. 아마 이것은 세계 어딜 가나 대면가능한 현상일 것이다. 인류역사가 여태까지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존재형식과 행동양식이 ‘지금’과 ‘여기’에서 창조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세기에 스페인 인문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그것을 <대중의 반역>으로 규정하였다.

무식한 대중이 지배권력의 중추로 등장함으로써 야기되는 맹목적인 야만성과 폭력성을 질타한 가세트의 선견지명은 탁월하다. 그런데 그런 대중의 폭발적인 증가에 우리가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듣지도 배우지도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날마다 되풀이하는 수많은 대중들의 독선적인 재단과 행동이 지배하는 사회의 출구 없는 상황!!

한꺼번에 피어나 자기를 드러내는 봄의 성급한 전령들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몇 가지 시급한 문제, 특히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문제’,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문제를 생각한다. 한쪽 목소리만 내지르고, 한쪽 목소리만 듣고자 하는 두 세력의 끝 모를 충돌과 주장을 듣고 보면서 다시 생각한다. “문제는 속도다!”

정부가 지향하는 정책의 속도와 비판적인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의 그것이 충돌하는 양상에 내재된 본질은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꽃차례처럼 복원하기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상실된 바로 그 지점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면 날마다 충돌하는 양자 공히 한반도의 오늘과 내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자 같은 시민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꽃차례가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비닐 하우스를 뺀다면 그들의 열매는 다른 시기에 맺힌다. 아직은 비관하기 이르다는 말이다. 나는 급한 성격으로 인하여 많은 오류와 실패를 경험하였다. 그래서 얻은 소중한 결론은 “서두르는 것보다는 느리게 가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조급증이 불러오는 폐해가 느긋함으로 인한 피해보다 훨씬 크다는 교훈 아닌 교훈이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대지에 기반을 두고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사람들끼리 왜 큰 나라 의식하면서 대결과 충돌을 되풀이해야 하는가. 찬찬히 밟아가는 내부토론에 바탕을 둔 의견수렴과정을 거쳐가자는 것이다. 무슨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소수 엘리트가 지배하는 왕조시대도 아닌 담에야 넉넉하게 정보 제공하고, 의견을 묻고,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여 다시 말한다. “과속하지 말고 찬찬히 달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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