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과 ‘수사관’의 경계에서 조작된 대공수사

[이슈]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 씨 “10년간 인터뷰만 1000번…사건은 도루묵”

양지로 떠오른 국정원, 이적異的 행위의 기록

① 종북몰이 타깃이 된 민주노총 “노동 3권이 위험하다”
② 국정원의 위험한 직업활동, ‘프락치’ 공작사건
③ “형님”과 ‘수사관’의 경계에서 조작된 대공수사
④ 국정원-보수언론-보수단체 삼각구도가 만든 ‘세월호의 나쁜 아빠’
⑤ 국가정보원의 집행검 ‘국가보안법’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 씨를 지난 2월 21일 서울시 구로구에 있는 그의 일터에서 만났다.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은 이미 끝났다고들 생각하지만 그는 아직도 재판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는 의문이 든다. 잘한 일인가. 간첩사건 조작이라는 또 다른 피해를 막기 위해 재판을 불사했다. 하지만 진작 결론이 나왔어야 할 재판은 답보상태를 지속하고 있고, 가해자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다시 도루묵이 됐어요. 10년 동안 제가 바랐던 거는, 인터뷰를 천 번을 넘게 하면서도,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꿋꿋하게 계속 걸어온 건, 다시는 저 같은 피해자가 안 나올 거라는 빛이 보였기 때문이에요.”

2013년 2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서울시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던 탈북화교 출신 북한 보위부 공작원 구속기소」 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냈다. 서울중앙지검은 국가보안법 위반죄(간첩)로 유우성 씨를 구속기소했다. “국내 탈북자 신원정보를 수집하여 간첩활동”을 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2020년 9월 서울중앙지법 앞마당에서 유우성(가운데), 유가려(왼쪽 두번째) 씨가 국정원 직원들 재판에 참석하기 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출처: 리포액트]

유우성 씨가 ‘간첩’을 ‘조작’한 국정원의 이적(異的) 행위를 세상에 드러내고 싸워온 게 꼭 10년.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을 다 안다. 그러나 그 10년의 언저리에 윤석열 대통령은 유우성 씨의 수사·기소·공판 검사였던 이시원(당시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에 임명했다. 유우성 씨는 “결국 제가 그 사람들이 잘 되는 걸 계속 부채질한 것”이라며 허무함을 토로했다.

“저는 요즘 인터뷰가 들어오면 마음이 너무 무거워요. 나쁜 짓을 하고도 이렇게 잘 살고, 더 잘 된다는 걸 계속 알려야 되나 하고요. 권력을 잡고 있는 수사기관이나 검찰이나 이런 기사를 접했을 때 나도 이 사람들처럼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겠어요?”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약점을 파고든 대공수사

유우성 씨의 국가보안법 위반죄를 다룬 1심 재판에서 당시 동생 유가려 씨의 진술은 오빠인 유 씨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동생은 오빠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2013년 4월 유가려 씨는 기자회견을 열고 합동신문센터에서 국정원 직원들에게 폭행과 회유, 협박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고, 오빠가 간첩이 아니라고 기존의 진술을 뒤집었다. “그때는 국정원에서도 이 사건을 쉽게 본 거예요. 왜냐하면 북한이탈주민들이 다 그렇게 쉽게 됐으니까요”라고 유우성 씨가 말했다. 과거 대다수 간첩조작 사건은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했던 인사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2010년이 넘어가면서 대공수사는 ‘북한이탈주민’이라는 새로운 약점을 파고들었다.

2013년 2월 서울중앙지검은 유우성 씨를 구속기소하며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의 대남공작은 정예 공작원을 양성하여 침투시키던 종래의 전형에서 벗어나 최근 다양한 계층에서 공작원을 다수 선발하여 침투시키고,……가족을 동원하는 반인륜적인 공작도 서슴지 않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며 “탈북자로 위장하거나 탈북자를 포섭하여 정보를 빼내는 등 탈북자를 이용한 북한의 공작활동 증가 추세”라고 설명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으로 남한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총 3만 3,882명이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식량사정 악화를 계기로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의 수는 꾸준히 증가해, 2001년 연간 입국 인원이 천 명을 넘어섰다. 2003~2011년에는 연간 입국 인원이 2,000~3,000명 수준에 이르렀다. 합동신문센터가 설립된 건 2008년이다. 국정원은 이곳에서 최장 180일까지 북한이탈주민을 조사했고, 조사 기간 북한이탈주민은 독방 구금 상태에 있었다.(1)

같은 시기 북한이탈주민 관련 간첩 비율도 늘어났다. 국정원과 경찰이 2009~2019년 동안 검거한 간첩은 모두 36명이다. 국정원은 이 가운데 북한이탈주민 관련 간첩은 17명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국회정보위에 보고했다.(2) 즉, 지난 10년간 국정원 등 안보수사기관이 검거한 간첩의 47.2%가 북한 대남공작기관의 지령을 받고 라오스·베트남·태국 등 제3국을 통해 국내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위장 또는 연계 간첩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우성 씨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다투고 있을 즈음인 2013년 입국했던 홍강철 씨도 합동신문센터에서 썼던 진술서와 반성문을 통해 간첩이라고 ‘자백’했다. 2014년 재판에 넘겨진 홍강철 씨는 2020년에서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았다. 2013년에 입국한 이혜련 씨도 자신을 북한 보위사령부가 직파한 간첩이라고 자백해 유죄선고를 받았는데, 현재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형님”과 ‘수사관’의 경계는 어디였을까?

처음부터 국정원이 유우성 씨를 ‘보위부 공작원’으로 취급한 건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유우성 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우성 씨는 2011년 5월 북한이탈주민들 중에서 최초로 서울시 복지정책과에 1호 공무원으로 들어갔다. 일을 열심히 해서 MBC의 ‘통일 열차’에도 출연하고 북한이탈주민들 중 성공한 사례로 꼽혔다. 그가 공무원이 되어 일을 시작하자 국정원 대북파트에 있는 사람이 찾아왔다.

이미 유우성 씨가 북한에서 재북 화교여서 가족들이 북한과 중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국정원은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유우성 씨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형” “동생” 하면서 지냈다.

  지난 2월 21일, 인터뷰 중인 유우성 씨 [출처: 참세상 자료 사진]

“만나기 좋은지, 싫은지를 떠나서 그 사람이 만나자고 하면 북한이탈주민 입장에서는 거부하기 굉장히 힘들거든요. 그래서 3개월에 한 번씩 그냥 만나면서 많이 친해졌어요. ‘형-동생’ 하면서요. 그러다가 제가 2012년 초에 요청을 한 거예요. 중국에 여동생이 있는데 데리고 오고 싶다고요. 잘 봐달라는 식으로요. 그 사람이 ‘우리 국정원과 일하는 거랑 같으니까 동생이 들어오게 되면 전화라도 한 통화 넣어주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한테 2012년 10월에 동생이 한국에 들어온다는 걸 미리 다 얘기해 놓은 상태로 동생이 2012년 12월에 들어온 거예요. 동생이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국정원에 신고했어요. ‘제가 누구누구인데 여동생을 데려와서 지금 신고합니다’ 라고요. 그리고 국정원에 있는 그 사람한테도 전화를 했어요. 동생은 (합동신문센터에) 조사를 받으러 갔고 저는 서울시에 출근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 갑자기 1월 10일에 제가 체포됐고, ‘남매 간첩사건’으로 둔갑이 된 거예요.”

당시 언론은 유우성 씨가 북한 이탈 주민 1만 명가량의 자료를 북한으로 보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북한 이탈 간첩 공무원’이라는 점도 부각됐다. 그러나 유우성 씨는 북한 이탈 주민과 관련된 정보를 다루던 공무원도 아니었고, 그 자료를 볼 수 있는 업무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시기 대선을 앞두고 있었고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것만 기억이 난다.

무리수를 무리수로 덮으려 했던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유우성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죄 1심이 무죄로 끝날 때만 해도 이제 억울한 부분을 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국정원과 검찰은 무리수를 두었던 1심이 실패하자 더 큰 무리수를 썼다. 항소심 재판이 열리면서 국정원과 검찰은 유우성 씨의 중국 출입국 문서인 허룽시 공안국의 출입경 기록 조회결과 등 공문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제출된 문서가 국정원 직원에 의해 위조됐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국정원 측에 증거를 가져다준 협조자가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2014년 4월에 열린 항소심에서 유우성 씨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유우성 씨는 담당 수사관들을 고소했다. “국정원은 법이 없고 본인들이 법이에요. 그런 국정원이 검찰과 함께 하니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2015년 10월 대법원에서 유우성 씨의 국가보안법 위반은 무죄로 확정됐다.

  법원을 떠나는 국정원 직원들 [출처: 리포액트]

간첩 혐의가 국정원과 검찰의 ‘무리수’였다는 것이 밝혀지자 검찰은 참지 않았다. 2014년 검찰은 이미 2010년에 기소유예했던 대북 송금 관여 혐의를 또 들고나왔다. 대법원은 2021년 검찰의 공소권 남용을 인정하고 공소 기각을 확정했다. 유우성 씨는 또 다른 형사재판을 감당하는 데 7년을 보내야 했다.

‘차폐막’이 가리운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그래도 버티고 서 있었다


유우성 씨는 여전히 모른다. 국정원 직원들이 법정에 서면 판사가 국정원법 등을 이유로 ‘차폐막’(3)으로 몸을 가려준다. 국정원법은 “제8조(조직 등의 비공개)”는 안전보장을 내세워 조직을 비공개 한다. 국정원에서 어떤 부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누가, 어떻게 간첩 사건을 조작했는지 유우성 씨는 알 수 없다.

“몇 사람이 간첩조작에 가담했는지는 몰라요. 꼬리 자르기로 몇 명만 처벌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언론에서는 간첩조작이 가해자 몇 명 승진을 위해서 독단적으로 한 일이라고 해요. 그런데 사실 조작이라는 게 독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2015년 10월 대법원 판결로 유우성 씨가 고소했던 증거조작에 연루된 가해자 한 명은 징역 4년이 확정됐다. 그러나 나머지는 적게는 벌금 700만 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심지어 이들 중에 한 국정원 직원은 여전히 제주도에 있는 국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기소와 공판을 담당했던 검사인 이문성, 이시원 검사는 불기소됐다. 검찰에서 해당 검사들이 ‘국정원 직원들이 제출한 조작 증거에 속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재판에 제출할 증거를 조작했던 국정원 직원 일부는 형사재판을 통해 처벌받기라도 했다. 그러나 합동신문센터에서 동생 유가려 씨에게 가혹행위를 했던 국정원 수사관 두 명에 대한 재판은 2020년에 시작이 됐는데도 2023년 2월 현재 아직도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이 진행 중이다. 그사이 검사는 다섯 번이 바뀌었다. 판결을 앞두고 판사도 바뀌었다.

국정원 수사관들은 가혹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몸 앞뒤에다가 ‘화교 유가려’라고 붙이고 모욕을 주며 끌고 다녔다는 게 과연 21세기에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어요. 자기네들이 한 게 아니라 본인이 붙이고 싶다고 해서 붙이고 돌아다녔다는데. 그게 국정원 직원들 법정 진술이에요. 때린 적이 없는데 볼이 빨개지고. 합동신문센터에서 유가려의 얼굴이 맞아서 퍼렇게 됐다, ‘눈물자국을 봤다’ 하는 북한이탈주민 증언도 있어요. 그런데도 ‘어떻게 볼이 빨개진 건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차폐막’이 가리운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지치지만 그는 그 책임을 묻는 재판의 한가운데서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각주>
(1) 합동신문센터는 2014년 7월 북한이탈주민센터로 그 명칭을 바꿨다.
(2) [단독] 남파간첩 절반이 ‘탈북민 위장·연계 간첩’, 김당, UPI뉴스, 2020.06.11.
(3) 가려막는 막. 흔히 재판에서 증인 등 진술인의 보호를 위해서 사용되지만 국정원 직원들의 재판에서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하여 국정원 직원의 얼굴을 가리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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