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이라는 게임

[새책]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비디오게임 <제국의 게임>

게임 이용자도, 개발자도 아닌 사람에게 이 책의 쓸모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게임에 대한 지식도, 흥미도, 소질도 없이 살아온 내게 말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당연하겠지만, 게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하면 게임 자체에 대한 비평은 아니라는 것이다.

  <제국의 게임>, 닉 다이어-위데포드. 그릭 드 퓨터, 갈무리, 2015.

<제국의 게임>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들, 닉 다이어-위데포드와 그릭 드 퓨터는 제국이라는 현대의 전지구적 질서 속에서 게임을 분석한다. 물론 이 개념은 하트와 네그리의 저서, <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제국은 단일 국가에 의해 통치되지 않으며 "네트워크 권력"을 통해 작동하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의한 협치"로서, "경제적.관료적.군사적.의사소통적 구성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새로운 지구적 체제"다.

그렇다면 이 제국에서 게임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들에 따르면 가상 게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본질적이고 표현적인" 제국의 매체다. "18세기 소설이 …… 부르주아적 인격을 생산하는 텍스트 장치였으며, 20세기 영화와 텔레비전이 산업적 소비주의에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가상 게임도 마찬가지로 21세기 전지구적 초자본주의를 구성하는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부터의 탈출 인계선을 구성하는 매체"라는 것이다. 이쯤되면 게임에 대한 무지를 반성해야할 것만 같다.

그렇다면 게임은 어째서 제국의 본질적인 매체인가? 그것은 가상 게임의 탄생에서부터 시작된다. "'비디오 게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미국 군사 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고학력의 기술과학자인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소련과의 핵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컴퓨터 게임은, 이들이 "고용주가 제공한 귀한 컴퓨터 이용시간을 낭비"하면서 시작되었다.

재밌는 점은 이들이 '하라는 일은 안하고'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일이 허용된 이유다. 그것은 그렇게 '노는' 일이 "새로운 용처와 선택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해진 규정과 절차를 벗어나 다양한 방식으로 컴퓨터를 가지고는 일이 예기치 못한 변수들을 계산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이들에게 주어진 본래의 업무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핵전쟁에 대한 대비'에 도움이 되는 일- 에 혁신을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는 일’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선다. 그건 진짜 ‘일’이다. 놀이를 일로 만드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제국의 게임이 갖는 주요한 특성 중 하나다. 우리는 가상 게임의 그러한 속성이 그 기원에서부터 함께 했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어쨌든 가상 게임의 기원으로 다시 돌아가면 거기에는 또 다른 요소도 있었다. 그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대항문화다. 초기의 비디오게임은 군사연구소의 컴퓨터에 대한 해킹을 시도하고, "재산권과는 상관없이 정보를 공유하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믿었던 학생들을 통해 확산되었고, 이들의 디지털 실험은 당시의 대항문화와 깊은 관련성을 지니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군이 지원하는 전자전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실의 연구원들은 그럼에도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고, 전쟁에 반대하는 파업을 지지하는 프로그램화된 서한을 만들거나 시위를 컴퓨터로 조직했다. 이렇게 “가상 게임의 기원에는 두 개의 적색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냉전 시기 국방부로 하여금 더 많은 돈을 디지털 연구에 쏟아붓게 만든 외적인 위협이고, 또 하나는 “반체제 문화에 의한 내적 전복”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리차드 닉슨에 반대하는 성명서들이 실린 대자보들이 잔뜩 붙어 있는 연구실에서 게임을 하는 학생들” 그리고 이들과 접속했던 해커들은 이렇게 군사 비밀 체제를 위해서 만들어진 정보통신기술들을 디지털 놀이로 바꾸어 버렸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게임과 컴퓨터를 펜타곤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핵 위협의 세계에서 그것들을 탈영토화시킴으로써, 해커들은 의도치 않게 순수하게 상업적인 형태를 띤 자본주의에 의해서 발생하는 재영토화를 위한 무대를 다시 만들어 주게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게임은 군사 기술을 디지털 놀이로 전유하며 탄생했지만, 그것은 다시 상품으로 재전유되었다. 게임의 탄생은 그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상품으로 재전유된 현대의 게임, 즉 제국의 게임은 어떤 모습인가? 저자들에 따르면 하트와 네그리는 제국의 노동 조건들, 주체성의 형성들, 그리고 투쟁 형태들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이 책은 이러한 분석을 게임에 대해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게임 이용자는 단순히 게임을 수동적으로 즐기는 사람들만은 아니다. 게임산업이 이윤 창출을 위해 채택한 혁신적 방법은 바로 “게임 이용자 자체를 비물질노동에 동원하는 과정”이다. 게임을 “개조하고, 배포하고, 다른 용도에 맞게 고치는 광팬들의 문화”는 “애초에는 매우 자율적이며 유사불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 문화”는 곧 게임 자본의 이윤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놀이노동”과 관련한 활동으로 저자들이 드는 예는 소규모 개발, 개조, 다중접속 게임, 머시니마(게임으로 제작된 영화)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소규모 개발자들 혹은 게임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활동들이 게임 회사들의 이윤의 원천으로 포섭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게임 제작사인 이드는 <둠>을 출시하면서 이용자들이 스스로 게임을 수정하고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수 있는 도구를 포함시켰다. 이러한 전략이 게임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며, 이를 통해 이드는 “자발적인 생산인재 풀”을 무상으로 취할 수 있었다.

이렇게 게임산업은 “자발적인 생산을 혁신과 수익의 원천으로 흡수하는 방법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것은 역설적으로 게임산업이 얼마만큼 게임이용자들, 즉 놀이노동자들의 협력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저자들이 책의 3부에서 본격적으로 ‘다중의 게임’을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비물질노동은 주체성의 생산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비물질노동으로 통해 생산되는 “상품으로서의 그것[게임]의 성공 혹은 실패의 여부는 관계의 창조”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는 “하드코어들에게 어필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발매되었다.” 하드코어란 간단히 말해 게임 매니아로서 이들은 자신을 특별한 주체의 위치에 놓는데, 그것은 경쟁이나 싸움에 휘말리는 “행동하는 남자”와 같은 것이다. 젊은 남성 게임이용자를 위한 이 콘솔은 “경주용 차와 사이보그 전사 등에 대한 가상의 이미지들을 가정하며, 비하와 쓰레기 같은 대화를 전제함으로써, … … 젊은이, 남성성, 디지털 놀이에 관한 선입견을 유지하는 데 계속적으로 공조해 왔다. 즉 그것은 하드코어 주체를 재생산했다.”

이와 유사하게 “하드코어/콘트롤러” 조합을 택했던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과 달리 닌텐도의 <위>는 “원격/간헐적 이용자” 조합을 택했고, 이들의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즉 게임 시장의 판도는 주체성을 어떻게 설계하는 가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로 된 것이다. 이러한 “육체-정서적” 참여를 통해 게임 이용자들은 게임기 자체, 그 기계 자체가 된다.

콘솔 구매 그리고 그와 관련한 일련의 소비 행위들로 이루어진 상품의 그물망은 이제 이 기계적 주체들의 에너지를 동력으로 하여 작동한다. 기계적 주체들은 마치 자동화된 “인간-기계 시스템”에 삽입된 “부품 조각들”과도 같아 보인다. 이들은 실로 ‘노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계적 종속화는 불안정하다.” 자본의 이윤을 향한 경주는 기존의 구축된 것들을 탈영토화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며, 이 과정에서 기계적 주체들에게 예상치 못한 자율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콘솔 해킹, 자가제작, 불법복제 등을 이에 대한 예로 든다. 이렇게 저자들은 끊임없이 제국의 게임 속에서 배태되는 다중의 게임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7장 ‘다중의 게임’과 그 이후 부분들은 그러한 가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서술한다. 그에 대한 사례들로 여러 가지가 언급되지만 그 요지는 이미 앞에서 드러난 바 있다. 즉, “자신들의 이윤추구 역학에 의해 움직이는 산업들은 의사소통의 수단들을 만들고 분산시킨다.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그리고 착취하기 위해 그들은 역설적이게도 자본의 독점을 감소시키는 미디어를 생산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도구를 제공한다.” 그러므로 많은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저자는 다중의 양가성에 주목할 필요를 언급한다. “상품화되고 군사화된 체제에 이미 깊이 침윤된 주체들”이 “자가-스펙타클화하는 공동창조자”가 되는 상황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가상 게임들과 같은 새로운 매체들은 다중의 집단 주체성의 두 측면, 즉 창조적 반대와 이익에 대한 추종 간에 일어나는 치열한 전투의 영토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제국 내에서, 제국의 게임을 통해 벌어지는 “비물질적 내전”이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낙관적인 전망을 놓지 않는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아직 “게임 끝”은 분명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이 “그 통제범위들을 넘어설 수도 있는 역량들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제국은 사회적 에너지에 의존하는 갈등적 시스템으로 남아있다. 제국은 이러한 사회적 에너지를 통제하에 두어야 하지만, 그 에너지는 끊임없이 제국의 훈육으로부터 벗어난다.” 때문에 “모든 제국의 게임은 다중의 게임이기도 하다.” 이것이 결국 저자들이 하고 싶었던 말이고 제국의 게임이 지닌 역설이다.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게임 이용자도, 개발자도 아닌 사람에게 이 책의 쓸모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말이다. 그것은 물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책이 게임 자체에 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책을 현재의 상황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독해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게임이용자들의 놀이가 노동이 되는 상황, 그것이 기업 이윤의 원천이 되는 상황, 게임을 군사기술로부터 빼내온 해커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게임 상품화의 무대를 열게 된 상황은 게임을 통해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유행어처럼 되다시피한 젠트리피케이션은 정확히 그러한 상황과 동일한 작동원리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게임은 단순히 상징인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의 게임 이용자들이 사용하는 컴퓨터 -물론 게임 이용자만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를 만들기 위한 공장 건설로 인해 농지에서 쫓겨난 중국의 농민들이 골드경작자, 즉 디지털 광산노동자가 되는 상황은 온라인과 현실 세계가 뒤엉켜 작동하는 강탈과 착취의 일면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온라인과 현실 세계라는 구별은 온당치 않고, 어쩌면 게임과 게임 외부란 구별도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책에서 읽을 수 있고, 읽어야 하는 것은 <제국의 게임>이라기 보다는 ‘제국이라는 게임’이다. ‘제국의 게임’을 수행하는 것은 게임 이용자들만이 아니다.

이로써 우리는 이 책이 지닌 미덕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제국이라는 전지구적 네트워크 지배가 작동하는 방식을 적실하게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 역시 그 제국이라는 게임의 이용자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게임이용자도, 개발자도 아닌, 그리고 게임에 대한 지식도, 흥미도, 소질도 없는, 아니 없었던 나와 같은 사람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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