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탄압의 무한질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양규헌 칼럼] 국제 망신에도 무리수 두는 정권의 지배전략에 맞서야

바람 불어 흔들리는 가을억새의 나부낌은 세월의 흐름을 반증하고, 안개 짙어져 흐려지는 시야에, 반동의 역사는 가려져 가치관에 혼란을 겪는 혼돈의 가을이 짙어가고 있다.

새벽이슬 머금은 국화향기는 억척스런 영혼의 변화를 재촉하고 코스모스의 가녀린 자태는 속세의 온갖 고뇌를 포용하고 있다. 계절의 낭만과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고 쓸쓸함, 허전함의 감성과 함께 삶의 풍요가 긴 한숨을 동반한 고통이 되어 노동자 민중의 목줄을 겨냥하고 있다. 치솟았던 순간의 희망은 짧은 순간 깊은 절망으로 뒤엉켜 가고 거리의 방랑자로 전락한 노동자 민중과, 견고한 지배 권력의 관계는 철저한 주종관계를 초월함에도 지배 권력은 ‘민주주의 사회’를 떠들어대고 있다. 이 모순과 모순의 틈새로 계절의 상징 단풍은 공안의 스산한 바람에 낙엽 되어 흩날린다.

가을을 호흡하는 사람들, 가을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은 똑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처해진 상황이 상이한 각각의 입장은 같지 않다. 한적한 야외 오솔길을 찾아 포근한 낭만에 미소 지으며 여유롭게 낙엽을 밟는 사람과, 바람 불 때 마다 마구 떨어진 낙엽을 쓸어야 생존을 이어갈 수 있는 절박함에 찌든 사람의 정서는 같지 않다. 동일한 사물을 접하고 있어도 상반된 감정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각각이 처해진 삶의 조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다른 조건과 상황을 치유하고 간극을 좁혀 평등을 추구하기 보다는 차이를 이용하여 경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자본주의의 전략 속에 자리하는 가을은 한 세대의 담장을 허물고 유신시대의 암울한 가을을 손짓하고 있다.

다수가 주인 되는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박근혜 정권은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 선거개입이라는 소용돌이와 함께 출발했다. 인사파동을 시작으로 혼란스런 국내정치는 파시즘을 동원하여 극복하고, 불리한 쟁점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해 왔다. 국제관계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부분은 외국나들이를 통해 패션의 한류화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으나 가는 곳마다 성과보다는 국내에 빚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들로 망신을 당하고 만다. 국정원 선거개입 수사를 맡았던 검사가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게 수사한다는 이유로 중징계 대상이 되고, 진보정당의 강령에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이 들어갔다고 북한식 강령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앞세워 정당 해산카드를 들고 나왔다. 인민의 대부분이 노동자 민중인데 그들이 주인 되는 세상은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닌가?

현재 상황에서 박근혜정권의 일방통행을 노동자, 민중이 따라잡거나 적응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박 정권의 통치전략은 논리적 해석이나 과학적 규명을 무시하거나 파괴하고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을 도입하여, 진보는 빨갱이 보수는 애국의 프레임에 가둬버린다. 때문에 정치사상의 자유는 고사하고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인간의 기본 권리와 생존에 대한 요구마저 억압으로 통제하기 위해 등장한 ‘공안탄압의 무한도전’은 그 끝이 어딘지 분간하기 어렵다. 박근혜정권의 정치구도에 따른 일당독재노선을 지배의 근간으로 할 것으로 보여 지며 전체주의 노선의 바탕에 다원민주주의조차도 부정하며 자신들 외에 어떤 복수정당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발상이라고 보여 진다.

정리해고, 비정규노동자들의 장기 투쟁은 수년이 거듭되어도 철저히 외면당하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약속어음은 ‘선거철 단풍’이 되어 이미 떨어진지 오래며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노동자는 철창신세를 지고 있다. 한마디로 이 사회 다수인 노동자, 민중의 삶을 위한 정치는 실종되었다. 모순 속에 깊게 자리한 노동자 문제는 해결은커녕 공무원노조, 전교조를 필두로 기본권을 압살하며 노동조합 자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데올로기 공작이 시작되었다. 이런 부당함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유신시대 관 짝을 열어 폭력적 정치공작을 무기를 꺼내 휘두르며 ‘잘살아보세’라는 주술로 ‘서민경제 활성화’라는 얼토당토 않는 억척을 덧씌우고 국민을 기만하며 중장기적 정치구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헤게모니 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다.

‘통진당 해산 심판 청구’로 헌정사상 첫 번째라는 반동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정치, 경제,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집권연장을 향해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세력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발상이다. 여기엔 상식도, 논리도, 철학도, 양심도 없다. 한마디로 유아독존이다. 참여정부시절,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환생경제 연극에서 노대통령에게 ‘육실헐 놈’ ‘노가리’라고 하며 매우 즐거워하는 자리에서 ‘박장대소’했던 게 당시의 박근혜 대표이지 않았던가. 이런 후안무치함에 어떤 반성도 없이, 통진당에서 대통령을 박근혜 씨로 호칭했다고 전 방위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행태가 정상적 사고체계인가. 최소한의 기본윤리도 저버리고, 객관적 판단과 균형감각을 상실한 상태에서 정치를 자신들만이 누리는 게임으로 인식하는 저들의 행태는 정치가 아니다. 당원에 의해 만들어진 정상적인 진보정당을 해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 정당이 불법과정을 거쳐 당선된 대통령을 인정하지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지 않은가.

변혁적 이념과 노선은 노동자계급의 희망

공무원노조, 전교조, 그리고 통진당에 대한 공격의 화살은 진보진영, 노동계급 전체를 향하고 있다. 공안정국은 이데올로기를 수반하는 공격이고 공세의 고삐를 조이는 근거는 노동운동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노동자 주인 되는 세상’은 갑자가 나온 담론이 아니라 80년대 후반 전노협 때부터 주장되었다. 동시에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건설’과 ‘노동해방’은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이 되었고 그를 위한 변혁노선이 진보의 가치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북한 노선으로 운운하며 공안탄압의 도구로 활용하는 이유는 노동운동의 위기를 틈타 노동자계급에 대한 파상공세를 함으로서 자본주의 위기인 대공황을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해고노동자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망발은 국제적 망신이다. 이런 망신을 감수하면서도 황당한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것은 박근혜 정권이 미친 게 아니라 그들의 중장기적 지배, 통치전략이기 때문이다.

올해, 노동자대회에서 자주 등장하는 구호는 ‘민주노조 사수’였다. 이 구호를 들으며 노동운동사의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분노를 모아 외쳤던 ‘민주노조 사수’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은 노동운동이 40년 이전으로 회귀했다는 증거이다. 변혁적 노동운동이 거대한 노선으로 강조되었던 40년 이전을 ‘잃어버린 세월’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 본질이 선거를 통해서 바뀌지 않다는데 있다. 정권교체가 되어도 노동자 통제전략은 틈만 보이면 헤집고 들어와 억압하고 탄압하여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며 기본권마저도 유린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으나 근본적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그간 우려해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수 십 년 이전의 노동운동으로 후퇴하였다는 것은 수적으로 민주노조 조합원은 늘었으나 동력이 없다는 것이고, 조직은 있으나 이념과 노선의 허약함이 결국 ‘민주노조 사수’라는 절박한 구호가 되어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울려나오는 것이다.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한다

1979년 10월, 18년 간 장기집권 했던 유신정권이 무너지게 된 데에는 노동자 투쟁이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다. YH노동자들이 체불임금을 요구하며 투쟁하다가 결국 투쟁장소를 제1야당인 신민당사로 옮겨 투쟁하는 과정에 김경숙 동지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면서 ‘신민당사 점거투쟁’은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은 ‘김영삼이 선량한 YH노동자들을 꼬드겨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했다’는 누명을 씌워 국회의원 김영삼을 제명하는 해괴한 사건을 만들어 냄으로서 정세는 고양국면으로 전환되며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부마항쟁의 책임 소재를 두고 유신정권 내부에서 책임을 둘러 싼 권력 싸움이 전개되고 10월 26일 유신정권은 박정희의 오른팔에 의해 종말을 맞게 되었다. 유신정권 몰락은 결과적으로 내부균열에 의해 매듭지어졌으나 유신종말의 도화선은 YH노동자투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노동조합의 성격은 투쟁조직이다. 헌법에 노동3권을 명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본이 주인인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위해 투쟁으로 맞서지 않으면 최소한의 생존과 권리조차도 보장받을 수 없다. 때문에 노동조합조직의 성격을 투쟁조직으로 규정하기에 투쟁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민주노조라고 할 수 할 수 없다. 진보정치를 비롯한 노동자계급을 향한 공세가 유신의 행태와 같다고 해서 관 속에 유령들과 역사투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낡아 빠진 유신의 유물을 복원시켜 통치철학으로 갈무리하려는 자들과 투쟁이 불가피해졌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어느 정권이든 지배 권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자 민중을 억눌러왔다. 지금 시기는 더더욱 그러하다. 민중을 억압의 대상으로 삼은 대가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지배 권력을 향한 투쟁전선을 조직하자. 노동자계급의 단결로 연대투쟁을 확장시키는 것이 민주노조를 사수하는 동력이 되며 공안탄압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수 십 년 전 외쳤던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타협투쟁정신’을 복원시켜 내고 민주노조 정신인 변혁지향에 대한 노선을 분명히 하고 계급투쟁의 장을 열어나가야 할 때라는 것이 바로 지금이라는 게 역사의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의 조건이 방어적 투쟁의 성격이더라도 공안탄압의 무한질주를 중단시키고 노동자계급정치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자. 그리하여 이 땅의 다수인 노동자 민중이 역사의 주인임을 각인시켜 나가는 역사의 발전을 모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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