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커넥션, 이 거대한 외설의 순환고리

[석궁연속기고](5) - 외설의 순환, 외설의 구조

카우치가 더 외설스러운가, 법/관이 더 외설스러운가

외설스럽다, 외설obscenity이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인 한,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이 하두 많은 나라라는 뜻에서 대한민국은 외설공화국이다. 왜 이렇게 무대에 올릴 수 없고, 무대에 올라서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들이 많을까? X파일이 많은 외설국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어난 성균관대 김명호 교수 사건도 외설스럽긴 마찬가지다. 판사들은 고발인 김명호 교수 앞의 높은 단상에 앉아 교육자로서의 자질 운운하며, 한두 살 애도 아닌 김명호 교수에게 가정교육을 시키기만 했을 뿐, 무대에 올라서서 진실 게임을 연출하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김명호 교수 사건 주심판사는 인터넷무대에 올라서긴 했지만, 그 무대 위에서조차 인간의 얼굴 뒤로 법관의 가면을 쓰고 나타나 그들 특유의 끼리끼리 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다가 누리꾼들의 비판 여론에 밀려 무대 뒤로 외설스럽게 사라졌다. 법관의 가면, 이 얼마나 외설스러운가? 카우치가 더 외설스러운가, 법/관이 더 외설스러운가 라고 물어본다면, 필자는 법/관이 더 외설스럽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법은 국가와 자본의 충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명호 교수 사건은 X폴더 안에 들어 있고 그 폴더에는 여러 가지 파일들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그 폴더는 컴퓨터의 오작동이 아니라 외설스러운 커넥션들 - 끼리끼리주의, 담합주의, 학연/지연/혈연, 조폭의식, 동종교배의식 등 - 때문에 열 수 없다. 김명호 교수 또한 이 열리지 않는 폴더의 희생물이라는 것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김명호 교수가 재임용에 거부된 것은 김 교수가 수학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것에 있다. 지난 날 교실 밖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을 두고 “저런 것들도 학생이냐, 죽이고 싶다”는 식으로 말한 것, 이러한 것들 때문에 성대 학생들이 김 교수에 대해 품은 불만, 법원이 이것을 걸고 넘어져 김 교수의 교수자질을 문제삼은 것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수학 문제의 오류를 대학 당국에 지적했다는 것, 그것도 다른 재단이 아니라 삼성이 재단인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고 무대에 올릴 수 없는 것을 무대에 올려 만인이 다 알게 하고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데 있다. 김 교수의 교수로서의 자질 부족 문제는 바로 이 문제가 치환된 것에 불과하다. 외설은 감추어야 제 맛이 나는데, 그 외설성을 만 천하에 공개하고 공론화 했으니 김 교수가 괘씸죄에서 무사할 리 만무하다.

신성불가침의 영역, 금기의 극한

우리 시대에 대학과 법원은 신성한 영역에 거주하고 있다. 아니 차라리 금기영역이라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신성의 측면에서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자기들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신성한 대학에서’, ‘신성한 법정에서’ 등등 우리는 얼마나 신성이란 단어를 뇌까리며 살고 있는가?

금기의 극한을 건드리는 일은 절대 불가한 일이다. 금기의 극한에 있는 대학 당국/재단, 법원은 아담이 함부로 따먹을 열매가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아담도 아닌, 일 개 대학교수인 사람이 그 금단의 열매를 따먹으려 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대학과 법원은 끈끈하고, 예의 그 ‘신성한’ 커넥션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일반인들은, 그리고 인터넷 위의 평범한 누릿꾼들은 그 금기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다. 분위기 싸한 그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여 놓아 본 적이 없다. 해서, 우리는 김 교수가 석궁으로 해당 판사를 의도적으로 쏘았는지 어쨋는지 알 길이 없다. 현장에 없었다는 알리바이가 우리 평범한 일반인만큼 잘 통하는 곳이 있을까? 우리들은, 그 알리바이를 충족시킬만한 위치에 있듯이, 그 신성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구축한 커넥션에서 늘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언론들은 살인미수죄로 김 교수가 유치장에 갔다는 말을 하다니, 알리바이 100% 충족의 우리들에게 무슨 판단을 기대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주심판사의 자기변명 편지에 누릿꾼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은 특권층들의 현장에 있어본 적이 없고, 그 신성한 현장에서 배제된 일반인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주의적인 현장에서 사회적, 경제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현장의 알리바이를 충족시키는 우리들에게 살인미수라는 말에 동의하라고 강요하는 것인가.

이정렬 주심판사는 스스로를 진보적이고 법조계에서도 튀는 판사라고 했다. 이에 비한다면 지난 날 민주화운동 시기에 시위하는 학생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김명호 교수는 반민주적이고 튀기는커녕 반진보적인 사람일 것이다. 언뜻 보면 이정렬 주심 판사나 김명호 교수는 대칭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 교수에 비해 그렇게 튀고 진보적인 주심판사에게 누리꾼들은 왜 동정표를 던지지 않는 것일까?

사실 보면 이정렬 주심판사와 김명호 교수는 비대칭관계에 있다. 대학과 공유하는 신성한 커넥션을 유지하기 위해 김 교수의 교육자적 자질만 문제삼고 그것을 비호하는 주심판사가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했으니, 그러한 진보는 이제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한 진보 자체가 허구라는 것을 스스로 자인한 것 아닐까?

삼각, 사각, 오각동맹식 담합주의 외설의 순환

민주화로 민주주의를 덮어씌우기 하는 주심판사의 행동에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과거의 진보를 무기로 현재의 그 비민주주의적인 판결을 덮으려 하고 정당화하려는 외설스러운 행동, 그리고 그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대학 - 법원 사이의 신성한 커넥션이라는 예의 그 ‘담합주의’에 대해 우리 일반인들! 은 치를 떨 뿐이다.

김 교수의 지난 날 학생들에 대한 비판은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 진보적인 주심판사는 자신의 판결에 의해 자기들의 특권적인 커넥션을 더욱 튼튼하게 유지할 뿐더러 그것을 통해 사회의 민주주의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법부가 민주주의의 진전에 기여하지 못하는 마당이라면 응당 김 교수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 주심판사의 진보는 민주주의를 훼손시키는 알리바이이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1년 전 우리는 황 우석 사기사건에서 드러난 정부-국회의원-자칭 과학자-언론-서울대 사이의 담합주의, FTA를 둘러싼 정부-재벌-언론-연구소-미국 등의 삼각, 사각, 오각동맹식 담합주의 등 숱한 외설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안에서 순환하고 있다. 그들의 담합주의에 절망하고 죽어나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땅의 민중이고 김명호 교수이며 상당 부분 교육자적 자질 핑계로 해직된 수많은 교수들이다.

새로운 중세시대를 결연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 거대한 외설의 서사구조, 외설의 순환고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절딴 낼 수 있는 것일까?
덧붙이는 말

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본 지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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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렵구만

    뭘 그리도 어려운 문자 섞어 넣어가며 빙빙 에둘러 얘기하는거요.
    시정의 범부에 불과한 내 눈엔
    편집위원의 글 자체도
    외설스럽다고 얘기하는 그 외설의 서사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소.
    정말로 이런 더러운 구조와 고리를 부수고 잘라버리고 싶다면
    이른바, 유식(?)하게 쓰는 이런 글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이오.

    한 가지 더, 누릿꾼ㅡ>누리꾼, 절딴ㅡ>절단

  • 무슨뜻?

    어렵네요..
    외설.. 자극적이네...

  • 소걸음

    이득재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시원하군요. 이 사건은 황우석 사건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도덕적 감성지수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 문제의 비중을 너무 낮게 취급하는 것 같군요. 실은 이 사건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있고, 또 그 때문에 결국은 진실에 대해 침묵하고, 그 침묵과 굴종이 하나의 체제로서, 그리고 법률적 합리성으로서, 사회적 관습으로서 지속되고 강화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면 튄다고 하며, 버릇이 없다고 하며, 무슨 자질이 없다고 하며, 반사회적이라고 하고, 융통성이 없다고 하고, 같이 술마시기 불편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정신과 관행, 제도가 확립되면 어떤 사회도 밝고 건전하며 효율적일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못되냐고 묻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단지 경제적인 요인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우리 주위에 너무나도 만연되어 있는 이 악령같은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른바 <신성주의>죠.
    그러나 김명호 교수님의 대응에는 약간의 문제 - 물론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지만 - 가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님은 인간과 그 인간이 만든 체제를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치나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행을 내포하고 살아간다는 점을 느끼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인내심이 생기죠. 그런 경험이 없으면, 분노가 세상을 불태울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혁명과 개혁의 차이은 이런 경험의 깊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명호 교수님은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방법을 사용했죠. 물론 그 방법 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울대 미대의 김민수 교수님은 10년동안 쫓겨난 대학의 연구실을 그냥 하염없이 지켰습니다. 석궁은 사용하지 않고, 그 별볼일 없는 재판과 말만 사용했습니다. 서울대의 권위주의, 신성한 교권주의는 10년동안 그가 제발 학교에서 조용히 나가주기를, 그래서 전기도 끊고, 물도 끊고 정말 유치한 수단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어서, 수위를 시켜 강제로 내쫒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서울대가 지킨 최소한의 양심과 품위였습니다. 그리고는 10년이 지났을 때, 더 이상 그가 혼자 식당에서 밥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볼 수 없었죠. 그것은 양심이라기 보다, 밖에서 서울대를 어떻게 볼까 하는 그런 것에 대한 우려였습니다. 정운찬 총장때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정운찬 총장이 단 코멘트는 서울대의 불편한 심정과 진심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선생은 교수사회의 관행에 따를 필요가 있다, 아마 그런 내용으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권력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지성과 양심, 용기를 존중해야 하는 대학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대학>은 제도와 물질에서 엄청난 진보를 거듭하고 있지만, 정신은 정말 조악합니다. 사실 서울대는 김민수 교수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10년입니다. 한 인간에게 가장 활동적이고 꿈많을 30대중반과 40대초를 김민수 교수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그 개인의 고통에 대한 진실한 사죄, 참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앞으로도 계속 교수하고 싶으면 잘 생각해야 할 걸! 이런 식의 충고를 했습니다. 참, 거만하고 부패했죠. 사실 김민수 교수 사건은 단지 그 개인이나 학과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한국 대학의 정신적 수준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서울대로서는 당면한 급박한 문제였죠. 그 때 그 문제를 사법적인 문제로 적당히 해결하고 넘어가자, 그 다음 황우석 교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 서울대 위기입니다.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둔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우리의 불행에 대해, 김민수 교수가 던지는 메시지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단히 어렵죠. 억울한 이 세상, 왜 신은 불로 심판하지 않는 것일까? 이 소돔같은 도시와 인간의 심장들, 왜 돌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것일까? 김민수 교수도 관악산 위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10년동안 마음속으로 흐느끼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정의롭지 않지만, 참을 데 까지는 참으면서, 하나씩 고쳐나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그러나 저로서도 이런 일은 너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옥중에서 백인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차라리 인종주의자들이 낫다. 너희 반인종주의 백인 친구들은 참으라고만 말한다. 그런데 언제까지 참으라고 하는 것이냐. 너희 백인친구들은 결국 우리 흑인들의 행동을 막는 아편같은 존재들이다. 아마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참 어려운 세상입니다.

  • 이득재

    한국 대학의 미래? 없을 것 같습니다. 담합주의, 집단이기주의로 가득찬 곳이 대학입니다. 지식생산능력은 증발해 버렸고 교수들은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습니다. 약간의 불씨만 남아 있는 곳, 그 곳이 대학입니다. 할 말 참으로 많지만, 이 숱한 커넥션들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할텐데, 대학사회를 장악한 신자유주의, 자본의 힘이 너무 강하군요

  • 테스터

    테스트중입니다.

  • 강토

    과연 판사의 권위가 깨져야만 올바른 사회가 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 판사의 권위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모든 권위가 다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회.. 그게 과연 기자님이 원하는 사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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