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국면 안에서 독일월드컵 문제를 사고해야"

[기고] 자본, 광장, 서울시 그리고 월드컵 : 월드컵의 문화정치학

서울문화재단은 월드컵 거리응원 행사 민간주관사로 SK텔레콤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붉은악마는 관람하기 좋은 경기장 좌석을 2천석 식 사들이는 등 이미 ‘이익단체’로 변질되어 버린 듯하다. KTF와 현대자동차같이 거대한 재벌그룹들의 비호를 받으며 말이다. 서울시는 시청앞 광장 등 월드컵 ‘응원권’을 기업에 판매했다. ‘Korea Team Fighting’ 구호로 한 몫 잡으려했던 KTF는 4년 전 악몽을 씻고자 독일월드컵을 앞에 두고 SK텔레콤과 격돌했지만 2006년 2월 27일 서울문화재단의 결정으로 스포츠마케팅에서 아웃되었다. 서울시 앞의 녹색광장은 이 명박 시장의 개인소유물로 전락한 것처럼 운영되고 있다.

서울시는 2004년 11월 민중대회를 계기로 해서 잔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종류의 정치집회를 불허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청계천 오픈식 때 전 두환 등 군사독재자들을 초청했듯이, 서울시가 주장하는 바의 그 아파하는 잔디에도 불구하고 보수쪽 대규모 정치집회는 허용했던 것이다.

삼성 X파일 사태, 황 우석 사태에서 보듯이 한국사회는 카우치보다 더 외설스러운 커넥션의 음모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 월드컵의 문화정치적인 지형을 구성하고 있는 붉은 악마, 윤도현밴드,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SK텔레콤 컨소시엄 즉 SK텔레콤, KBS, SBS,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등이 새로운 스포츠커넥션을 공모하고 있는 중이다.

수정란 줄기세포가 배아줄기세포로 바꿔치기 되었듯이 축구에 대한 열정이 자본과 국가의 열정으로 바꿔치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스포츠커넥션 혹은 스포츠의 날조화에서도 시민사회는 배제되었거나 소멸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되면 서울시청 앞이 모자라 도시의 수많은 협곡으로 흩어지면서까지 월드컵을 응원했던 시민들은 축제의 주체가 아니라 축제의 대상으로서 새롭게 동원되고 말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SK텔레콤이나 KTF, 현대가 삼성의 스포츠마케팅에 충격을 받아 벤치마킹하고 베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4년 전 KTF 가 물경 45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쏟아붓고도 원하는 홍보효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일까?

필자는 삼성, 황우석 사태에서 나타난 것보다도 더 외설스러운 스포츠커넥션에서 집 - 거리 - 광장으로 이어지는 해방의 과정이 광장 - 거리 - 집으로 역행하면서, 돈을 위해 자본과 권력이 결탁하는 억압의 과정을 목도한다. 'Buy the way'처럼 공간이 자본의 식민지가 되었듯이 시민들이 월드컵을 열정적으로 응원할 공간, 즉 거리와 광장이 집이나 이 명박 시장 개인소유물같은 사적인 공간으로 변질되고 자본과 권력의 식민지영토로 전락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거세된 공간으로서의 광장

언제부터인지 거리에서 쓰레기통이 없어지면서 거리미화를 명분으로 서울시라는 공간 안에서 정치가 거세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인도를 차도에게 양보했는지 인도 폭은 좁아지고 거리에서 사람들끼리 만나고 접속할 기회가 소멸되었다. 그 흔한 벤치 하나 눈에 씻고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사라지면서 ‘거리’는 정치적인 집회는커녕 시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말았다.

영화 〈What women want〉에서처럼 ‘거리’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공간이었지만 그 공간을 나이키 스포츠화가 독점하였듯이 자본은 거리라는 공간에서 정치를 추방시키고 거세시킨 것이다. 해서, 한국사회에서는 많은 정치적인 집회가 부득불 차도를 점령한 채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도라는 공간이 박탈된 마당에 차도가 그 역할을 대리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정은 광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이 명박 시장이 광장을 사유물로 착각하여 자기 입맛에 닿는 보수 쪽 집회는 허용해주고 나머지 정치집회를 금지시킨다면 말이다. 광장은 본질적으로 ‘양가적이고 카니발적인 공간’이다. 붉은 악마가 거리와 광장을 붉게 물들인다고 해서 광장이 카니발적인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카니발적인 공간은 이질성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 공간에서 Old & New 프로그램처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만나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바흐찐이 말했듯이 새로운 미래의 세계로 열려있는 카니발적인 세계감각이 탄생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그러나 이 명박 시장은 광장을 보수라는 동질성의 공간으로 축소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미래의 탄생은 커녕 과거의 정치적인 행태로 퇴행하고 있다. 거기다가 새로운 미래의 탄생에 참여할 집단주체들을 자본의 이익에 따라 분열시킴과 동시에 시민의 축제를 파시즘적인 새로운 형태의 동원문화로 변질시키고 있다.

파시즘인가, 축제적인 혁명인가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가 보여준 힘은 자율적이고 순수한 열정에서 비롯한 축제문화였다. 그러나 이제 붉은 악마가 주도하는 거리응원, 경기장응원은 자본과 권력의 도구로 변질되고 말았다. 시민들의 카오스적인 열정, 한국팀이 상대방 골문 앞에서 공을 날릴 때마다 맥주 한 캔씩 먹는 게임을 하며 즐거운 축제를 벌이던 모습은 여전할 수 있겠지만 시민들의 이러한 카오스적인 열정 속의 틈바구니를 자본과 권력이 비집고 들어와 열정에 질서를 부여하고 자본의 이익에 따라 열정을 수로화水路化하면서 월드컵축제를 파시즘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사다 아키라가 조르쥬 바타이유를 논의하면서 “파시즘 또한 카오스의 부정성을 교묘하게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아사다 아키라/이 정우 역, 1995, 새길, 66 쪽.)라고 한 말은 우리가 이 쯤에서 깊이 새겨봐야 할 말이다. 서울시가 잔디훼손(카오스의 부정성)을 핑계로 보수세력에게만 집회를 허용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단적인 예다. 또한 붉은 악마는 월드컵을 시민들과 함께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이에 초월적인 위치로 올라가면서 권력화되고 말았다. ‘나와 함께 해보자’가 아니라 ‘나처럼 해 봐’라고 명령하면서(검은 악마 사건) 시민들을 거리응원에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사회는 반공이데올로기의 기치 아래 국가가 주도하는 동원문화에 시달려왔다. 인간의 신체를 거리에서 졸지에 쇼윈도 안의 마네킹으로 급조하던 태극기경례문화, 향토예비군만이 아니라 몸배바지 입은 아낙네들까지 참호에 동원하던 반공이데올로기문화, 선거동원 등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동원문화가 지배적이었던 것이다.

그 후 신세대 등 새로운 문화담론들이 폭발적으로 증대하면서 시민 주체들의 자율성의 공간이 막 형성되려는 순간 그 공간을 국가로부터 대리권력을 위임받은 자본권력이 독점하고 그 우산권력의 비호 아래 축제공간을 스포츠화된 공간으로 형질전환시킴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챙겨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파시즘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강제로 국민들이 동원되던 문화가, 민간부문이나 재벌 등에게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형태의 동원문화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민은 겉으로는 시민주체인 듯이 보이지만 안으로는 자본과 권력의 동원대상, 마네킹으로 추락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가 아니라 ‘생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 냉전이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었다면 포스트냉전시대는 전쟁의 주체가 민간부문으로 넘어가면서 민간군수기업들의 몫이 되었다.(미국의 민간군수기업 PMF가 용병들을 동원하여 이라크에서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작은 정부’라는 구호는 복지국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국가권력을 순순하게 자본권력에게 양도해주는 것도 의미한다.

국가에서 민간부문으로

황우석 사태의 배후에 ‘세포의 민영화’ 문제가 깔려 있고 이 바탕 위에서 온갖 음모론과 섀튼의 특허문제에 대항하는 애국주의의 흐름이 생겨나는 것이지만,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는 만능세포인 줄기세포처럼 시장에게 전지전능한 전권을 부여하고 다시 그 전권을 자본권력에게 양도하며 국가권력은 그러한 자본권력과 외설스러운 커넥션 관계를 수립하는 시스템이다.

과거처럼 국가가 직접 나서서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권력을 통해 대중을 간접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동원문화이거니와 이쯤되면 이제 스포츠의 민영화라고 할 수 있는 사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88올림픽처럼 과거에는 스포츠가 국가가 관리하는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그 관리 주체가 서울문화재단, 서울시, 재벌 등 민간부분과 자본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민간군수기업이 국가를 대리하는 전쟁을 생산하고 있듯이 재벌 등 민간부문이 군수마케팅이 아니라 스포츠마케팅을 구사하면서 국가를 대리하는 스포츠산업을 생산 ․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권력의 홍보전쟁 틈바구니에서, 도시의 협곡으로까지 밀려가면서 월드컵을 응원하는 우리 시민들은 바로 이라크에 동원되는 ‘용병’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군사적인 용병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에 결과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스포츠용병’ 이외에 시민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시민들은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이 은밀하게 짜놓은 홍보전쟁에 동원되어 박수를 치고 고함을 지르는 것 뿐이다.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필자는 붉은 악마를 파시즘적인 동원장치로 파악한다.

일사분란한 행동을 보이는 붉은 악마가 필자에게 주는 이미지는 광장에 카오스적인 개입이나 침범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 ‘질서’ 같은 담론들을 부추기면서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으로부터 위임받은 ‘안전판’ 구실을 톡톡히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축제의 기능이 카오스의 개입에 관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 시민을 ‘붉은 악마’로 만들면서 카오스가 개입할 수 있는 이질성의 공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극기를 휘날리며’나 ‘왕의 남자’ 흥행기록 등에서 보듯이 한국사회는 유례없이 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쏠리는 파시즘문화, 시민들의 혈세로 이루어진 국가의 예산을 ‘문화’를 빙자한 문화조폭집단 혹은 패거리집단이 싹쓸이해가는 패거리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회다. 이것은 물론 전쟁동원, 새마을운동 동원, 대선 시 국민동원 등 지난 독재정권시절의 국가에 의한 파시즘문화의 심각한 후유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시민들의 자발적인 열정으로 형성된 카오스가 월드컵 축제를 통해 분출되고 비일상적인 기간과 공간을 개척하며(독일월드컵에서 한국은 새벽 4시에 경기를 치룸으로써 비일상적인 시간을 개척한다고 이미 예고하고 있다.) 거기서 터져나오는 일상탈출의 기쁨을 자본의 이익으로 환수하거나 바꿔치기하는데 붉은 악마 등 민간부문이나 재벌이 앞장서서 나서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서울시, SKT가 광장을 독점자본에게 팔아넘기고 방송언론이 애국주의 및 국가주의를 선동하며 국가와 자본의 커넥션을 즐기는 배경에는, 세포에서 병원, 교육, 스포츠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민간기업 및 재벌에게 양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국면이 버젓하게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본만 하더라도 복지국가의 틀을, 민간기업을 복지정책에 참여시키는 복지체제로 바꾸면서 시장경쟁원리를 민간기업에 넘겨주고 있다. 이러한 사태가 우리 경우에는 일본처럼 비슷하게 변할 수도 있고, FTA 국면에서 사회 전체로 확산될 우려도 있으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스포츠시장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스포츠‘산업’

필자는 의료 ․ 교육 ․ 복지에서 공적인 책임을 축소시키고 작은 정부론을 주장하며 공공성을 파탄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라는 관점에서 국가와 자본의 공간독점을 바라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월터 레이피버는 하트와 네그리가 『제국』을 쓰기 전인 1999년에 자신의 저서에서 이것을 ‘제국의 팽창’으로 이야기한 바 있는 것이다.(『마이클 조던, 나이키, 지구 자본주의』, 월터 레이피버, 문학과 지성사, 2001, 170 쪽)

1998년 중반, 『포춘』은 조던이 미국 경제에 미친 영향이 100억 달러라고 추산했다. 절반 정도인 52억 달러는 나이키가 벌어들였다. 조던이 리그에 들어온 이래 NBA가 허가한 의류(특히 23번이 달린 의류) 판매로 현금 등록기를 거쳐간 돈은 31억 달러였다. (앞의 책 174쪽)

삼성이 첼시구단 선수복 및 경기장 이용권으로 무형의 수천억 원 이득을 보고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거니와, 필자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재벌이 국가의 윤허 하에 스포츠마케팅으로 무형의 재산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게 된 거시적인 배경으로 세포든 전쟁이든 스포츠든 방송이든 복지든 모든 아이템들을 민간기업이나 재벌 등에게 팔아넘기는 신자유주의, 그리고 이것을 방조하는 국가가 만들어내는 지구자본주의 혹은 제국의 팽창, 민영화의 흐름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레이피버가 이를 두고 ‘새롭고 교활한 형태의 제국주의’라는 표현을 쓰지만 두 번째 필자는 신자유주의 국면에서 형성된 FTA 차원에서 서울시 + SKT + 서울문화재단 + 방송언론사 + 아시아나 항공사 등으로 이루어진 커넥션을 바라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스크린쿼터 축소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월드컵에 대한 자본권력 및 국가권력의 독점 문제가 있어서 따로따로 국밥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동질적인 형태일 뿐이다. 따라서 이번 서울시와 SKT의 작태에 대해서는 시민을 스포츠용병으로 추락시키고 동원하는 사태에 대한 책임만 물을 것이 아니라 FTA 국면 안에서 독일월드컵 문제를 사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최근 노무현 정권은 양극화해소와 FTA라는 ‘서로 모순된’ 두가지 사안을 정권 후반기 정책아젠다로 설정한 모양이다. FTA가 한국사회 양극화를 부추키고 확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146일 동안 이어질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운동과 더불어 100여일 남은 독일월드컵 문제를 반(反)FTA 운동과 ‘접속’시키고, 100여 일동안 그것을 고민하는 일이 더욱 더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덧붙이는 말

이득재 님은 대구카톨릭대 교수로, 참세상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득재(편집위원)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

    여러번 나눠 봤는데.. 동의함다. 어차피 모이고, 광고되고 시장되면 변질 될 것 월드컵 공간으로 치부하는게 아니라 반FTA 운동의 확산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겠네요..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론적으로는 쉽지가 않아서..^^: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