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섭]의 밑에서 본 세상
1990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해 정보통신, 노동계, 국제경제 등을 담당했다. 1998년부터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해외 진보진영의 글을 번역해서 소개해 왔고, <싸이버타리아트> 등 세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기자의 시선은 언제나 발 밑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우리에게 또 무엇을 지시하고 있을까 기대해 본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손녀
신기섭 
독립운동가의 손녀가 높은 관직에 올랐다고 해서 주목받고 있단다. 독립운동가 자식들이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어렵게 사는 줄만 알았는데, 이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다는 게 주목받는 이유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이 땅에서 독립군 후손의 출세 이야기를 들으니 좋다는 반응들도 있단다.

이 집안 내력인즉슨 이렇다. 이 여성의 할아버지는 일제 때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였다. 이 할아버지의 형과 동생들도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했다. 이런 집안에서 의대 교수, 도의원, 공기업 사장, 장관이 배출됐고, 손자, 손녀들은 대부분이 학자들이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머리를 스친 생각은, 누가 자식들을 이렇게 번듯하게 성장시켰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답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남편이 독립운동 한다고 중국으로, 만주로 떠나거나 감옥에 들어갔는데, 누가 자식들을 챙겼겠는가? 대부분의 책임은 시부모 모시기도 버거운 독립운동가의 아내에게 떨어졌을 것이다. "아버지는 이국에서 독립운동하느라 고생하는데 정신을 못차리냐"고 꾸짖으며 자식들을 공부시키지 않았을까?

너무나 상투적인 추측이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언론이 전하지 않으니 도리가 없다. 언론이 친철하게 도표로 만들어준 가계도에도 아내들의 자리는 없다.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아니, 누구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고 해야 더 정확하다.

하지만 어디 이 집안뿐이겠는가? 남편과 함께 만주 벌판을 떠돈 여성 독립운동가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진 다른 아내들이건, 매한가지다.

정부가 나서 항일 역사를 다시 규명하겠다지만,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 여성들의 ’투쟁‘ 이야기가 빠지는 한, 그 역사는 반쪽에도 못미친다. 독립운동가의 아내 이야기를, 그들의 딸들마저 세상을 뜨기 전에 찾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뿐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적은 탓이겠지만,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다 고초를 겪은 민주투사, 노동운동가의 아내 이야기도 들어본 게 거의 없다. 남편이 당한 고문을 폭로하려 성명서를 쓰고 누명을 벗기려 탄원서를 쓸 시간은 있었을지언정, 자신의 힘든 이야기를 적기 위해 연필을 들 엄두는 내지 못했으리라.

이제라도 그 여성들의 '조용한 투쟁' 이야기를 기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영원히 역사는 남성들이 주인공인 '남성들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역사는 결국 기록하는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생활 공개를 아주 꺼려하는 내가, 오늘은 내 어머니 조분자에 대해 흔적이라도 남기기로 결심했다.

공부에 나름대로 흥미가 있고 교사가 꿈이었던 소녀는 "여자가 배워 뭘 하느냐"는 아버지 말씀에 학업을 일찍 중단했고 꿈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시집 와서는 자식 낳고 키우는 것만 제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남편이 남겨놓은 것 없이 세상을 떠나자 생계마저 도맡아야 했다. 그렇게 거의 20년동안 안해본 일이 없다. 그 고단한 '가장' 노릇을 졸업하는가 싶던 차에 새로운 일거리가 찾아왔다. 맞벌이 하는 자식을 대신해 자식놈만큼 성질 까다로운 손녀를 키우느라 지금도 허리가 휜다.

일흔을 바라보는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당신의 할머니, 어머니 이야기와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가? 더 늦기 전에 당신의 할머니, 당신의 어머니에게 이름을 돌려주고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자. 물론 당신 이야기도 잊지 마시라. 다시는 이런 주제넘는 남성의 충고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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