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오전 하버프라자에 마련된 한국 기자실에선 때아닌 기조연설 문구와 관련해 일대의 대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에 따라 '해프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실책'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정부의 농업협상에 대한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사건이다. 농민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선것은 너무 당연하다.
14일 오전 기자 브리핑에서 이날 오후 3시 30분 경으로 예정됐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연설문 초안이 연설에 앞서 미리 공개됐다. 이 문서에는 "농업을 포함해 아직도 국내적으로 민감한 일부 부문이 여전히 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의 진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신축적으로 대응 할' 용의가 있으며 협상에 기여할 준비가 돼있다"고 밝혔다.
또한 동 기조연설문는 "모든 협상 분야에서 균형 잡힌 성과를 확보하는 게 성공적인 협상 타결의 관건"이라며 "특히 한국으로서는 NAMA(비농산물 시장접근), 서비스, 반덤핑 협상에서의 가시적인 성과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폭풍의 핵으로 등장한 부분은 '신축적으로 대응할 용의가 있다'라는 문구였다. 전후 맥락을 고려했을 때 다른 협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 협상의 진전을 위해서는 '농업부문을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자실에서는 이 문장의 '신축적'이라는 의미가 '양보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냐'라는 질문들이 이어졌고, 최혁 주 제네바 대사가 이에 해명에 나섰다. 최혁 주 제네바 대사는 "외교 상 흔히 쓰이는 표현"이라며 "균형있는 협상을 위해 농산물 부문이 무척 어렵지만 타협과 균형을 위해 양보 가능성을 열어놓겠다는 것"의 요지로 설명했으나 이 또한 '왜 농산물만이 구체적인 단서로 거론된 것이냐'는 의문을 해소할 수 없는 조삼모사식의 맥락일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외교부가 내놓은 연설문은 논란 끝에 1시간 30분 여 만에 논란의 핵심 대목이 삭제 되는 것으로 결론났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연설문 초안이 농림부와 사전 협의가 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이런 헤프닝 사건의 전후로 박홍수 농림부 장관은 14일 마이크 조헨스 미국 농무장관을 만나 농산물에 대한 과대한 관세 감축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한국이 속한 농산물 수입국 그룹인 G10은 13일 기자회견을 갖고 "협상에서 각국의 다양성과 농업의 다원적 기능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한 바 있다. 정부 협상단 내에서 각자가 '알아서'하는 행보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또한 김현종 통상교섭부 장관은 한국 정부의 통상 교섭의 수장으로 APEC 회의 당시 스위스 합의 초안을 이끌어 냈던 당사자로, 한국에서는 '외교 교섭의 수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번 GATS 협상의 의장 역할을 하는 김현종 본부장의 연설문에 '신축적 협상'에 관한 내용이 언급 된 것은 사실 농림부와 같이 해당 부처와 다르게 흘러가는 정부의 주 협상 당사자들의 시각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 당연히 제기될 수 있다.
이번 연설문 삭제 헤프닝은 결국 한국 정부의 협상 태도에 있어 공산품을 잡되 농업은 내줄 수 있다는 식의 '패를 다 보여줬다'는 평가를 벗어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는 '농업을 재물로 삼는' 정부 협상단의 시각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점과 관련 핵심 장관에게 조차 협의가 없다는 내부 소통 절차상의 허점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으로 한국 협상단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한편 전농 홍콩 투쟁단은 이날 긴급 성명을 내고 "홍콩 투쟁단에 참가한 농민들은 부채더미에 신음하면서도 이곳 홍콩에까지 와서 WTO의 부당함과 한국 농업의 절박한 현실을 세계 각국에 알리면서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만들고자 투쟁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이같은 농민들의 절규를 버팀목 삼아 상대국과의 협상에서 강력한 농업보호 의지의 배수진을 쳐도 어려운 조건인데, 협상을 시작하자마자 기조연설을 통해 농업분야의 양보를 운운하고 있는 정부를 어떻게 국민의 정부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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