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은]의 ING
필자는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이며 여성학자이다. 가족과 노동의 경계를 부수는 연구와 실천을 함께하고 있다. 글이라는 것은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공감하며 성찰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또한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 사회가 함께 변화되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상처 받은(준) 사람들에게
조주은 
한 해가 밝았다. 올해는 속된말로 아홉수가 끼인 해라 약간의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작년은 37년이라는 짧은 내 인생을 정리하며, 딸리지만 온 기운을 모아내서 작은 성과도 있었던 해였다. 그러나 다시는 지난 해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성과위주의 삶은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늘 앞서가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또 다른 곳에서의 희생을 감수해야만 했다.

올해는 어떻게 나를 학대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식으로 차별과 불의를 보며 '거룩한 분노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 '거룩한 분노'를 실천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자신(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지 못하는 비겁함이다.

언제부터인가 사회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운동진영의 활동가들과의 대화는 자본과 정권에 대한 불타는 분노가 아니다. 사람들은 경쟁관계에 있는 상대조직, 활동가로부터 받은 상처를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만나기만 하면 칼을 빼들고서 타인에 대한 비방, 죽이기에만 몰두하고 있는 듯 하다. 공식적인 문제제기나 비판은 사라지고 '(그러) 카더라' 통신에 의지한 상대방 죽이기가 난무하고 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하고 울고 있다.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상처때문에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담배 한 대를 물어대기도 한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깊은 상처로 인하여 밤잠이 오지 않아서 목구멍에 쓴 술을 들이붓기도 한다. 한잠에 빠져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울부짖기도 한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알고서 절망한다. 목은 칼칼하고 깨지 않는 술 때문에 몸만 계속 축나게 된다. 상처는 그대로이고 오히려 고민이 하나 둘 더 추가된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뒷공론으로 계속되는 이런 불평불만은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나는 작년에 여성활동가들을 상대로 한 강연을 가게 되었다. 강연을 가니 특정 단체의 여성활동가들이 한 좌석에 좍 앉아있다. 그녀들 중에는 여성학을 전공하여 이미 내가 강의할 내용을 공부한 사람도 눈에 띄었다. 아니다 다를까 내 강의가 시작되니 시큰둥한 표정이다. 계속 그녀들의 표정이 걸린다. 결국 전반부 강의를 마치고 쉬는 시간이 되자 특정 단체의 여성활동가들은 모두 자리를 빠져나갔다.

후반부 강의가 시작되자 나는 한줄이 비어있는 의자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다. 강의가 끝나고 큰 박수를 받고 몇몇 사람들은 뛰어나와 명함도 주고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이 허하다. 다음날까지 괜히 마음이 안 좋다. 주변에 아는 동료에게 중간에 자리를 집단적으로 빠져나간 그녀들을 비난해야만 마음이 풀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는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노력한 좋은 강의라고 하여도 60명이 넘는 청중모두를 100% 만족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사람 좋은 얼굴하며 온갖 겸손을 다 떨며 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모두를 통제하고 지배하고자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는요, 운동을 언제 그만둘꺼냐면요, 해방되는 그날이 아니라 그 새끼 OOO가 운동 그만두는거 제 눈으로 확인하고나서 그만둘꺼예요." "그 사람이 △△△ 하는 거 막아야 합니다." 그 새끼가 위원장 해먹는 꼴 못본다며 일명 그 새끼를 씹어 재끼는 사람의 얼굴에서 위원장을 해먹고 싶은 본인의 욕망을 읽게 된다. 그 사람이 △△△ 하는 거 막아야 한다며 사람들만 만나면 개거품 무는 인간의 목소리에서 본인이 △△△ 하고싶어하는 욕구가 들려온다. 언제까지 뒷담화로 씹어대며 본인의 상처를 더 후려파고 있을 것인가?

현대사회의 '독립적인 개인'은 하나의 신화이다. 우리모두는 상호의존하는 관계의 연결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상처'는 흠하나 없고 분리된 개인에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상대방과의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생겨난 것이다. 나에게 모진 말과 행동을 한 상대를 왜 나는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혹시, 상대방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내 열등감을 건드린 것이 아닌지를 성찰해 보자.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데 왜 나는 특정한 말과 행동에 지나치게 예민한지를 한번 고민해 보자.

내가 받은 상처를 성찰하면 그동안 방치해두었던 나라는 존재의 허약함과 어두운 면을 볼 수 있다. 끔찍하게 보기 싫겠지만 한번 들여다 보자. 자신의 상처를 성찰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어두운 면을 상대방에게 던져버리기 쉽다. 언제나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아느냐"며 거품물며 흥분하는 사람들은 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한번쯤 자기자신을 깊이 들여다보고 다독거리면서 더욱 강한 내가 되자. 나를 포함한 우리모두가 동료들의 말과 행동 한마디에 파르르 떨며 기운을 소진하지 않으면서 2005년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한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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