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뮤니즘에 이르는 길, 자본과 국가에 대한 부정과 투쟁

[새책] 전복적 이성 (워너 본펠드, 서창현 옮김, 2011.9, 갈무리)

혁명은 가능한가? 위기에 빠진 듯 하면서도, 여전히 공고해 보이는 자본주의는 마치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된 영원한 존재일 것만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시대의 비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워너 본펠드의 <전복적 이성>은 역사의 과학적 법칙,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혁명의 공리를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전복적 이성은 오히려 매우 부정적인 함축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은 계급에 대한 부정 속에서만, 계급 없는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긍정(성)을 발견한다.” “물질들의 사회적 구성을 폭로”하기 위한 전복의 유물론은 인간 실천의 유물론이다.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세계가 사회적 실천 형태들이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되어”,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이, 인간을 억압하는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적 실천의 다른 구성이 필요하다. 저자는 그러한 다른 구성을 위한 길을 부정과 비판에서 출발한다.

계급 사회에서 비판적 사유는 특정 계급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계급에 대한 부정 속에서만 자신의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논의를 위해,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끌어온다. “아도르노에게, 비판적인 사회이론의 임무는 경직된, 물질 같은, 응결된 관계들을 탈신비화하여 그것들의 직접성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 실천의 관계들이 사물들의 관계로 전도되어 나타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 싸움의 출발점인 셈이다. 드러나 있는 경제적 범주들을 자연적인 것으로 사고하는 경제이론은 자기 자신을 타당한 과학으로 정립하기 위해서 인간을 제거해 버린다. 그들의 “경제적 범주들 내부에서 볼 때 인간 주체는 형이상학적인 방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전복적인 힘들이 설명될 수 없다. 파업을 하는 것은 노동자이지, 가변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아도르노의 비판은 이 방해물, 즉 인간 주체가 사실상 본질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인간은 가변자본이란 개념의 동일성 속에서 부정되는 비동일성이다. 때문에 그의 부정변증법은 화해할 수 없는 것을 화해시키는 동일성을 위한 사유가 아니라, ‘모든 동일성을 의심’하는 사유이다.

저자의 논의의 시작이 아도르노였다면, 이후 줄곧 그의 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실천이 “경제적 객관성의 단순한 인격화인 자본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 반하여 존재”한다는 것이 맑스의 비판의 핵심적인 문제틀이다. 맑스의 비판적 이해 역시, 인간 주체를 자본 형태 속에서 부정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본다는 점에서-저자가 아도르노의 말을 빌어 말하는 것처럼-, 하나의 부정적 존재론이라 볼 수 있다.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근본적으로 물신주의 비판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이 상품 속에서 소멸하는 이 사회에서, “비판은 사물들 자체의 관계를 ‘인간 간의 관계’로 되돌려야”하기 때문에, 물신주의 비판은 “인간적 토대에 기초한 해독을 수반한다.” 때문에 맑스의 비판은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부정이다. 이는 자본의 전도된 형태를 비판하고, 그것의 사회적 토대, 즉 그러한 실존의 인간적 기초를 전면에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맑스의 비판은 전복적이다.

저자는 맑스주의에 대한 구조주의적이고 주관주의적인 해석 모두를 단호히 거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구조주의적 접근법에서의 주체는 구조이다. 인간 존재는 “구조들이 발산하는 명령들의 담지자”에 불과하며, 계급 갈등은 자본주의의 연속적 재생산에서의 한 기능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된다. 이러한 논리는 “자본이 능동적이고 자기 구성적인 사물”이라는 전제에 기반하고 있다. 한편 주관주의적 접근법들은 형식적 법칙이 아니라, ‘주체성’의 개념을 강조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의 요구와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창의적이고, 소외되지 않고, 자기 결정적인 주체”를 상정하는 이 입장은 이 주체가 자본주의 세계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적 실천의 주체주의적 승인은 혁명적 주체의 직접성의 낭만적 기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단지 “선언된 주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저자가 이해하는 맑스의 물신주의 비판은 역사의 법칙을 건설하거나, 무언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판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다. 저자가 이 비판과 부정의 무기를 들고 겨냥하는 곳은 국가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많은 분석은 세계화를 통해 유동하는 투기자본이 국민경제를 붕괴시키다는 식의 설명으로 나타난다(여기서 금융자본은 국민경제를 파괴하는 나쁜 자본주의로, 산업자본은 민족 공동체의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기업을 구성하는, 장려해야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분석은 세계시장이 다수의 국가들과 그들의 ‘국민경제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자본은 ‘태어날 때부터 전지구적 권력’이었다. 즉 세계시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언명령’으로, 맑스에 따르면 ‘세계시장을 창조하는 경향은 자본 개념 자체에 이미 직접적으로 주어져있다.’ “자본은 민족적 성격도 애국적 결연도 갖지 않는다.” “상품의 애국심은 화폐이고, 상품의 언어는 이윤”이며, 시장은 필연적으로 세계시장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국민경제’라는 개념은 전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부는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창출되지 않으며, 국가의 목적이 부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목적은 그 기능 속에서 드러난다. 국가의 통치 수단인 법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임금노동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를 자신 앞에 평등하게 불러세움으로써 불평등을 은폐한다. “개인은 소유상의 불평등과 상관없이 각각의 개인의 평등을 가정하는 표준화된 권리를 갖는 추상적인 시민이 된다.” 이러한 법을 강제하는 국가는 사회 관계의 외부에 서 있는 중립적인, 공정한 매개자가 아니다. 국가는 형식적 자유와 추상적 평등의 이면 속에서, 자본의 전제라 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의 재생산을 보호함으로써, 착취를 보증한다. 이러한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로서의 “국가는 자본주의 사회 속의 한 국가가 아니다. 국가란 자본주의 국가다.”

이러한 국가에게 대의제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한다. 대의제는 형태상으로는 민주적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해 관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의제의 이러한 성격은 “민주주의가 그 계급적 성격을 부정하고 인구의 실재적 이해관계의 수단으로 변형되려는 경향을 드러내자마자, 민주주의적 형태들이 부르주아에 의해 그리고 그 국가 대표자들에 의해 희생된다는 사실 속에서 명백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생각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한다. 레닌은 국가 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바꾸는 것을 혁명으로 인식했다. 권력의 탈취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인 것은 부르주아가 국가의 주요 직책들을 확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부르주아적인 사회적 재생산 관계들의 정치 형태이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다른 국가’로써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의문시 될 수 밖에 없다. 국가는 “사회의 독특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라는 도구가 아니라, 왜 하필 국가인가라는 물음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 속으로 편입됨으로써, 제도화된 데모스는 약화되고, 통치의 자원이 된다. “자본과 국가에게 닥친 중대한 위험은 노동계급이 자유민주주의 체계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데모스, 즉 의존적인 대중들이 스스로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권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인간해방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답하는 저자의 방식은 우선 코뮤니즘이란 인간해방의 이념을 풀이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먼저 찾아가는 것이다. 코뮤니즘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해방에 대한, 인간해방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예견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착취 가능한 자원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으로 존재한다. 코뮤니즘은 법 앞에서의, 화폐 앞에서의, 국가 앞에서의 추상적 평등이 아니라 추상적 평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때문에 코뮤니즘은 “자본 및 국가에 대한 실천적인 비판이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코뮤니즘에 이르는 길에 서보자.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저자가 알려주는 출발점은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향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상주의야말로 진정한 현실주의이다. “불가능한 것은 가능하다.” 그렇다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혁명적 당이 혁명의 조직형태라는 생각, 혁명의 수단으로서의 국가 형태라는 개념, 혁명적 주체를 한정하려는 시도. 대중의 해방은 대중 자신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폐지”하는 것이며, 혁명적 주체의 구성은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해야할 것은? 자본 및 국가에 대한 조직화된 부정, 더 나은 조건들에 대한 요구, 그리고 삶과 생존의 투쟁, 패배, ‘절정’의 순간들의 경험으로부터의 배움. 이것들은 사회적 자율이라는 혁명적 투쟁의 조직 형태를 수반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자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직화된 부정 형태들”로서, “자신의 조직화의 방법 속에서 혁명의 목적(즉 인간해방)을 예상하는 그러한 저항의 조직적 형태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 자기결정을 이루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자율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부정의 운동으로서, 코뮤니즘이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과 함께 출발한다.

요컨대, 코뮤니즘에 이르는 길은 자본주의 사회 밖의 주체를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에서의 조직화된 ‘부정’을 통한 실천에 달려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인간적인 자본주의, 즉 복지국가의 귀환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복지국가는 생산된 부의 재분배를 주요 문제로 삼는다. 하지만, 부의 생산은 여전히 국제적인 경쟁적 착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말처럼, “노동계급의 조건을 인간화하려는 노력은 노동 착취를 긍정하는 역설을 낳는다.”

코뮤니즘에 이르는 여정은 먼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자본과 국가에 대한 부정과 투쟁과 함께 출발한다. 때문에 코뮤니즘은 이미 시작되었고,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뉴욕의 리버티 공원에도 있고, 강정마을에도 있고, 부산의 크레인 위에도, 그곳을 찾아가는 버스에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당장 당신과 함께 시작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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