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억 년 전의 눈물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두 사람을 위한 글


지금 내 앞에는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은하가 찍힌 사진이 있다. 작은 별들이 점점이 흩뿌려진 시꺼먼 우주 한가운데 새벽빛 같은 푸르스름한 안개가 한 덩어리 스미어 있고 그 안개 속에는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누군가 보석들을 박아 놓은 것처럼 자기 자리에서 오롯하게 빛나고 있다. 이 별무리는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131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한다.

빛이 1년 동안 뻗어 나가는 거리를 광년이라 부른다. 131억 광년이면 빛이 131억 년 동안 막힘없이 나아가야 이를 수 있는 거리다. 131억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도 얼른 헤아려지지 않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지금 131억 광년 너머의 별무리가 내뿜은 빛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131억 광년 떨어진 별무리의 빛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31억 년 전으로 되돌아가 별무리 부근까지 가서 직접 사진을 찍든가, 아니면 131억 광년 너머의 빛이 지구에 있는 망원경에 다다를 때까지 131억 년 동안 줄곧 기다리든가. 둘 중 어느 방법으로 사진을 찍든 사진 속에는 푸른 별빛과 131억 년이라는 긴 시간이 함께 자리하게 된다. 나는 지금 131억 년 전의 별무리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거치며 지금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별무리들을.

동글동글하면서도 반짝이는 별빛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꼭 눈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앞에서 그런 별빛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한다.

가끔씩 만나 함께 술을 퍼먹는 후배가 한 명 있다. 녀석과 나는 같은 대학의 같은 학과를 나왔다. 우연인지 아닌지 녀석과 나는 이 세상을 비슷한 방식으로 바라보았고 비슷한 일에 비슷한 모양새로 분노할 줄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 어린 나이에 NL이니 PD니 IS니 정파라는 것을 따지며 살쾡이처럼 사납게 굴 때 녀석과 나는 콧방귀를 뀌며 술이나 마시고 다녔다. 내가 쫓기듯 군대에 가 버린 뒤에도 녀석은 대학에 남아 그 지긋지긋한 조직에 몸과 마음을 쏟아부으며 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배자가 되었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녀석이 몸담았던 조직도 녀석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 녀석이 빠진 자리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건전지처럼 끼워 넣어졌고 녀석은 참 많은 것을 잃은 채 달랑 혼자 남겨졌다. 녀석이 아직 꾸역꾸역 조직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내게 단돈 몇 만 원이라도 도와달라고 몇 번 연락을 했었지만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나서도 금방 녀석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나 또한 빚에 허덕이며 숨 가빠 하던 시절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녀석을 한 번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마음의 빚에 한동안 짓눌려 살았는데 녀석 말고는 다들 한 자리씩 차지한 채로 결혼까지 해서 잘들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던 녀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만난 녀석은 복어 같던 퉁퉁한 몸집이 마른 멸치처럼 변해 있었고 이미 제법 많은 이들을 떠나보낸 뒤였다. 사랑 하나가 떠났고 아버지가 가셨으며 전에 알던 사람들이 마치 땅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하나둘씩 밑으로 푹 꺼졌다고 했다. 조직 같은 건 오래 전에 집어치웠다고 했다.

그때부터 가끔씩 녀석을 불러내 술을 마셨다. 녀석과 나는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고 이 세상과 우리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늘을 산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제를 잊으려 했고 오늘에서 도망쳤으며 내일엔 관심이 없었다. 분당에서 어머니 가게 일을 돕고 있다는 녀석은 군대엔 언제 갈 거냐고 내가 물을 때마다 수배자는 잡혀 들어가는 날이 입대일이라며 눙쳤고 나는 거기서 굳이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날도 새벽녘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2차인지 3차인지 우리는 어느 순대국밥 집에 앉아 있었고 녀석의 입가는 수육과 순대를 마구 먹어치우느라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어렵사리 일자리를 얻어 조금 돈을 만지게 된 내가 큰맘 먹고 한 턱 내는 자리였다. 이미 술에 잔뜩 취한 녀석이 무슨 이야기 끝에선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내가 그 짓거리 하느라 20대를 다 바쳤는데. 내가 씨x 어떻게 살았는데! 근데 대통령이 박근혜가 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이명박까지는 그렇다고 쳐요. 근데 어떻게 이런 개x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어요? 그래선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럼 난 대체 뭘 한 거죠? 내가 박근혜 같은 인간을 대통령 만들자고 그렇게 지랄했던 거예요? 내 청춘은, 내 20대는 다 뭐죠?”

목소리에 점점 울음기가 배어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이고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뻔한 위로를 해 주기 싫어 아예 녀석에게 못을 박았다.

“더 짜증나는 이야기해 줄까? 박근혜가 물러나면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 똑같아. 우리는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어. 그런 인간들이 다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선거는 백 날 해 봤자 똑같은 결과가 나올 거야. 그럼 민주당? 진보당? 노동당? 걔들이 정권을 잡으면 세상이 달라질까? 아니라니까. 어떤 새끼가 대통령이 되든 노동자는 노동자고 돈 없는 새끼들은 돈 없는 새끼들이야. 국가라는 틀 안에서는 무슨 발버둥을 치든 우리 같은 새끼들은 그냥 개x이라고! 너는 개x이 되기 싫어서 그렇게 살았던 거 아냐?”

나는 술을 더 시켜 한동안 말없이 술만 마시다가 얼마 전에 알게 된 얼굴 해사한 여자 이야기를 불쑥 꺼냈다. 예상대로 녀석은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금세 달려들었다. 어떻게 하면 그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을지 물어보자 녀석은 연애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라며 이것저것 주워섬겼고 그때만 해도 바짝 귀 기울여 듣던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 그 여자의 얼굴조차 기억 안 난다.

녀석과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취해 어느 방으로 기어들어갔고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녀석은 내 주머니 속 담배만 홀랑 챙겨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몇 달이 흐른 어느 토요일, 나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나와 있었다. 함께 나온 사람과 함께 선전전을 벌이려 했지만 눈이 너무 많이 오는 바람에 그냥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이야기를 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온 누군가를 보고 있는데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술 먹냐?”

“아뇨. 촛불집회에 나와 있어요. 국정원 규탄이요.”

“홍대 쪽으로 넘어와라. 거기서 술 먹고 있다. 네가 좋아할 만한 사람도 있어. 여자는 없다.”


집회가 끝난 뒤 나는 지하철을 타고 홍대 쪽으로 갔다. 찻집인지 술집인지 알 수 없는 어두컴컴한 곳에 형님과 다른 몇몇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낯익은 한 사람은 정태인 교수였고 낯선 두 사람은 ‘레디앙’ 이광호 대표와 녹색당 김수민 시의원이었다.

어제인가 오늘이 생일이었다는 정태인 교수는 이미 취해 해맑은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고 덥수룩한 흰머리가 잘 어울리는 이광호 대표는 독한 술을 찾는 내게 큼직한 보드카 한 병을 시켜 주었다. 말없이 앉아 있던 김수민 의원과는 그날 몇 마디 나누지도 못했다. 머리를 풀어헤친 채 풀린 눈으로 해롱거리는 형님을 보자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 대체 어디 있는지 묻고 싶어졌다.

형님은 노동당 당원이자 어느 미디어 단체 활동가다. 2008년 ‘광우병 촛불’이 터졌을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수많은 현장을 누빈 형님은 지금까지 그 미디어 단체를 꾸역꾸역 끌고 오면서 정치판과 노동운동판의 온갖 더럽고 치사한 것들과도 날마다 마주쳐야 하는 시간들을 버텨 냈다. (그 때문에 성질이 개 같아졌다고 가끔씩 농담처럼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형님도 나처럼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자식들 비싼 대안학교 보내며 잘 먹고 잘 사는 똑똑한 ‘진보 인사’들을 개똥처럼 여겼다. 형님과 처음 만난 게 2007년이니 사람 까다롭게 가려 만나는 나로서는 형님과 죽이 잘 맞았다고 해야겠다.

그런 형님이 얼마 전 내게 작업을 같이 해 보지 않겠냐고 했다. 이런저런 단체들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 받으면서 고생은 있는 대로 다 하며 사는 이름 없는 현장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영상과 글로 담아내 보자는 얘기였다. 영상은 카메라를 든 형님이 담고 나는 글 한 편을 만들어서 영상과 글이 한 쌍이 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솔깃해져서 그 뒤로 형님을 몇 번 만나 술을 마시며 쑥덕쑥덕 계획을 짰다. 형님은 글이 어느 정도 쌓이게 되면 책으로 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지만 나는 책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참세상’에 연재만 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형님은 평소에 눈여겨봐 두었던 활동가들 몇몇과 부지런히 만나는 눈치였고 나는 곧 작업을 시작해 보자고 형님이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형님이나 나나 이름 없는 활동가로 살며 없는 돈으로 팍팍한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다른 활동가들을 취재할 게 아니라 형님과 나를 먼저 서로 취재해야 할 형편이었다. 형님은 진보든 뭐든 싹 다 망해 버린 뒤에 다시 판을 짜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투덜거렸지만 노동당 행사에는 꼬박꼬박 나가 사람들과 어울렸고, 현장에서 연락이 오면 카메라를 들고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형님도 나도 어떤 큼지막한 명분을 위해 뭔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웅크려 있을 수가 없어서, 그러기엔 너무 짜증이 나서 발버둥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형님뻘인 정태인 교수와 이광호 대표에게 술 취한 김에 반말을 하며 마구 웃고 떠들던 형님이 무슨 얘기 끝에선가 갑자기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 씨x!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구요. 답이 안 보여요. 다 망해 가고 있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내가 뭘 하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게 너무 화가 나요!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요! 선거가 코앞인데 아마 또 박살날 거고. 허구한 날 데모만 하면 뭘 해? 분신하면 또 뭐 할 거냐고!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에라 씨x, 다 망해 버려라!”

형님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정태인 교수가 일어나 형님을 안아 주며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다독거렸다. 나는 왜 이런 자리에 불려 나왔을까 후회하며 조용히 보드카를 홀짝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디선가 지겹도록 보고들은 것처럼 느껴졌다. 술도 안주도 내가 싫어하는 비싼 것들이었지만 배가 고픈데다가 짜증까지 치밀어 오른 나는 남은 접시를 깨끗이 비웠고 보드카도 야금야금 반병이나 마시고 말았다.

정태인 교수는 비틀거리며 택시를 타러 갔고 정신 멀쩡한 이광호 대표가 술값을 계산했다. 마침 근처에 형님의 사무실이 있었다. 나는 자꾸 바닥에 고꾸라지려 하는 형님을 부축하고서 사무실까지 데려가 짐짝처럼 부려 두고는 집으로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의 눈물은 내겐 술자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싸구려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131억 광년 너머에 있다는 별빛을 보기 전에는.

내가 출근하는 사무실에는 기자가 되고 싶어 공부 모임을 꾸린 젊은이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공부하고 간다. 그 친구들 가운데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자 준비할 때는 다들 한겨레나 경향 같은 곳에 들어가고 싶어 하죠. 근데 이력서 냈다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다 보면 어디든 좋으니 다닐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돼요. 조중동이든 미디어워치든 취직만 된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죠. 그게 정말 개 같은 거긴 한데요. 문제는 그게 언론사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의 현실이라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나부터가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쯤에 지독하게도 일거리가 손에 안 잡히던 시절, 나는 이곳저곳에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뿌리고 다녔고 연락이 오는 모든 곳에 가서 내가 가진 뭔가를 팔려고 했다. 하루는 여의도에 있는 어떤 월간지 회사에서 면접 보러 오라는 전화가 왔는데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조선일보나 다름없는 ‘꼴통’ 월간지를 만드는 곳이었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면접을 치를 수 있을지 작전을 짜고서 다음날 정장을 차려 입고 그 꼴통들의 소굴로 갔다.

물론 결과는 뻔했다. 꼴통들은 내게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내 마음대로 말하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진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곳에 붙었다면 나는 지금도 똥걸레 같은 정치 기사나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돈은 조금 일찍부터 모을 수 있었을 것이고 나름대로 기자 시늉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돈만 받을 수 있다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다고 눈곱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생각했던 그 시절의 나를 아직도 기억한다. 처음부터 돈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시절 나를 꼼짝 못하도록 옭아매고 있었던 것은 끔찍한 무기력함이었다. 이 거지 같은 세상이 좀 달라졌으면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도무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내 힘으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돈이었다. 무엇을 하든 열심히 돈을 벌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며 사는 게 차라리 더 나은 일인가 싶기도 했다.

정말 신기하게도 ‘진보 정당’들의 윗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이름값 높은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잘 살았다. 하다못해 지역 당 대표들과 간부들도 죄다 돈 많은 부모를 두고 있거나 의사나 약사 따위 전문직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잘 사는 사람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런 으리으리한 사람들에 비하면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철부지일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를 비롯한 모두가 망해 버릴 거라고, 무엇을 하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한동안 무기력함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얼마 전 어느 술자리에서 만난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름만 대만 누구나 아는 신문사에 취직해 다니다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때려치웠다는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학교 안에 대자보를 붙이다가 선생들에게 두들겨 맞을 만큼 ‘깡’으로 뭉쳐 있었지만 결국 돈이 필요해서 그 꼴통 신문사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뛰쳐나온 뒤에도 제법 큰 회사에 들어갔지만 그곳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해 줘야 한다고 윗사람과 싸우다가 징계를 먹었다고 했다. 그러고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제일 힘들어요. 정말 x같아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다들 똑같은 표정을 짓고 똑같은 소리를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더럽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이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그딴 식으로 더럽힌 인간들도 싫어하고 그 인간들에게 굽실거리며 사는 자신도 싫어한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이런 무기력함이 정말 끔찍하다고.

내가 그런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내겐 얼마든지 무기력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였다. 무기력하다고 뇌까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되는 대로 살기 위해선 무기력한 상태로 지낼 수 있는 ‘시간’과 무기력한 시간 속에서도 굶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시간도 돈도 없는 사람들은 무기력해지고 싶어도 무기력해질 수가 없다. 당장 밥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뭔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돈이 충분한 사람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무기력함을 그 시간과 돈으로 더욱 부풀리기만 할 뿐이다. 그들에겐 자신이 무기력하다고 한탄할 시간이 있고, 술을 처먹으며 그 무기력함을 만끽할 돈이 있다.

대체 누가 무기력함을 이야기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 벌이는 노동자들이 요새 정말 무기력해 죽겠다고 한숨 쉬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길거리에 나물이며 땅콩이며 차려놓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할머니들이 무기력하다느니 어쩌니 투덜거리는 걸 들어본 적 있는가? 요새는 누구나 버릇처럼 삶이 힘들다고 이야기하지만 내일 당장 쌀이 떨어지거나 가스가 끊어지는 건 입으로만 지껄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입으로만 지껄이는 무기력함은 진짜 무기력함이 아니다. 진짜 무기력함은 한 사람의 삶 전부를 집어삼킨다. 한 번도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한 번도 노숙자들 사이에서 술추렴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은, 한 번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본 적 없는 사람은, 단 한 번도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무기력이라는 말에 스스로 갇혀 있을 뿐 태어나서 무기력해진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 (물론 나도 알코올 중독이든 정신병원이든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무기력함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한 번도 무기력해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뒷돈을 대 주는 무기력함이란 결국 게으름이다. 귀찮은 것이다. 날씨도 추운데 촛불집회 가서 구호 외치기 싫은 것이다. 집에서 스마트폰과 함께 뒹굴고 싶은 것이다. 나 하나 있든 없든 어차피 세상은 더욱 나빠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무기력해진 것이 속상해 술 처먹고 담배 피울 돈은 있어도 집회에 나갈 차비와 노조 후원주점에 쓸 돈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구시렁거리는 것이다. 그건 게으름이지 무기력함이 아니다.

입술에만 얹힌 무기력함이 가짜라면 내가 본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자기가 뭘 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비죽비죽 울던 후배의 눈물은 무엇이었으며, 자기가 뭘 하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게 미칠 것 같다며 끅끅거리며 울던 형님의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그 무기력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결코 게으르게 살지 않았던 그들의 삶은 무엇이었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다시 131억 광년 너머의 별무리가 찍힌 사진으로 돌아가자. 131억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지 않고서는 지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별빛이 다다르기까지 지구에서는 무척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이들이 태어났으며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 많은 일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 없어 누군가가 역사책이란 것을 만들었고 거기에 뭔가 좀 중요하다 싶은 일들만 골라 적어 놓았다. 책 한 권이면 사람이 처음 나타난 300만 년 전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대강 훑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역사라는 것을 자신이 아직 살아있을 때 변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한다. 스스로가 실감할 수 없는 역사는 역사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역사란 시간이 겹겹이 쌓이는 가운데 만들어진다. 오래 살아야 백 년 남짓이 전부인 사람의 힘으로는 수백 년이든 수천 년이든 성큼성큼 건너뛰는 역사를 따라잡을 수 없다.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부려먹었다가 버리는 노예제도가 없어지기까지 몇 천 년이 걸렸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노예제도나 다름없는 파견법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기도 하다.) 여성이 그나마 남성과 비슷한 대접을 받게 되기까지도 몇 천 년이 걸렸다. (물론 남성과 동등해지기까진 아직 멀었지만.) 아버지가 아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물려주는 방식이 없어지고 투표로 왕을 뽑는 제도가 자리잡기까지도 정말 긴 세월이 필요했다. 지금이야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앞으로 노예제도가 사라지고 여성이 남성과 비슷한 지위를 누리게 될 것이며 왕을 투표로 뽑게 될 것”이라 말하면 아마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노예제 폐지든 투표든 이제 와서는 당연한 것들로 여겨지는 것들을 얻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 갔을까.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비참하게 죽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짓밟혔을까. 그 시절에도 세상이 좀 달라지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이 바위에 달걀을 던지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뜻을 꺾은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바뀌었다. 아직 바뀌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지만 바뀐 것들도 있다. 몇 천 년에 걸쳐 조금씩 바뀌느라 아무도 몰랐겠지만 그 몇 천 년이 지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변화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난 몇 천 년 동안을 잘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앞으로 닥쳐 올 변화들도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시간 안에 벌어지기를 기대한다. 노동자들이 공장이든 회사든 모든 생산수단을 손에 넣기까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여성이 명절 때 궂은일들을 도맡아 하지 않아도 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까? 남한과 북한이 총부리를 거두고 평화롭게 지내게 되기까지는? 조중동과 종편이 공정한 보도를 하게 되기까지는? 비정규직이 없어지기까지는? 외국 철학자들의 말을 갖다붙이지 않으면 글 한 줄 못 쓰는 헛똑똑이들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날이 오기까지는?

이 모든 물음들에 나는 대답할 수 있다.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사람의 목숨으로는 잴 수 없을 정도로 무척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몇 천만 년이 흐른 뒤에 역사책을 쓰는 학자들은 사람이 처음 세상에 나타난 300만 년 전과 21세기인 지금을 한데 묶어 ‘원시시대’라 부를지도 모른다. 경찰도 군대도 법률도 자본도 모두 권력을 쥔 사람들의 편인 이 시대는 아주 먼 훗날의 기준으로 보면 더 넓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돌도끼 들고 싸우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역사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가 물질로든 과학으로든 끝장을 본 시대라 생각하지만 아마 그런 생각은 300여 년 전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던 옛날 사람들도 똑같이 품고 있었을 것이다.

즉 누가 무슨 짓을 하든, 누가 얼마나 발버둥 치든 이 세상이 꿈쩍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해도 좋다. 역사의 눈금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고 제멋대로여서 사람의 힘으로는 좀처럼 헤아릴 수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뭘 해도 당장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 술이나 처먹으며 고주망태로 살아야 할까? 식구들 먹여 살릴 돈이나 벌면서 목숨이 다하기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할까? 아니다. 역사라는 것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뭉뚱그려 나중 사람들이 이름 붙인 것이지 스스로 어떤 뜻을 품은 채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역사는 늘 사람의 힘으로 새로운 길을 내 왔다. 다만 백 년도 못 사는 사람이 헤아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뿐이다.

노예제도가 없어진 것은 우연도 아니고 권력을 쥔 이들이 마음을 고쳐먹어서도 아니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남성들이 선뜻 은혜를 베풀어 줘서가 아니다. 몇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누군가는 떨쳐 일어났을 것이고 누군가는 피를 흘리며 죽어 갔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를 갈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 것이다. 역사책에는 적히지 않은 그 모든 눈물과 분노가 몇 천 년 동안이나 이어지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일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이 싸움이 자신들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싸움은 계속되었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들이 길바닥에서 백 날 데모하는 것보다 차라리 국회의원이 국회 안에서 싸워서 법조문 하나라도 노동자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 더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오랫동안 맨몸으로 투쟁해 오지 않았다면 국회의원이 그런 식으로 국회 안에서 싸울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만을 기억하지만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자기가 정직하게 일한 만큼 먹고살려는 사람들의 투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 왔다. 당장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좌절한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언젠가는 세상이 반드시 바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린 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뭔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투쟁만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죽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아마도’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 투쟁마저 믿을 것인가? 내가 보기에 앞엣것을 믿는 사람은 무기력이라는 스스로 만든 늪에 빠져 주정뱅이가 되거나 선거를 통해 ‘좋은 사람’을 뽑으면 세상이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이 되는 듯하다. 그럼 뒤엣것을 믿는 사람은? 아마 몽상가라고 불리며 주위 사람들을 무진장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찍힐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31억 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사람의 시간은 하루살이의 목숨보다도 더 짧다는 것이다. 그 긴 시간을 거쳐 우리에게 다다른 별빛이 어쩌면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두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의 시간을 넘어 역사라 부를 수 있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돼 온 싸움들이 분명 존재했고 그 싸움들은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좌절에 맞서 가며 이끌어 왔다. 그들은 커다란 명분을 위해서 혹은 눈앞에 다가온 승리를 위해서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싸울 수밖에 없어서 싸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바라는 승리는 사람의 시간으로는 결코 잴 수 없는 아주 긴 시간 동안 싸워야 얻어질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몇몇 유명한 사람들이나 몇몇 노동조합의 승리를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뭄에 콩 나듯 노동자 편을 들어 주는 법원의 판결은 우리의 승리가 아니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도 우리의 승리가 아니다. 우리의 승리는 그 너머에까지 걸쳐 있어야 한다. 먹고살 만한 정치인들의 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그럴 듯한 글줄이나 써 낼 줄 아는 먹물들의 승리는 승리가 아니다. 밑바닥에서 박박 기며 싸우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승리가 진짜 승리다. 모든 사람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어야 진짜 승리다. 앞날이 어떻게 되든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든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작은 것부터라도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거대한 허무일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승리할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역사에서 배웠다. 그러나 몇 만 년 혹은 몇 억 년 뒤에라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것 역시 역사에서 배웠다.

그리고 131억 광년 너머의 별빛, 지금 이 시간에도 그곳에서 빛나고 있을지 아니면 오래 전에 사라져 있을지 알 수 없는 그 별빛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131억 년 전 한없이 넓은 우주 어딘가에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눈물을 흘렸던 누군가가 한 명쯤은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 131억 년 전의 눈물이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지금껏 이어져 온 모든 싸움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131억 년이라는 시간을 뚫고 끝끝내 우리에게 다다른 그 별빛처럼, 우리도 몇 만 년이 걸릴지 몇 억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머나먼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은 울 때가 아니다.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아야 할 때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위로할 수 없었지만 아주 먼 옛날에서 날아온 별빛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31억 광년이라는 까마득한 거리와 아득하게 먼 시간을 기억하고 그것과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한 우리는 덜 외로울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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