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10년 만의 대결집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5) - 운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편집자 주] 지난 3월 7일, 오키나와의 대규모 기지반대 집회 이후, 격주간 <노동정보>에 실린 기사를 이영채님이 번역해서 보내주셨습니다.

예상을 뛰어넘은 대결집

키노만 해변공원에 3월 5일, 3만 5천명의 현민이 모여들었다. 95년 10월 21일 당시 오타마사히데 현지사 이하 8만 5천명의 현민이 모여들었던 바로 이장소. 미군병사의 소녀성폭행사건에 대한 항의를 시작으로, 쌓이고 쌓인 기지반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 미일 양정부을 진동시킨 이후 약 10년 5개월 만이다. [후텐마기지이전의 밀실협상, 연안안에 대한 현민총궐기대회]는 미군의 세계적인 재편성 계획에 따라 주민배제, 밀실협상으로 미일 양정부가 기지이전안을 합의(04년10월)한 것에 대해 분노하며, 새로운 기지이설안에 대한 현민들의 명확한 [저지] 의지를 과시하였다.



축제분위기였다. 노인, 젊은이, 아이의 손을 잡고 나온 부부, 1가 4세대의 총출동, 젊은 그룹, 지역공동체그룹, 노조원, 물산회사원 전체의 등장 등 각 분야의 다양한 사상과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아이디어로 자기주장을 표현하였고, 집회장은 울긋불긋한 칼라로 물들였다.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후회를 남기는 기지건설 절대반대]의 횡단막 앞에서 키노완 마츠다구의 어느 여성은 "이런 큰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95년 이후 처음이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바로 옆의 여성들은 한결같이 "왜 이나미네 현지사는 참가하지 않는가", "꼭 참가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라고 불만을 토했다.

국제정치학자 미야자토 세켄(대외문제연구소 대표)씨는 "제가 해변공원의 현민대회에 참가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처음은 95년 폭행사건의 현민대회였고, 당시에는 현지사도 참가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번에 현지사가 참가하지 않았지만, 3만 5천의 현민이 참가하였고, 이것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숫자다. 대회는 충분한 자기 역할을 해냈다"(오키나와 타임즈 3월 6일)

이번 대회의 목적은 대회 타이틀 그 자체다. [후텐마비행장 캠프 슈와브 연안안(이설) 반대]. 이것은 현의회에서 여야당의 함께 결의한 의견서의 타이틀이기도 하다. 95년처럼, 초당파, 도지사도 참가한 [오키나와 섬 전체의 총궐기]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대회 실행위원회는 주장했지만, 현의회의 결정을 존중하였다. 일관되게 해외 이전을 주장해온 미야자와 씨도 대회 타이틀의 불명확성에는 매우 불만이다. 하지만, 현의회의 여야합의에도 불구하고 자민당, 공명당의 여당측은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고, 이나미네 현지사도 "나도 주민과 같은 입장이다"라 말하면서, "초당파가 아니기 때문"이라며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나미네 현지사가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것은, 작년 2005년 7월의 킨쵸 캠프 한센지역에서의 도시형 전투훈련 시설 [렌지4]에서의 대규모 훈련에 반대하는 현민항의집회에 참가하여, 데모 등에서 발언을 한 것이 정부 자민당을 격노시켰고, 그 후유증의 결과라고 현지 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현민들의 기지이전 반대 의지를 강하게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미야자와 씨는 이번 대회가 95년의 총궐기대회와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다른 의미가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역 내 기지반대 투쟁의 결합

현의 기지반대운동진영은 04년 8월 [오키나와국제대학 미군헬기추락사건에 대한 항의 키노만시민대회(9월)]에 현민 3만명이 참가(이때도, 95년 현민대회 이래의 대결집이라고 보도되었다)한 것이 운동의 새로운 분기점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일본정부, 미군, 총영사관은 이번 대회가 섬 전체의 미군기지 반대투쟁으로 발전할 것인가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기타하라이와오 방위시설청장관, 야마자키 자민당오키나와 진흥위원장 겸 안전보장조사회장이 일부러 대회 전날인 3월 4일 토요일에 현을 방문하여, 계속해서 이나미네 현지사, 시마부크로요시카즈 시장과 만나서 연안안에 대해 설명하고, 미야키아츠미 카테나촌 촌장과 (이전기지의)자위대와의 공동사용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회담을 했던 것도 현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헬기추락 항의집회 때, 사고 그 자체의 충격과 함께 미군이 오키나와국제대학을 마치 점령군처럼 차단한 상태에서 사고지에의 접근을 허가하지 않았던 것에 이곳 현지 언론은 강한 어조로 연일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였다. 당시의 긴박한 정세와 비교하면 이번 대회 이전에는 주민들의 분노의 표현도 매우 약하였고, 사전에 분위기도 별로 뜨지 않았다.

또한, 95년 대회 이후, 현민들은 "우리들의 손으로 기지를 근본적으로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희망을 가지고 당국과 미군 기지에 대한 공격에 나섰지만, 최근 10년간, 정부의 오키나와현 진흥정책이 오히려 효과를 발휘하여, 오키나와의 현민은 서로 대립하고 양분되어 버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연 대결집은 가능할 것인가. 이번 대회에 앞서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불안은 대회가 준비되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현민들은 미군재편성의 의도가 [부담경감]의 문제가 아니라, 9.11 이후 미국의 세계전략의 중핵으로서 오키나와기지의 유지 강화, 자위대와 미군의 일체화를 위한 계획의 일환이며, 현재 오키나와의 장래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기라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번 현민 대회의 특징은 노조나 시민단체 만이 아니라, 기지주변을 중심으로, 또는 미군기지의 정리 재편에 따라 부락의 주변에 새로운 기지가 생기게 되는 북부지역의 작은 부락에서 미군기지반대운동을 계속해서 해 왔던 사람들이 대회에 대거 참여한 것이다. 오키나와에 이처럼 다양한 기지문제와 반대투쟁이 있었는가 놀랄 정도이다.

마츠다구의 주민들은 토마츠크노부 구청장을 시작으로 양계업자, 여성단체, 청년단체, PTA 등이 버스를 대여하여 참가하였다. 마츠다구는 후텐마대체기지시설의 건설지로 예정되고 있는 캠프슈와브 연안에서 서남 지역으로 3km 떨어진 지역이다. 이 지역은 미일 양정부의 합의안에 따르면, 헬기와 고정쌍기의 육지로의 진입로 바로 옆에 위치하게 되어 구 전체가 반대투쟁을 하고 있다.

마츠다 지역에서 동북쪽의 (대체기지건설지인) 헤노코만까지의 동해연안을 따라 나코시의 히사시, 토모하라, 헤코노의 소위 지역 3구가 이어지고있다. 게다가 북쪽으로는 오우라 만을 따라서 후타미 이북 10구라고 통칭되는 후타미, 오우라, 세타카, 테이마, 미하라, 아베, 카요우 등 10개의 집단 부락이 이어지는데, 이 지역의 각 구의 행정위원회가 연안안에 대해서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번에 처음으로 전13구 합동으로 기지이전 반대결의를 채택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비록 대회가 야당일색으로 되었기 때문에, 전 지역구민이 함께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헤노코의 텐트촌에서 열심히 반대투쟁을 하고 있는 주민, 어민, 그리고 주민운동 그룹이 현수막과 깃발을 들고 이번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헤노코만의 종래안(현행안이라고도 불림) 수락여부를 둘러싸고 주민 간의 갈등이 발생하였고, 분열해 왔던 10구에서도 지난 달 2월에 [헬기기지는 필요없다. 후타미 이북 10구의 모임]이 4년 만에 부활총회를 열었고, 이날 도쿠지 공동대표는 "연안안만이 아니라, 헤노코에는 어떤 기지도 용납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10구보다 더 북쪽에 있으며, 북부훈련장이 있는 코도구에서는 헬기패트 이설반대운동을 하는 주민들이 "204종의 천연기념물, 해변에서만 자라는 고유한 종류들이 확인된 이 지역의 천연자연을 파괴하지마라"고 주장해 왔다. 게다가, 마츠다구의 남쪽에 인접하고 있는 키노자구의 어민은 측량조사저지행동을 일으킨 명예로운 [실적]을 가지고 참가하였다. 또한 바로 서남쪽에 있는 킨쵸의 이케이구의 주민들은 도시형훈련시설건설을 둘러싼 반대투쟁을 전개해왔다. 기지반대투쟁을 전개해 온 수많은 [풀뿌리단체]들이 이렇게까지 결집한 적은 없었다.

현지 키노만시에서는 이하요이치 시장을 비롯하여 많은 주민들이 참가하였다. 오키나와국제대학에의 헬기추락사고를 계기로 [눈이 뜨인] 젊은이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헬기가 추락하여도, 현민총궐기이후 10년이 지나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고 있는 후텐마비행장의 현 상태에 대해서 한 시민단체는 오키나와 독립의 퍼포먼스를 실행하여 [본토에 대한 불신]의 격한 언설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번 대회는 95년 현민 총궐기대회 및 매년 5-6월의 평화집회 등에서 눈에 띄는 외부에서 온 [대군단]의 모습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정부와의 관계악화를 우려한 보수계의 여당, 현 당국, 현의회, 시촌의 촌장, 자치체의장단만이 빠진 현민이 일치하여 후텐마기지의 대체시설 [연안안] 반대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한 장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연안안 반대는 확고한 현민의 총의가 되었다]라는 이번 대회결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연안안 수정은 없다고만 밝히고 있다. 7일부터 시작되는 미일 양국의 심의관급 협의에서는 해병대의 괌기지 이전 비용을 일본이 부담하는 문제를 토의하고, 한편 현에서는 마키노히로타가 부지사이하 간부가 도쿄에 올라가서, 고이즈미 수상과 이나미네 현지사와의 대표회담을 준비한다고 한다.

만약 이 대표회담에서 이나미네 현 지사가 주민의 반대를 이유로 지금까지의 입장(역자주 : 일방적인 대체시설 건설반대, 주민과 미군의 공동시설, 15년 한정안) 입장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일본정부는) 현지사의 허가/인가 권한(역자주 : 오키나와현의 내외의 바다 및 육지의 개발을 위해서는 현지사의 허가 및 인가가 필요)을 박탈하는 특별조치법 제정의 가능성도 있다. 미야자토 씨는 다음과 같이 이번 대회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번 대회는 운동의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기사제공 - 노동정보 691호, 2006년 3월 15일

번역 - 이영채

역자주 : 오키나와의 남쪽 한가운데 자리잡은 후텐마 공군기지. 95년 이 기지에 주둔하던 미군이 초등학생을 강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60여 년 동안 수만 건의 미군 범죄로 고통받던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주민 8만 명의 집회로 인해 미•일 정부는 결국 기지이전에 합의했다. 첫 이전지로 결정됐던 헤노코 지역 주민들의 끈질긴 반대 시위로 해상안이 포기되었고, 작년 10월 30일, 일본의 방위청은 미일안전보장협의위원회가 합의안 연안안(전체 면적의 1/5이 육지, 4/5가 매립)을 발표하였다. 이번 현민대회는 이 연안안에 대한 오키나와주민들의 공식적인 반대를 표명한 집회였다는 측면에서 오키나와 헤노코 미군기지이전 반대 운동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덧붙이는 말

<노동정보>는 1977년 5월 26일에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일본공산당과 혁명마르크스(카쿠마루) 이외의 당파들이 노동운동의 정보를 알리기 위하여 [공동센타 노동정보]를 세웠고, [노동과 생활과 사회를 바꾸는 노동정보]를 발간해 왔다. 현재는 국철해고노동자투쟁의 지지자들과 이론가들, 언론조합의 기자 등이 편집위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유이아키코 님은 오키나와타임즈 편집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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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이

    3만 5천명!
    지금 평택 미군기지반대 집회에 이런 인원이 온다면!
    꿈같이 느껴진다.
    전쟁의 목전에 다다라서야 아니면 평택에 미사일이 터져야
    우리 시민들은 들고 일어설 것인가!
    저들은 소녀의 미군에 의한 성폭행으로 미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낸 바 있다.
    우리는 효순,미선이가 탱크에 압살되었는데도
    그 아이들을 살해한 미군은 무죄선고 받았다.
    살해는 당했는데 살인자가 없다면
    탱크가 지 멋대로 굴러갔단 말인가!
    역사의 기록때문에 일본인들을 예쁘게 볼 수 없는 심정이지만
    그들의 시민의식에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효순,미순이 사건때 모였던 10만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 이전에 평택시민들은 왜 눈감고 있는가?
    함께하자. 함께 미군기지확장 막아내자!
    13,14일 대추리로 모이자. 올해에도 농사짓자!

  • 환경이

    3만 5천명!
    지금 평택 미군기지반대 집회에 이런 인원이 온다면!
    꿈같이 느껴진다.
    전쟁의 목전에 다다라서야 아니면 평택에 미사일이 터져야
    우리 시민들은 들고 일어설 것인가!
    저들은 소녀의 미군에 의한 성폭행으로 미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낸 바 있다.
    우리는 효순,미선이가 탱크에 압살되었는데도
    그 아이들을 살해한 미군은 무죄선고 받았다.
    살해는 당했는데 살인자가 없다면
    탱크가 지 멋대로 굴러갔단 말인가!
    역사의 기록때문에 일본인들을 예쁘게 볼 수 없는 심정이지만
    그들의 시민의식에 부러운 마음이 앞선다.
    효순,미순이 사건때 모였던 10만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나?
    그 이전에 평택시민들은 왜 눈감고 있는가?
    함께하자. 함께 미군기지확장 막아내자!
    13,14일 대추리로 모이자. 올해에도 농사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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