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진보작가 네트워크인 ‘리얼리스트 100’의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은 ‘희망뚜벅이’들이 쓴 시와 일기문 중에서 “보편적인 노동의 문제를 실제 개인의 경험을 통해 위트 있게 풀어낸” 4개의 작품을 선정해 발표했다.
[출처: 이윤엽] |
귀밝이술
장병윤(현대차울산비정규직지회)
음력 정월 보름날 아침
1년 내내 귀가 밝아지라고 마시는 귀밝이술
월차를 자유롭게 쓰게 해달라.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주지 마라.
대법원 판결에 따라 정규직화 시켜라.
그렇게 애원 반 협박 반 외쳤지만
귀가 어두운 자본은 못 들은 것 같다.
급기야 점거를 하고 공장을 멈추자
귀 어두운 자본은 경찰 검찰을 동원해 동지들을 구속시키고
셀 수 없는 조합원들을 해고, 징계로 옥죄었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정리해고는 살인이다!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귀 어두운 자본은 보청기마저 마다한다.
음력 정월 보름날 아침에 귀 밝아지라고 마시는 귀밝이술
자본가에겐 강제로라도 말통으로 먹여야 할 것 같다.
추운 길바닥에서 농성하는 것보다,
용역들에게 두들겨 맞는 것보다,
술 먹이는 게 쉬울 것 같다.
99%가 1%를 꿇어 앉혀놓고 술 먹이는 게 쉬울 것 같다.
귀만 밝아진다면.
복직투쟁이 뭐야?
최일배(전 코오롱노조 위원장)
초등학교 입학한 딸이 설문지를 갖고 왔다.
직업과 생활내역 조사하는 내용이다.
사랑스러운 딸과 머리 맞대고 즐겁게 적어간다.
딸이 묻고 내가 답하고…
그런데 ‘직업란’에서 멈칫!
직업? 뭐라고 하지?
그냥 대충 속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정리해고 복직투쟁 중”이라고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복직투쟁이 뭐야”라고 묻는다.
또다시 고민.
옆에서 한참을 지켜보던 아내가
“됐거덩! 그냥 무직이라고 써!”란다.
슬프다. 한번도 무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노동자’라고 썼다.
달이 고개를 갸웃거리든, 아내가 눈총을 주든
나는 자랑스러운 노동자이니까.
아제부터 딸에게도 ‘노동자’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뇌(?)시켜야겠다.
아내가 없을 때.
희망뚜벅이
도성대(유성기업지회)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날선 바람 전신을 긁고
검은 하늘 논조차 검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붉은 포도주 피되어 돌고
보리 개떡 같은 만두 한알
포만이 좋다.
새우처럼 굽혀 눕힌 공공언 육신
고단한 졸음은 꿀처럼 달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눈을 속였던 검은 눈
하얗게 앉아
해맑은 동심을 열고
어머니 젖무덤 같은 눈 덮힌 들판
꿈에 그리던 고향만 같다.
걱정
을채(세종호텔노조)
오메,
걱정없이 살란다.
울 엄매 걱정도 안 하고,
돈 걱정 밥 걱정도 안 허고,
집 걱정도 안 허고,
학벌 걱정도 안 허고,
군대 걱정도 안 허고,
몸 걱정도 안 하고,
연애 걱정도 안 허고,
결혼 걱정도 안 허고,
새끼 걱정도 안 하고,
노동자 걱정 농민 걱정 철거민 걱정 청소년 걱정도 안 허고,
또, 또, 음...
암튼시레 걱정이란 걱정은 모-오다 긁어다가
밥 비베 묵디끼 다 비벼 묵어부렀음 좋겠다.
오로크름 살다가 피 보타 죽겄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정말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담배가 실컷 태우면서
그렇게 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