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잠 안 자고 시 읽기

요새는 아무 일이고 손에 통 잡히지 않아 밤을 새우기 일쑤다. 진보 정당이나 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느 정도는 마음을 쏟아 일에 매달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것도 아니다. 대낮에 멀쩡한 사람들이 불에 타 죽어 나가는 세상에서 완전히 등을 돌려야만 나는 내 일터에서 인정을 받는다. 그것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잠을 못 잔다고 힘든 것은 아니다. 갓밝이쯤 되면 슬슬 잠이 오기는 한다. 모래라도 끼얹은 듯한 눈을 억지로 감고 잠이 들었다가 오후쯤에 일어나서 출근을 하거나 모임에 나간다. 아니면 도서관에 가거나 서점에 간다. 그것도 아니면 방에 틀어박혀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다시 말하지만 힘들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힘들지는 않은데, 뭔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기분이 자꾸 날 괴롭힌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개차반 같은 이명박 정권 때문인지 생각해 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고, 오늘 하루도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그냥 넘겨 버렸다는 묵직한 느낌이 뱃속부터 차오른다.

어젯밤에는 잠도 안 오고 하도 마음이 잡히지 않아, 방구석에 이리저리 처박혀 있는 시집들을 그러모아 한권 한권 먼지를 닦았다. 오랜만에 시를 읽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한편 두편 읽다가 결국 또 밤을 하얗게 밝히고 말았다.

본동일기 열 -윤중호

나는 비탈에 산다
아침 저녁, 등산하는 기분으로
올라다니는 산동네지만
장마질 때는, 제일한강교로
슬슬, 물구경다니는 맛도 있고
이틀에 한 번씩은, 옆방 아저씨의
쌈구경하는 맛도 있다.
나는 비탈에 산다.
천 원짜리 미술 준비를 못 한 옆집 주희가
울면서 학교를 가는 동네지만, 비탈에서도
깔깔대면서, 나무는 하늘로 곧게 자라고
푸짐한 이파리를 피워
시원한 그늘도 만들 줄 안다.
나는 비탈에 산다.
사철 응달인 비탈이라, 봄은 더디 오지만
겨울 소식은 언제나 일등으로 오고,
몰랐지? 먹어봐야 입만 아리지만
여기서는 돼지감자꽃도 핀다.
나는 비탈에 산다.
부자 동네의 육십 몇 층짜리 빌딩보다도
더 높은 곳에 사신다.
종일 물받기에 바쁘고 연탄값도
아래 동네보다 10원씩 더 비싸지만, 박씨 아저씨는
10원씩 더 비싼 연탄값 때문에
술값이라도 생긴다.
새까맣게 종일 일해야
삼천 원 벌이지만, 그게 어디냐고
높은 데 사시는 분답게 매사에 열심이시다.
열심히 술먹고
열심히 교회도 다니고
열심히 싸워, 심심찮게 코피도 터지지만,
산동네를 철거할 땐 두고 보자고
연판장도 돌리고
연일 술추렴이 벌어지는
부럽지?
나는 비탈에 산다.


윤중호 시인은 마흔 아홉인 2004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시는 1988년에 나온 시집에 실려 있고 ‘본동일기’ 연작 열 번째 편이다. 실제로 윤중호 시인은 서울 본동에 있는 산동네에 살았던 적이 있다.

본동일기 넷
- 본동에 내리는 비

성님, 모든 게 젖습니다.
아침마다
국립묘지를 다녀오시는, 옆집
할아버지의 보건 체조가 젖고,
또 하루를 공친, 지하철 공사장 아저씨들의
담배 연기가
선술집에서 젖고,
보증금을 20만 원씩이나 넣은
내 사글세 방 앞에 심어 논
호박잎이 젖고, 그 뒤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공터의
풀잎이 젖고,
옆 방 아저씨의 청승맞은 유행가도
따라 젖고, 젖다가는
한강물도 제법 뽀얀 물보라를 튀기면서
젖어갑니다.
성님, TV에서는 한강 수위가 어쩌구
말이 많지만, 제일한강교 위로
대낮에도 불을 켜고 씽씽 달리는 차를 보며
산동네 사람들은, 애기를 들쳐 업고 꾸적꾸적
물귀경갑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습니다.
무섭게 불어 오르는 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야 없지만
깜깜하도록 퍼붓는 장마비도
지랄 맞고 눅눅한 산동네의 답답한 마음들은
적시지 못하는 모양이지요?


‘본동일기’ 연작을 읽으면 자꾸만 용산 철거민 분들 생각이 난다. 몸 하나 누일 방 한 칸 없이 도시를 떠도는 수많은 사람들과, 전국 토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상위 1%의 돼지들이 생각난다. 여전히 서울 이곳 저곳에 몰려 있는 게딱지 같은 집들을 깡그리 밀어 버리고 아파트나 주상복합 건물을 세우려고만 하는 이명박 정부와 서울 시청이 생각난다. 집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으니 집을 위해서라면 사람 몇쯤 죽어도 된다는 해괴한 논리. 아니, 논리가 아닌 살의. 경찰도, 검찰도, 국회도, 정부도, 언론도 모두 한통속이 되어, 이미 죽은 자들을 두번 세번 거듭해서 죽이고 있는 미친 시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면 외부세력이 되고 배후세력이 되어 끝내는 불순세력이 되고야 마는, 정말 사람 돌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시대. 정말 악몽 같다.

스물 네 시간 맞교대 나는 -이한주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면
다음날 아홉 시에 퇴근하고
아침 아홉 시에 퇴근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요일이나 빨간 날이나
또 그 다음날 아홉 시에 출근해야 하는
똑딱똑딱
스물 네 시간 맞교대
내가 일하는 날은
비가 오지 말아야 하고
가을, 단풍이 너무 흐드러지지 말아야 한다
이틀 중 하루는
친구나 선배나 후배나 친척들 누구라도
아프지도 말며 결혼도 하지 말고
그 하찮은 모임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하늘이 이틀에 한 번 자전하는 것처럼
조간 신문도 이틀에 한 번 발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월화수목금토일 대신
짝홀 짝홀로 사는 스물 네 시간 맞교대 내가
사람처럼 산다


용산 살인 진압을 다루느라 그 어느 언론도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는 그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최종 교섭을 앞두고 있다는 강남 성모병원 조합원들도, 이런저런 집회에서 가끔씩 뵙는 GM대우 비정규지회 조합원들도, 홈플러스, 기륭, 콜트/콜텍, 하이텍, 재능교육과 한솔교육, 명지대 공공노조도...... 모두들 여전히 이 악물고 싸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2월이 오면 한나라당이 우리들에게 똥물 끼얹듯 쏟아 부을 무더기 악법, 그 가운데에는 비정규직 고용 연장이라는 지랄 같은 법안도 들어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왜 그들은 멀쩡한 사람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걸까? 선심 쓰듯 툭 던져 주는 2년이라는 시간이면 정말 그 많은 노동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너는 시를 쓴다? -유치환

서울 상도봉 산번지를 나는 안다
그 근처엔 내 딸년이 사는 곳

들은 대로 상도동행 뻐스를 타고 한강 인도교를 지나 영등포 가도를 곧장 가다가 왼편으로 꺾어지는데서 세 번째 정류소에 내려 그 정류소 바로 앞 골목 언덕배기 길을 길바닥에 가마니 거적을 깔고 옆에서 우는 갓난아기를 구박하고 앉아 있는 한 중년 사나이 곁을 지나 올라가니 막바지 상도동 K교회당 앞에 낡은 판자로 엉성히 둘러 가리운 뜰안에 몇 가구가 사는지 그 한 편 마루 앞 내 세째 딸년의 되는 대로 걸쳐 입은 뒷모습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 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 줘

그 상도동 산번지 어디에서 한 굶주린 젊은 어미가 밥 달라고 보채는 어린 것을 독기에 받쳐 목을 졸라 죽였다고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 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 줘

그러나 그것은 내 딸자식이요 손주가 아니라서 너는 오늘도 아무런 죄스럼이나 노여움 없이 삼시 세끼를 챙겨 먹고서 양복바지에 줄을 세워 입고는 모자를 얹고 나설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는 어쩌면 네가 말할 수 없이 값지다고 믿는 예술이나 인생을 골똘히 생각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개같이 지쳐 늘어진 무수한 인간들이 제 새끼를 목 졸라 죽일만큼 독기에 질린 인간들이 그리고도 한마디 항변조차 있을 수 없이 꺼져 가는 한 겨레라는 이름의 인간들이 영락없이 무수히 무수히 있을 텐데도 그 숫자나마 너는 파적거리라도 염두에 올려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한편으로 끼니는 끼니대로 얼마나 배불리 먹고도 연회가 있어야 되고 사교가 있어야 되고 잔치가 있어야 되고 --- 그래서 진수성찬이 만판으로 남아 돌아가듯이 국가도 있어야 되고 대통령도 있어야 되고 반공도 있어야 되고 질서도 있어야 되고 그 우스운 자유 평등도 문화도 있어야만 되는 것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할 테냐 죽여 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 줘

그러므로 사실은 엄숙하다 어떤 국가도 대통령도 그 무엇도 도시 너희들의 것은 아닌 것 그 국가가 그 대통령이 그 질서가 그 자유 평등 그 문화 그밖에 그 무수한 어마스런 권위의 명칭들이 먼 후일 에덴 동산 같은 꽃밭 사회를 이룩해 놓을 그날 까지 오직 너희들은 쓰레기로 자중해야 하느니

그래서 지금도 너의 귓속엔

─ 이 새끼 또 밥 달라고 성화 할 테냐 죽여 버린다
─ 엄마 다시는 밥 안 달라께 살려 줘

저 가엾은 애걸과 발악의 비명들이 소리소리 울려 들리는 데도 거룩하게도 너는 시랍시고 문학이랍시고 이 따위를 태연히 앉아 쓴다는 말인가


사실 이 시를 거듭 읽어도 딱히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굉장히 진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본질을 정확히 짚어 내고 있는 시 같기도 하지만, 당장 시꺼먼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 사람들 앞에서 글쓰기라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일이 참으로 너절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실제로 누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허황된 이야기를 늘어 놓을 때 우리는 버릇처럼 “시 쓰고 있네”, “소설 쓰고 앉았네”라고 말하고는 한다. 얼굴에 철판을 두르지 않고서야 어찌 따스하고 편안한 곳에 앉아 글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도 이제는 진부한 자기 위안이 되어 버린 마당에.

연애에 대하여 -이성복

1
여자들이 내 집에 들어와 지붕을 뚫고
담 넘어간다 손이 없어 나는 붙잡지 못한다
벽마다 여자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여자들이 내 방에 들어와 이불로 나를
덮어 싼다 숨 막혀 죽겠어! 이불 위에 올라가
여자들이 화투를 친다

숨 막힌 채로 길 떠난다
길 가다 외로우면
딴 생각하는 길을 껴안는다

2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들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3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사는 것이 너절하다면 연애 또한 너절한 것이다. 연애란 무엇인가? 무엇이 연애인가? 이렇게 물어보면 아무도 답하지 못하면서 저마다 연애들은 언죽번죽 잘한다. 연애에는 굉장히 많은 모습들과 상황들, 형편들이 있을 텐데 왜 그 많은 것들을 연애라고 다 뭉뚱그려 부르는 건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모든 종류의 연애가 똑같이 품고 있는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물질’이다. 화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셀 수 있고 측량 가능한 ‘조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은 외모나 학벌, 집안 같은 조건을 따지지만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은 다른 조건을 따진다. 어떤 성격은 싫고, 어떤 말투도 싫고, 어떤 옷차림도 싫고..... (장애인은 아니었으면 좋겠고, 이 말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다.) 조건은 말로 그럴 듯하게 표현하면 전혀 물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둔갑시킬 수 있다. “저와 성격이 맞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걸 무슨 수로 판단하는가? 자질구레한 행동과 말들로 증거를 수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것들은 죄다 물질이다. 물질로 이루어지는 주제에 물질적이지 않은 척을 하다 보니 숱한 연인들은 헤어지고 숱한 부부들은 갈라선다. 한때 나는 연애란 성욕과 군중심리가 ‘전부’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욕은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해야 가장 만족스럽게 채워지는 법이고, 다른 사람들 다 연애 하는데 나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은 군중심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연애란 성욕과 군중심리가 ‘대부분’인 어떤 것이다.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드러난다.

부끄러움 -신경현

112주년 노동절
수십 개의 깃발이 입장해도
수백, 수천 마디 투쟁사가 넘쳐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밤낮 없이 일하고 제때 월급 한번 받지 못한
개새끼 씹새끼 예사로 들으며 한국 노동자가 쉴 땐
어김없이 강제 특근에 시달리던,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를 고발하기로 한,
스리랑카 노동자 랄은,
오지 않았다

국채보상공원을 빠져 나와
만경관을 지나 마무리 집회가 잡힌
서문시장에서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정리 집회를 시작할 때 시간은 이미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랄에게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이야기해달라 부탁한 이의 마음이
숯검댕이처럼 시커멓게 타버렸을 때,
랄이 나타났다
왜 이제야 왔어요 물음에
천천히 한마디 한다







신경현 시인은 어쩌면 시인이 아니라 노동자라 불러야 맞을지 모른다. 시집을 보면 ‘2007년 대구로 와서 대구 성서공단노동조합 선전부장으로 일하고 있음. <해방글터> 동인’이라고 나와 있다. 그 많은 이주 노동자들은 지금도 매 맞고 욕 먹으며 일하고 있을까? 남의 나라에까지 돈 벌러 와서? 피부 색깔이 조금 다르고 남한보다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고 해서 이주 노동자들이 자기보다 열등한 인종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냄새 나는 황인종 취급을 받으며 힘들게 일하고 있는 교포들은 그럼 어떡하느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런 게 다 사람 사는 거라구.” 이런 거지 같은 대답을 넙죽넙죽 할 수 있는 이유는 괄시 받고 매 맞으며 일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죽어라 일해서 번 밀린 월급을 통째로 날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속반들이 언제 들이닥쳐 몽둥이 찜질을 할지 몰라 불안하기만 한 하루하루를 보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 역시 그런 일들을 겪어 본 적은 한번도 없지만 이주 노동자들을 둘러싼 현실이 송두리째 달라져야 한다는 것쯤은 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 왜 많은 사람들은 이주 노동자들을 짐승보다는 낫지만 인간보다는 못한 열등한 인종으로 볼까?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가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 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마흔 네 살이라는 나이에 지리산에서 발을 헛디뎌 세상을 떠난 고정희 시인. 지난 세밑에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려 1월 초순이 끝나 갈 때까지 끙끙 앓다가 이게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몸이 아프다는 건 알겠는데 마음이 아프다는 건 또 뭔지 아무튼 드러누워 헛생각들만 되짚고 있을 무렵 이 시를 참 많이 읽었다.

겨울 공화국 -양성우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
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가라앉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부르면서
불끈불끈 주먹을 쥐고
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 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 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쳐서
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지금은 겨울인가
한밤중인가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
삼천리는 여전히 비단 같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날마다 우리들은 모른 체하고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기울이며
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다 머슴이다 허수아비다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
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
물려줄 것은 부끄러움뿐
잠든 아기의 베개맡에서
우리들은 또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가

서로를 날카롭게 노려만 보고
한 마디 깊은 말을 나누지 않고
번쩍이는 칼날을 감추어두고
언 땅을 조심 조심 스쳐가는구나
어디선가 일어서라 고함질러도
배고프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어지럽지만 머무를 곳이 없는
우리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
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모는 자는
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
동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
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
바람아 동지 섣달 모진 바람아
네 쓸쓸한 칼끝으로 지울 수
없다

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하네
담벼락에 붙어 있는 농담거리도
바보 같은 라디오도 신문 잡지도
저녁이면 멍청하게 장단 맞추는
TV도 지금쯤은 정직해져서
한반도의 책상 끝에 놓여져야 하네
비겁한 것들은 사라져가고
더러운 것들도 사라져가고
마당에도 골목에도 산과 들에도
사랑하는 것들만 가득히 서서
가슴으로만 가슴으로만 이야기하고
여보게 화약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야 할걸세
이럴 때는 모두들 눈물을 닦고
한강도 무등산도 말하게 하고
산새들도 한번쯤 말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 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걸세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진달래 진달래 진달래들이 언 땅에도
싱싱하게 피어나게 하고
논둑에도 밭둑에도 피어나게 하고
여보게
우리들의 슬픈 겨울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일컫게 하고,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바둥거려야
하지 않은가
여보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는데도 가슴이 먹먹하다. 양성우 시인은 박정희 정권 때 이 시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었다. 시집 <겨울 공화국>은 시인이 감옥에 있을 때 동료 문인들이 힘을 모아 출판했다고 한다. 시집 서문 끄트머리에 고은 시인은 이렇게 썼다. ‘그는 더 빛나는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중단한 어둠의 삶을 그곳에 들어가서 살고 있는 것이다. 성우! 너 없이 깡술을 입 속에 던져넣는다.’ 삼십 년도 더 전에 쓰여진 이 시는 마치 어제 나온 것인 양 지금 읽어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시대 상황과 흠 없이 들어맞는다. 그래서 더 한스럽고 안타깝다. 이 땅에 일제가 물러가고 미제가 뿌리를 박은 지 벌써 반세기가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변한 것이라고는 인터넷이 집집마다 침투해 들어갔다는 것 말고는 없다. 양성우 시인이 2009년 1월인 지금 이 시를 발표했다고 해도 아마 허위사실 유포죄나 사회혼란죄로 붙잡혀 갔을 것만 같다. 청기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걸핏하면 뉴스에 나와 경제가 어쩌구 민심이 어쩌구 말만 한두 마디씩 툭툭 내던지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자기가 다스리고 있는 나라를 ‘겨울 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반드시 잡아들여 격리 수용해야 할 눈엣가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잠도 안 자며 시를 읽었고, 같이 읽었으면 하는 시들을 가지고 글을 썼다. (원고 하나 거저먹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이 빌어먹을 시대 탓이 아니라 단지 내가 게으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은 힘든 일을 하지 않고 지내는 탓일 수도 있다. 의식주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편히 누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시대라니. 무슨 시대가 이럴까. 아니다. 시대 탓이 아니다. 윤중호 시인의 시집 <금강에서>의 뒤표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엉망으로 취해 가방도 잃어버리고 선배집에서 꼴아졌는데, 아침을 멕인 선배가 한심하다고 고시랑거렸다. 그만하라고 했더니 이번엔 불뚝거리는 내 성질이 문제라고 거기에 자만심이 그득하다고 실실 웃으며 딴죽을 걸었다. 노인네 같은 후배 한 놈이 옆에서 장구 치며 장단을 맞춰주는데, 나는 몸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세상이 아프니 내 몸도 아프다는 식의 싸가지 없는 자만은 내 몫이 아니다’ 정도는 알고 있다. 언제 안 아픈 세상이 있었던가.

세상은 그저 세상이고, 나는 그저 나다. 세상은 그저 세상이 아니고, 나는 그저 내가 아니다. 아프다.


시간은 흘러가고 아픔은 잊혀진다. 흐르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지만 잊혀지려는 아픔은 바짓가랑이를 부여잡아 붙들어 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몹쓸 정권을 주질러 앉히려는 모든 싸움은 옛 싸움의 기억들을 되살려 온다. 토요일, 청계 광장에서는 기억을 되찾으려는 이들과 기억을 지배하고 빼앗으려는 음흉한 힘이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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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 용산 , 박병학 ,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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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문학

    양성우 시인은 이제 그런 발표 안해요.
    민주당 의원을 지낸 시인 양성우는 2007년 7월6일 새벽 이명박 대통령 후보캠프에 찾아가 <희망으로>란 시를 선물하고, 지지를 선언했으니까요.

  • 박병학

    저런. 그랬군요.
    검색해 보니 이런 기사도 있더라구요...
    http://epaper.khan.co.kr/index.html?exec=viewsearch&height=1640&GCC=AA00199&PaperDate=&PageNo=&PageName=&CNo=41399335&COI=&NCT=&scope=0&keyword=양성우&period=0&startdate=2009-01-31&enddate=2008-07-31&page=1&page_size=10&idx=4

  • 잘 읽었습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 수현

    안녕하세요-
    강남성모에서 뵈었었는데..
    글은 계속 읽었는데 이제서 댓글 하나 달아요.
    ^^계속 좋은 글 써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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