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으로 지켜온 민주노조, 부끄럽지 않기 위해 싸운다

[오늘,우리의투쟁] 금속노조 스타케미칼지회 해복투(2) 박성호 조합원 인터뷰

[편집자주] 너무 많은 노동자들이 너무 오래 싸우고 있다. 갈수록 장기투쟁사업장이 많아지고 벅찬 승리의 소식을 들은 기억은 오래다.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으로 연대의 기운을 나누며 힘을 내지만, 지난한 싸움은 주체의 몫으로만 남아 외롭게 이어진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다독이고 새롭게 결의하며 오늘도 내일도 싸우지만, 때로는 잊혀지고 때로는 외면받는 노동자들의 이야기.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가 <오늘, 우리의 투쟁>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함께 싸워 함께 승리하는 날까지, 인간답게 살고 싶은 우리 모두의 연대를 소망하며 전한다.

  박성호 조합원 [출처: 스타케미칼해복투]

공장이 재가동된 지 2년이 채 안되어 자본이 청산을 발표했다. 청산 선언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가?

스타케미칼 자본이 2010년 공장을 인수하고 2011년 3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인수 당시 화섬 경기가 잠시 호황이었지만, 장치산업의 특성상 원료를 투입하고 조건들이 다 맞아야 정상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있고 그러기까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5년이나 서 있던 공장이었기 때문에 정작 호황기에는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고, 기존의 영업망도 무너져 있어 바로 회복이 어려웠다. 2012년 들어오면서 경기 불황이 시작되고, 특히 중국에서 국가정책으로 화섬을 지원하면서 설비나 품질, 생산성이 급격히 좋아져서 국내 화섬 물량의 공급 과잉도 문제가 됐다.

그런 영향으로 2012년도 하반기부터는 국내 화섬업체들이 전반적으로 감산을 시작했고 스타케미칼도 편승해서 45% 정도의 감산계획과 함께 28명의 희망퇴직을 요구했다. 당시 차광호 동지가 지회장이었는데, 임단협이 끝난 상태에서 12월 11일 보충교섭을 통해 구두 상으로 합의한 내용이 3개월간 감산하는 4개 라인에 대한 인원을 유급순환휴직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틀 뒤 회사는 돌연 감산계획을 철회했다. 계속 감산과 무급휴직을 얘기하다가 구두 합의를 문서화하려고 할 때 갑자기 올 연말까지 감산 계획이 없다고 입장을 바꾼 것이다. 그러고 나서 2013년 1월 2일에 강민표 전무가 보충교섭 자리에서 폐업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그리고 1월 3일 새벽에 현 지회장인 유승재와 현 사무장인 서병욱이 현장을 돌며 지도부 탄핵소추안 발의를 위해 조합원서명을 받았다. 같은 날 오후 3시 시무식 자리에 김세권 대표가 내려와서 조합원들을 식당에 모아놓고 회사 청산한다고, 미안하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자본의 청산 선언 직후 ‘노노갈등’이 불거졌고, 현재까지도 노동조합과 해복투로 나뉘어져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폐업 이후 스타케미칼지회는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는가?

한합투쟁 5년을 함께 해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과정 속에 갈등도 있었고 했지만 기본적인 신뢰는 다 가지고 있었다. 나름 학습도 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유승재는 공장 들어와서 개인적으로는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만 5년을 꿋꿋이 버텨온 친구이기도 하고 쌍차 투쟁 때 구속되기도 했었다. 스타케미칼 1대 집행부를 하면서 나랑 좀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노사협조주의로 기우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많이 소원해진 게 있었다. 그래도 이건 도저히 아니었기 때문에... 어쨌든 파업 때문에 공장이 망했다고 하면서, 공장을 다시 돌리기 위해서 자기가 나오는 거고, 지금의 집행부는 안 된다고 했다. 이 논리를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가지고 있다. 물론 자본이 그렇게 얘기했지만, 자본은 분명히 오히려 경기 악화가 더 큰 이유라고 이야기를 했다. 결국 노노갈등이 불거진 핵심적인 이유는 유승재 쪽은 어쨌든 공장 가동이 되면 모든 것을 회사에 위임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고, 우리는 사측의 태도를 구조조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지회는, 어쩌다 한 번씩 전국 금속집회라든가 큰 투쟁 있으면 금속 구미지부랑 같이 움직이고 지부 운영위원회 참석하고. 별다른 일상 활동은 없다. 뭘 하는지 모른다. 2013년 9월 이후에는 조합원 모임도 없었고, 2014년 1월 8일 확대간부회의를 해서 청산 진행에 대해 ‘철거에 대한 어떤 작업도 막을 것이며, 청산이라면 그에 따른 우리 요구 합의가 우선임을 확인함’이라는 결정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스타케미칼 해복투가 자본의 청산 선언을 구조조정의 수순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무엇인가?

2011년 공장 가동한 첫 해에 스타케미칼은 적자였지만 모기업 스타플렉스는 80억이 넘는 영업이익을 내었다. 2012년도에는 무려 170억이 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가 노동자운동연구소 한지원 실장을 통해서 파악했을 때도 그렇고, 이렇게 갑자기 흑자를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특별히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든가 원료 원가가 엄청나게 하락했다든가 이런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2배 이상의 흑자를 낼 유일한 방법은 스타케미칼이다. 스타플렉스 원단에 들어가는 원사를 여기서 싣고 가고 장부를 조작하든지 해서, 쉽게 말하면 공짜로 쓰는 거다. 스타케미칼 가동을 멈춘 2013년도에는 흑자가 63억인가 밖에 안 된다. 자본 입장에서 스타케미칼을 놓을 이유가 없다는 거다. 단, 스타케미칼 설비 자체가 자기네들이 필요한 양만큼만 생산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나머지는 영업을 통해 해소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안 됐기 때문에 내리 적자가 났던 것이다. 사측이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 한 근거를 적시할 수는 없지만, 2년 돌리는 기간 동안 모기업에 엄청난 흑자가 있었다.

그리고 공장을 멈출 때도, 셧다운 한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라인에 들어간 원료들을 다 빼고 공장을 멈춘다. 그런데 이번에는 라인에 들어가 있는 원료들이 있는 상태에서 멈췄다. 단기간 가동 중단을 생각했을 때는 정상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그 방식이 유리할 수 있다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방식으로 공장을 멈췄다. 한국합섬 시절에 한 번도 취하지 않은 방식이다. 정비를 하기 위해서 공장 가동 중단할 때도, 배관라인의 원료를 다 빼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청산 발표가 있기 며칠 전에 경주에서 열린 경총 연말 송년회에서 스타케미칼에 기업노조가 들어섰다는 얘기가 오갔다며 경주지역 경총 관계자가 민주노총 경북본부 한 간부에게 물었다고 했다. 한 동네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여서 우연히 마주쳐 물었다는데 그 간부는 KEC 얘기를 잘못 알고 있는 줄 알고 그냥 넘겼다가, 우리 사태 터진 직후에 얘기를 해줬다. 지속적으로 감산 계획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철회하고 빼든 카드가 청산이었다. 그리고 바로 어용 세력이 도발을 했다.

권고사직을 다 썼으면 그 다음에 비정규직으로 가는 방안을 강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해복투가 구성되고 투쟁을 전개하면서 자본이 가지고 있던 의도와 사실관계들을 계속 파헤치기 시작하니까 애초 계획대로 하지 못했을 거라고 본다. 청산 선언하고 1년이 다 되도록 사실상 진행한 게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11월 말부터 공장에 업자들이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우리가 새로 결의해서 2차 상경투쟁을 시작하려던 타이밍이었다.

지금은 만약에 다시 공장 가동하게 되면 우리는 법적으로 가더라도 백프로 승소하니까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인 거다. 자본 입장에서는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우리인 거고, 만약 해복투가 없다고 하면 저 어용들한테 돈을 지급하지 않을 것이다, 지급할 이유도 없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애초 자본은 구조조정을 중심에 두고 다 정리하고 비정규직화 하려는 의도였는데 걸리는 것들이 많으니까 분할매각으로 가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 스타케미칼 공장을 둘러싼 상황은 어떠한지? 해복투는 어떻게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지?

모기업 스타플렉스가 서울 목동에 있어서, 2013년 3월부터 해복투는 상경투쟁에 집중했다. 목동 CBS 건물에 스타플렉스가 있는데 거기가 현대백화점이랑 바로 이어져 있고 사람들도 많아서 우리 문제 알리는 선전전을 진행했고 공동투쟁단 등 다른 사업장에 연대를 많이 다녔다. 철거 업자들이 작년 11월 말부터 계속 들락날락하고 있었다는데, 상경투쟁 하느라고 우리는 뒤늦게 알게 됐다. 12월 중순부터는 업자들이 들어오는 걸 확인해야 되니까, 상경투쟁 못하고 공장에 대한 부분에 중점을 두고 있고 지역 활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차광호 동지가 작년 12월부터 다시 해복투 대표 맡고서 지회에 구두 상으로 제안을 했었다. 분할매각 될 가능성이 높은데 철거 저지하기 위해서 공동으로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얘기할 때 그 자리에 나는 없었는데, 지회에서는 현실적으로 공장 돌아갈 일 없다는 식으로 얘기하면서 거부했다고 하더라.
분할매각 관련해서는 여러 업체가, 화섬 설비 쪽부터 중간업자들까지 여러 군데서 지금도 보러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예전 동국합섬, TK에서 6개 라인 인수가 확정적이라는 둥의 이야기도 있고 여러 설은 돌고 있는데, 아직까지 정확하게 계약 체결이 됐다든가 하는 건 없고 여전히 이런저런 업체들과 철거업자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다. 분할매각에 대해 바로 공시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본이 얘기해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공장 앞에서 들어오는 업체 확인하고 3승계 없이는 안 된다 이야기하고 우리가 아는 라인 통해서 확인하고, 그렇게 대응하고 있다.

금속노조 구미지부의 징계 제명이 금속노조의 재심 결과 뒤집혔다. 그에 따른 후속조치가 있었는지?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

작년 10월에 금속 선거가 있었고 7기에서 8기로 바뀌었다. 재심은 7기에서 했고, 제대로 이루어진 건 없다. 사실은 우리가 먼저 금속에 진상조사 요구를 했었다. 우리 상황 설명하고 자본이 어렵다고 권고사직 쓰라고 한 부분, 금속 지침과 연결된 파업이었는데 파업 때문에 공장이 망했다고 하는 부분, 권고사직 권하면서 지회 규칙 변경해서 조합원 자격을 유지하겠다는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행부가 자본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는 부분 등이 금속노조의 정신에 비춰 분명 문제 있는 거니까 진상조사를 하라는 거였다. 그런데 역으로 구미지부에서 해복투 핵심 여섯 명을 징계 제명했다. 금속노조에서 재심한 결과는 우리가 징계 사유가 없고 지회와 지부가 해복투 투쟁에 대해서 최대한 엄호하라는 거였다. 그러나 이후 투쟁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10월 선거 끝나고 집행부 바뀐 뒤에는 KEC에서 제기해서 금속노조 구미지부 관련한 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지부랑 KEC랑 불러서 1차 조사하고서 진상조사위원장이 사고가 나는 바람에 몇 달 지연됐고, 얼마 전에 나랑 차광호 동지가 서울에 가서 간담회를 했다. 그 자리에서 지역담당 부위원장이 올린 자료도 제대로 안 읽고 지회랑 신사협정을 맺으라는 식으로 얘기해서 감정이 많이 격해졌었다. 지회나 구미지부나 최소한의 운동적 관점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뭘 맺든 하는데, 금속지침도 다 위반했다고 징계의결서에 나와 있는데 말이 되냐고. 간담회에서는 일단 해복투에 대한 장투기금 지급, 구미지부 임원의 조합비 유용‧횡령 건을 포함한 진상조사의 빠른 속개, 우리 같은 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금속노조 규약 개정, 공장 분할매각에 대한 지회의 확정 요구안 내용 공표, 분할매각시 구미지부의 입장과 대응계획 확인 이렇게 다섯 가지를 제안했다. 지금 공장 분할매각 얘기가 나오는데 그러면 언제 철거가 들어갈지 모르는데 지회도 지부도 어떤 계획인지 어떠한 것도 밝히지 않고 있다. 어차피 공장은 안 돌아간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러면 고용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칠 것 같은데 어쨌든 본조 차원에서 확인해달라는 거다. 진상조사위원회 내부의 의견 차이가 있어서 아직까지 결론을 못 내리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답답하다.

[출처: 스타케미칼해복투]

장투기금이 현재까지도 지원되지 않는다면, 생계와 투쟁기금은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가?

처음에 다시 투쟁할 때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게 없으니까. ‘조합원 모임’ 꾸렸을 때는 전직 간부들하고 같이 구성한 동지들이 7만원씩 십시일반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 충당했고, 해고 확정된 후에는 해복투 1인당 50만원씩 각출해서 운영기금으로 사용했다. 그 과정 속에 상경투쟁 다니고 하면서 일정 부분 기금 지원 같은 게 조금씩 있었고, 사회적파업연대기금이랑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큰 금액을 지원해줬다. 작년에 지역에서 후원주점도 한 번 했었고, 올해 1월부터 KEC 동지들이 해고자들 빼고 조합원 1인당 1만원씩 결의해서 매월 150만 원 정도씩 지원해주고 있다. 너무나 고마운 동지들이다. 해복투 동지들도 생계 나가든 안 나가든 매월 회비를 책정해놓고 있다. 모인 돈은 투쟁기금으로 운영하고 생계는 알아서 해결한다.

투쟁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다. 과거의 동지들과 반목하면서 입은 심리적인 타격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떠한가?

가장 충격이 컸던 사람이 아마 차광호 동지일 것이다. 징계 제명 받았던 동지들 다 나름대로 충격이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어이가 없는 거다, 이게. 지역에서 활동했던 것도 그렇고. 나름 정신적으로... 왜 없겠나. 해고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많이 끊기기도 하고, 이제 패가 나눠져버렸기 때문에. 그쪽 권고사직한 사람들 중에도 다 그리로 간 건 아니고, 권고사직은 했지만 이제는 저 놈들 꼴 보기 싫다는 거다, 저것들 말 믿기도 싫고. 회의 때문에 스스로, 5년을 겪었기 때문에 솔직하게 얘기하면 이 상황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는데, 이제 힘들다 그런 사람들도 많다.

한합 시절에 상경투쟁을 내가 전담하다시피 했었는데. 발언하고 하면, 그때는 내용이 크게 정리할 게 없었다. 상황 얘기하고 연대 간 동지들 얘기하고 그냥 그러면 됐다. 그런데 처음에 우리 상황이 터져서 올라갔는데, 내가 겪었으면서도 상황 정리가 안 됐었다. 아니, 뭐 자본과 그냥 노자간의 대립 이것도 아니고, 자본이 있고 어용이 있고, 근데 어용도 애초에 어용도 아니고 이런 관계부터 시작해가지고. 나도 처음에는 그게, 너무...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정리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투쟁발언 같은 거 할 때, 내가 겪고 당한 일인데도 나도 잘 정리가 안 됐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계가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봐야 한다. 대부분 결혼을 했으니까, 집사람이 이해를 해주면 괜찮은데, 이해를 못 해주면. 5년 동안 했는데 다시 또... 내가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그 고통이. 나는 사실 5년 투쟁하면서도 몰랐다, 진짜로. 집사람이 크게 내색을 하지 않았고. 그런데 이제, 빚내서 살다가 2년 일하면서 그 빚도 다 못 갚은 상황에서 다시 또 터지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집사람이 저 정도면 진짜 한계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오랫동안 많은 투쟁을 겪었다. 그럼에도 다시 투쟁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1994년 말에 한국합섬 1공장에 입사했고 2002년에 2공장으로 넘어왔다. 1996년에 큰 투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나도 입사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상집으로 문체부장을 했었는데, 간부들한테 수십 억 손배가 날아왔고 그때는 오로지 이겨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내 삶에서 인생에서 어떤 희열을 느꼈던, 희열이라는 게 어떤 건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96년도 파업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 전까지는 막 이런 걱정 저런 걱정, 운동을 알 때도 아니었고 활동을 할 때도 아니었고. 회사의 형이 하라고 하니까 소모임부터 활동을 했었는데.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호기심, 뭐 이런 것들. 하여튼 그러다가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가 손배 막 떨어지고 이러면서 4월 8일날 파업을 하는데, 저녁에. 아직도 생생하다, 그 기억이. 옆에 바리케이트 있고, 2공장 동지들이 1공장으로 집결을 하는데. 그러니까 이상하게, 그 파업하던 그때 그 순간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더라, 이상하게. 그리고 뭐랄까, 막 달뜬 기분이라고 할까. 그러고 이미 싸움은 시작됐으니까, 이길 수밖에 없다 이건, 이겨야 된다, 이 생각밖에 없었고. 내 삶에서 희열이라고 하면 아마 그때가 유일했던 것 같다.

1996년도 파업 투쟁 이후 한국합섬노조가 구미지역 운동을 10년 가까이 견인해 왔다. 물론 한국합섬 5년 투쟁할 때도 그랬고. 쪽수는 오리온전기라든가 코오롱, KEC 같은 데보다 적었지만 실질적으로 지역 운동을 가장 앞장서서 견인해 왔던 조직이었고 그건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상황 터지고 나서, 처음에 스타케미칼이라고 하면 다들 몰랐는데 한합이라고 하니까, 다른 데도 아니고 한합이... 5년 투쟁도 그렇게 열심히 했던 조직이... 그렇게, 다들 그렇게 얘기를 했었다.

나도 참 고민스럽다, 지금은. 투쟁으로 국한 지으면 사실 끝을 봐야 되고. 개인적으로 나도 빨리 끝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승패를 떠나서. 왜냐하면 생계의 압박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내가 아주 부지런해서 새벽일을 다니고 뭐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계의 압박 때문에 사실, 이게 빨리 매듭이 지어져야 되는데 어떤 매듭이든. 그렇다고 어용들이 말하는 그런 매듭은 물론 아니다. 어쨌든 옆에, 주변에 동지가 있기 때문에... 답답한 심정이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가장 솔직한 대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당면한 투쟁으로 보면 그렇고, 운동으로 보면...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라는 생각이 있다. 여러 가지 운동이 있는데, 내가 살면서 가지고 있는 어떤, 지금까지 배우고 경험을 통해서 가지고 왔던 가치관으로 보면 운동적 삶은 불가피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삶의 조건들이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출처: 스타케미칼해복투]

4월 9일, 구미에 위치한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경북북부학습관에서 스타케미칼 해복투 박성호 동지를 만났다. 박성호 동지는 한국합섬 시절부터 조합원과 간부로서 노조 활동을 이어왔고, 자본이 청산을 선언하고 해고된 뒤 스타케미칼 해복투의 첫 번째 위원장으로 다시 투쟁에 나섰다.

멋모르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던 1996년 투쟁 이후에도 박성호 동지는 꾸준히 학습하고 실천하며 민주노조를 지켜왔다. 연대와 투쟁으로 지역의 운동을 견인해 온 한국합섬 노조의 시간이 그대로 그의 삶이었을 것이고, 지난해부터 벌어진 충격을 딛고 다시 투쟁에 나선 스타케미칼 해복투 노동자들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나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가 보인 잦은 헛웃음과 이따금 새어나온 깊은 한숨이 차마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투쟁의 무게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내 승리해 복직했지만 5년의 투쟁이 각자에게 남긴 상처와 출혈의 깊이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것일 터. 뿌리째 흔들렸을 일상을 복원하기에 2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고, 비열하게도 자본은 바로 그 지점을 노려 현장을 나누고 적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처음처럼 다시 싸움을 선택했다.

4월 17일, 두 번째 정리해고에 맞서 당차게 ‘동병상련 봄소풍’을 제안한 동지들과 함께하기 위해 내려간 구미 KEC 공장 앞에서 박성호 동지를 다시 만났다. 투쟁 당일 아침 KEC는 문자로 정리해고 철회를 통보했고, 궂은 날씨에도 많은 동지들이 모여 간만의 작은 승리를 축하하며 힘을 냈다. 복수노조 사업장 제1호라는 달갑지 않은 기록을 달고 5년간 쉼 없이 투쟁하면서 어용노조마저 90% 이상의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하게 만든 KEC지회의 저력은 확실히 요즘 보기 드문 경우다.

미친 듯이 탄압하는 사측에 맞서 미친 듯이 싸우는 KEC지회를 두고 박성호 동지는 ‘개천에서 용 났다’고 표현하며 헛헛하게 웃었다. 그러나 청춘을 바쳐 민주노조를 세우고 지켜낸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가 없었다면, 개천은 금세 말라버렸을 것이고 거기에 기대할 건 아무 것도 없었을 것이다. 현장의 활기를 더하는 오늘 누군가의 투쟁은 분명 자람의 토양을 만들어준 또 다른 누군가에 빚지고 있고,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연결되어 싸우며 살아가니 말이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고 힘들다고 피하지 않고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으며 묵묵히 싸움에 임해 온 노동자들, 스타케미칼 해복투 동지들이 다시 투쟁에 나섰다. 이번엔 좀 더 각별한 관심과 연대가 필요한 싸움이다. 노동자의 내일을 일구며 함께 승리하기 위한 동지들의 투쟁, 있는 힘껏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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