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그러나 너무나 평범해서 지독한 악

[박영균의 철학으로보는세상](2) - 보수화하는 한국사회, 고삐 풀린 욕망 2

평범함의 찬양

보통사람을 부르짖던 노태우 대통령 시절, 평범함은 일상인을 대표하는 기호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일상의 삶을 살아야 했던 우리들은 역사의 짐을 져야했던 80년대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도 충족하지 못한 아쉬움, 80년대의 무거운 짐이 강요했던 그 시대에 대한 원환이 착종되어 있었다. 이제 역으로 우리들은 역사적 책무라는 거대 담론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일상의 삶을 수용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미완의 혁명에 대한 책임의식을 감추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해야 했다. 소소한 일상적 삶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 내 자신의 지극히 평범한 욕망에 대한 승인이자 진솔한 자기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에 대한 사후복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일상의 평범함에 대한 우리의 정당성은 80년대의 역사적 짐이 강요했던 그 억압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오히려 미화되었다. 80년대의 권력과 배제는 곧 역사라는 거대 담론이 만들어온 것이다. 이제, 역사적 짐의 무거움은 영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대중의 욕망을 상품화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어야 하는 대중문화는 이 새로운 일상적 대중들의 욕망을 이미지화고 새로운 트랜드로 만들어갔다.

마치 이순신을 다룬 영화, “천군”처럼 무수한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영웅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자신의 과거 트라우마에 갇혀 있거나 아니면 자기가 느끼는 대로, 자기의 욕망에 따라,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대책 없는 사람들의 행동 속에서 표현되었다. 그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또는 헤라클레스처럼 역사와 대의를 지거나 정의와 진리를 위해 자신의 욕망과 이기성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자기 자신에 너무나 충실해서 자신의 욕망과 이기성에 충실한 사람의 그 대책 없는 행위들 속에서 표현되었다. 그가 영웅이 되었던 것은 그 솔직함, 그 대책 없음에 있다.

적어도 이런 평범함의 찬양,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솔직한 긍정은 억압적이었던 80년대의 역사를 해체하고 그 역사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던 자아와 개인들의 삶을 해방시켜 놓았다. 게다가 영웅적 이미지 속에서 표현되는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의 이분법적 구도 또한 해체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동전의 양면을 표현하는 동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절대선은 언제나 절대악과 손을 마주잡는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선도 순수악도 없는지 모른다. 선/악의 이분법은 절대복종의 ‘신’을 만들고 인간을 그 신의 발 아래 무릎 꿇게 만든다. 여기서 절대권력이 탄생한다. 절대권력이라는 점에서 절대선은 또다른 절대악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꿈꾸는 평범한 욕망들,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꿈꾸는 욕망은 지극히 평범하다. 어여쁜 마누라에 귀여운 아이들을 키우며 약간의 레저와 스포츠, 여행을 즐기며 살기를 바라는 그들의 욕망은 누구나 꿈꾸는 욕망이다. 큰 권력이나 부를 원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해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안락하게 누리고 싶을 뿐이다. 나는 다른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복잡하고 골치 아픈 사회-정치적 의제들을 알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나는 타인을 이용하거나 해치고 싶은 것도 없다. 나는 적어도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를 안다. 굳이 ‘성자’와 같이 내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선을 행할 생각도 없고 ‘영웅’이나 ‘혁명가’처럼 역사와 대의, 사회적 정의를 위해 자신을 받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악’을 행할 생각도 없다.

80년대에는 이와 같은 삶의 태도를 소시민적 삶이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소시민적 삶은 적극적으로 긍정될 뿐만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충실성으로 표현되며 오히려 솔직한 태도로 찬양된다. 누구도 이런 태도를 비난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나는 그 어떤 악을 행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나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자도 의인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인도 아니다. 나는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죄가 있다면 그것은 내 자신의 삶과 욕망에 충실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죄가 아니다.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은 계몽적 전제 군주의 도덕적 명령에 의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런 개인들을 비난하는 자들은 역으로 그것을 통해서 권력을 꿈꾸는 ‘선’일 뿐이다. 소위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의 권력욕이 그러하며 ‘선’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진 80년대의 단죄와 배제의 논리가 그러했다.

솔직함, 뻔뻔스러움 또는 꿈의 상실

그러나 우리의 평범한 욕망, 그것에 대한 우리의 솔직함이란 무엇인가? 내가 가진 욕망은 무엇인가? 평범한 회사원이며 공장의 노동자이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아내 또는 남편, 어버이들이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소박한 꿈에 장애 요소가 되는 것은 언제나 ‘돈’이다. 그 놈의 돈 때문에 나의 일상은 자꾸만 비루해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돈 때문에만 나의 소박한 욕망이 비루해지고 있는 것일까? 내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다. 아파트와 자동차는 필수이고 해외여행도 해야 한다. 그러나 남에게 기죽지 않으려면 강남의 타워밸리스는 아니더라도 33평의 아파트에 중형 자동차, 몇 가지의 명품 옷을 입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경쟁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모두가 이 욕망을 충족할 수는 없다. 경쟁은 필연적이다. 누군가는 가지지만 누군가는 가질 수 없다. 엄혹한 경쟁 사회에서 내 욕망에 대한 솔직함은 어느새 무한 경쟁에 대한 승인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전환된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겠다는 데,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을 가지고 내가 쓰겠다는 데 그것을 비난하는 것은 ‘선’을 가장한 ‘독단적인 권력’이다. 그래서 난 내 자신의 삶과 욕망에 충실할 뿐이다. 여기서 솔직함은 뻔뻔스러움, 또는 자신의 이기성에 대한 충실한 변호로 전락한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들조차 이런 식의 뻔뻔스러움을 솔직한 자기감정과 욕망의 표현으로 받아들인다. 거기에는 자기가 가진 욕망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없다. 여기서 사유는 중단된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이자 자기 확신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긍정과 자기 확신을 표현하는 매체들이 넘쳐난다. 자기 욕망에 대한 긍정과 욕망의 다양성, 풍요로운 삶에 대한 욕망은 한겨레신문의 ESC코너에서 흘러넘친다. 거기에는 오늘날 사람들이 꿈꾸는 욕망이 있다. 젊은이들은 이 욕망을 자기 욕망으로 간주하고 그 욕망의 실현을 위해 살아간다. 거기에는 삶의 가치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성찰이 있지 않다. 거기에는 다양한 물질적 욕망과 풍요의 욕망이 넘쳐나고 있다. 각종 여행과 자동차, 먹거리와 와인 등, 각종의 욕망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ESC’일 뿐이다. ‘escape’(도피, 도망)의 준말인 ‘ESC’가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피하고자 하는 것, 도망치고자 하는 것은 우리 현실일 뿐이다. 그것은 냉혹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일상을 가리고 그것을 은폐하는 환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충족할 수 없다. 이미지와 환상으로 우리의 실재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 환상을 벗어나 우리가 직면하는 실재는 너무 냉혹한 사막일 뿐이다. 무한경쟁의 냉혹한 생존의 장!

그러므로 여기에는 꿈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꾸는 꿈을 가로막는 것은 내 자신의 욕망이다. 그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상품의 욕망이며 화폐의 욕망이다.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최대 권력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사람들은 ‘화폐’를 자신의 욕망으로 꿈꾸고 그 욕망을 위해 ‘화폐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그 화폐를 생산하는 것은 ‘자본’이다. 그래서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필요한 화폐에 대한 욕망은 끊임없는 좌절을 낳을 뿐이다. 그 실재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꿀 수 있는 꿈은 ‘부동산 투기’ 또는 ‘주식 투자’, 각종 ‘펀드’같은 경제학자들이 ‘투자’라고 부르는 ‘투기’이다. 그것은 돈 놓고 돈 먹기라는 합법화된 ‘투기’이다. 그래서 그것은 ‘로또’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또한 꿈이기에 ‘로또’를 꿈꾼다.

이제, 나의 욕망과 나의 인생에 대한 단란한 꿈은 상품 경쟁의 이기적 욕망들로 대체된다. 나의 욕망에 대한 진솔함은 나의 이기적 욕망에 대한 뻔뻔스러움이 되고 나의 본래적인 꿈과 내 생명적 활력은 화폐와 자본의 노예가 된다.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정이 사라지고 ‘고향’은 없다. 믿을 사람이 없으며 나는 불안함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 불안함을 감추는 것은 내가 소유한 화폐의 힘뿐이다. 나는 이 힘을 소유하기 위해 타인들과의 나눔을 포기하고 내가 진실로 하고 싶어 했던 꿈을 접는다. 의학에 대한 꿈은 돈에 대한 꿈으로 바뀌고 법학에 대한 꿈은 판.검사의 권력으로 바뀐다. 그리고 문학과 예술에 대한 꿈은 현실을 위해 접어야 하는 몽상이 된다. 이것은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논리이며 현실적인 판단이다. 이것은 ‘악’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악

그러나 과연 ‘악’은 이렇게 평범한 것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것일까? ‘악’은 ‘악마성’이라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부여된 성질일까? 평범성, 거기에는 ‘악’이 없을까?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을 ‘근본악’, ‘절대악’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그녀가 2차세계대전이 끝난 15년 후, 유대인 학살을 실행했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근본악’의 뿌리를 보았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면서 다음의 두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그것은 첫째, 아이히만이 악의적인 동기나 의도를 가지고 악을 행한 악마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며 둘째, 그는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인지 능력과 자신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화이트칼라이며 상식적인 인간이다. 그는 너무나 평범하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행하거나 어떤 악마적 동기를 가지고 유태인을 학살한 것이 아니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더러운 악당이 아니며 범죄자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명령받지 않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명령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주어진 체제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류의 최대 죄악인 ‘홀로코스트’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악’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아렌트는 그것이 ‘무사유’, ‘사유 없음’이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그 어떤 반성적 성찰도 수행하지 않는, 그냥 주어진 현실과 조건들을 승인하고 그 안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의 그 평범성에 있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와 같은 평범성은 그대로 반복된다. 보수화하는 한국인들은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욕망과 이기성을 승인하고 그것을 미화한다.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당선자는 이 평범한 대중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용주의,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냉혹한 현실은 이미 극복할 수 없는 현실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는 그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일 뿐이다. 그것은 영웅의 이미지와 전혀 다른, 아니 오히려 반대되는 일상적 인간이다. 여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나는 내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했을 뿐이다. 나에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요하지 마라. 나는 이 현실에 충실하게 나의 삶을 살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기적인 생존 경쟁, 자본주의적 적자생존에 대한 승인 - 이것이 이들에게는 합리성인데 - 이 평범한, 그러나 너무나 평범해서 지독한 악을 낳는다.

이런 지독한 악은 2005년 황우석 사건 때 이미 드러났다. 그것은 대중들이 보여준, 너무나 평범해서 단순했던 그 논리 - ‘국익’ - 가 다른 모든 비판과 지성을 마비시켰던 그 사건 속에 이미 존재했다. 황우석이 ‘체세포 복제’에 성공했다면, 그리하여 줄기세포를 가지고 있다면 그가 저지른 ‘난자채취’의 불법성과 비윤리성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그 논리 안에는 오직 국익을 통해서 자신의 힘든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만이 있었다. 다른 모든 가치들은 ‘국익’에 비해 사소하다. 2005년 당시 체세포 복제 실험에서 은폐되었던 각종 비윤리적이고 탈법적 행위들을 폭로한 ‘PD수첩’은 오히려 국민 대중들에게 ‘반역자’가 되었다. MBC는 국민들의 몰매에 못 이겨 징계를 내리고 ‘PD수첩’의 방영을 중단해야 했다. 여기서 대중들의 광기는 악이 된다.

대중들은 당시 국가 과학자였던 황우석의 권력에 동조하여 그 권력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악을 정당화하고 그 악에 적극적으로 공모했다. 이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악’, 다른 모든 지성과 사유를 마비시키고 사람들을 ‘국익’이라는 광기로 몰아가며 황우석에게 한국 내의 절대권력을 부여했던 것은 황우석 개인의 욕망이 아니다. 황우석의 욕망을 형성하고 그것을 실질적인 권력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대중들의 지극히 평범한 악’이었다. 마치 독일의 나찌즘에 열광했던 당시의 독일인들이 그 어려운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지극히 평범한 욕망에서 그런 무시무시한 권력을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 ‘악’은 그 어떤 악보다 무시무시한 악이다.

이 ‘악’이 지극히 평범하다. 지극히 평범해서 이 악은 단순한 선/악의 구분법을 뛰어넘는다. 사람들은 선과 악을 잘 구분한다. 그러나 그 경계가 모호한 악, 특히 그것이 자신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을 때는 악을 악으로 성찰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악은 ‘지독한 악’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중단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과 다른 모든 비판과 회의를 ‘적’으로 만들고 ‘소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사유가 없다. 그것은 너무나 평범해서 도저히 악이 될 수 없으며 너무나 당연한, 자기 명증적인 것이다. 사유는 언제나 회의와 의심이 있는 곳에서, 명백한 충격이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결코 반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반성적 사유, 되돌아 봄, 회의가 없기 때문에 소통이 없다. 그것은 자기 명증적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와 같은 악은 대중들의 평범성 속에서 자라난다. 너무나 평범한 그 일상의 욕망 속에서, 그리하여 그 일상성을 찬양하는 그 평범성 속에서 ‘평범해서 지독한 악’이 자라난다. 외신들은 이번 대선이 ‘더러운 선거’였다고 전한다. 또 개발과 성장, 경제의 논리가 윤리와 가치의 문제를 압도했다고도 평한다. 이런 우리의 비윤리성, 사유 없음, 무반성적 뻔뻔함은 다른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평범성, 우리가 가진 일상적 욕망에 대한 찬양과 그 욕망에 대한 자기반성이나 성찰이 없는 무사유로부터 나온다. 자신의 평범함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그 평범한 욕망의 내밀한 악을 경계해야 한다. 권력과 폭력은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욕망을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박영균 님은 건국대 철학 연구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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