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싸우고 있다, 유가족이 아닌 사람으로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농성장 이야기(1)

언제 끝내게 될지 모르는, 그러나 어서 끝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록을 처음 시작하는 지금도 내 귓가에는 "우리 애기 보고 싶다"고 수없이 되뇌는 아버님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일터에 매여 있다는 핑계로 미적미적 미뤄 오다 지난 토요일 처음으로 국회 농성장에 가서 어머님 아버님들을 뵈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농성장 이야기'를 틈나는 대로 써 보겠다고 약속했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나는 그 말이 내 욕심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농성장에 날마다 갈 수도 없는 내 깜냥으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월요일, 저녁 늦게야 일이 끝났다. 나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국회로 갔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그냥 어머님 아버님들을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다. 높은 분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농성장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그분들 곁에서 말벗이라도 되어 드리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분들의 일상을 함부로 글감으로 삼고 싶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 본청 앞 농성장에 다다르니 밤 아홉 시가 넘어 있었다. 으리으리한 본청 입구 한쪽에서 단식 농성을 하고 있는 분들이 보였다. 유가족 분들은 군데군데 흩어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세월호 시민기록위원회 작가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작가들은 어느 어머님 곁에 앉아 눈물을 훔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도 슬며시 끼어 앉았다. 어머님의 손전화 속은 이젠 더는 볼 수 없는 아이의 추억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우리 애기 운동화고, 이건 우리 애기 옷이고, 이건 우리 애기가 운동할 때 쓰던......

어머님은 사진들을 보여주며 눈물을 흘렸고 작가들도 따라 울었다. 아버님 두 분이 본청 구석으로 가서 술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고 작가들과 나는 자리를 옮겼다. 못된 기자들이나 얌체 같은 경찰들이 보면 좋은 먹잇감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유가족 분들도 어쨌든 다른 이들과 똑같은 피와 살과 심장을 지닌 '사람'이었다. 농성장에서 농성을 한들 술 한 잔 마시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겠다는데 누가 뭐랄까 싶었다.

장마를 앞둔 밤은 바람이 불어 시원했다. 몸집 큰 구름들이 밤하늘 곳곳에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깔고 소소한 안줏거리들을 늘어놓았다. 불을 환하게 켠 손전화에 종이컵을 엎어 두니 자그마한 등잔불이 되었다. 술잔이 돌면서 우리는 밤늦게까지 울고 웃고 떠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글을 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나는 한 마디도 적지 않았고 녹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면서 나는 이 이야기들을 조각조각이나마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가족 분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짐승 같은 사람들 말고도 의외로 적잖은 사람들이 유가족 분들을 '특별법'과 '보상' 때문에 싸우고 있는 '투쟁 기계'로 생각한다. 오로지 국회의원들의 뜻을 꺾기 위해 경주마처럼 한 길만 보고 달리는 이들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을 그리며 온종일 눈물만 흘리는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들은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그분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감정만 있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분들도 때로는 이런 감정 때문에 풀썩 주저앉기도 하고 때로는 저런 감정 때문에 성난 황소처럼 일어서기도 한다. 그분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쓰는 내용은 월요일 밤 술자리에서 어머님 한 분과 아버님 두 분이 들려준 이야기들의 일부다. 왈칵 술잔을 들이키면서, 줄담배를 피우면서, 울음을 터뜨리면서, 화가 나 소리를 지르면서, 깔깔대고 웃으면서, 옆 사람과 볼을 부비면서, 서로 손을 꼭 잡아 주면서, 서로 팔짱을 끼면서, 정답게 서로의 술잔을 채워 주면서 어머님과 아버님은 이야기했고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그분들이 국회 농성장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한뎃잠을 자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분들의 마음이 다른 분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학교 끝날 시간이 되면 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해요. 그 시간이면 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거든요. 그 애들을 도저히 볼 수가 없어요. 전부 다 우리 애 같으니까."

"아침마다 우리 애기가 학교 가는 시간이 되면, 멀거니 현관문만 쳐다보고 앉아 있어요. 계속 생각이 나요. 집안엔 아무도 없는데, 그냥 문만 보고 앉아 있는 거예요. 우리 애가 타던 자전거도 아직 그대로 있는데."

"부모님들 사이에선 아이가 꿈에 몇 번 나왔다는 게 이야깃거리예요. 난 두 번이나 나와서 막 자랑하고 다녔어요. 처음에 나왔을 때는 아이가 내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는데 나랑 눈이 딱 마주쳤어요. 내가 물었죠. 수학여행 가서는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 애기가 정말 환하게 웃으면서, 그럼, 괜찮지, 하는 거예요. 그때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볼 걸. 한번 안아주기라도 할 걸. 그러지 못한 게 지금도 후회가 돼요."

"나는 어떻게 된 게 꿈에 한 번을 안 나왔어요. 꿈에 아이가 나왔다는 부모님들이 별로 없어요. 이상하게도 그래요."

"신기한 게, 누군가가 우리들 신상을 털어서 아이들을 데려간 것 같다니까요. 누구 네는 결혼기념일, 누구 네는 엄마 생일, 누구 네는 아빠 생일, 이런 날인 경우가 진짜 많다니까요. 거의 절반이에요."

"그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이제 죽을 때까지 제 생일은 없어진 거죠. 그날 제가 어떻게 케이크를 자르겠어요?"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난 아직도 사망신고를 안 했어. 그거 하면 정말 끝인 거지. 아직도 우리 애기가 그냥 돌아올 것 같으니까. 도저히 못하겠어서 안 했어. 나중에 신고하게 되면 그때가 가장 힘들 것 같아. 그때는 정말 끝이니까."

"생각해 보세요. 세월호 같은 사고가 로또 맞는 것보다도 확률이 낮다고 하는데, 사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잖아요.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피해간 것뿐이라고요."

"나는 세월호 터지고 나서 우리나라에 사건 사고들이 갑자기 많이 생겨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사건 사고들은 늘 일어나는데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어요."

"우린 안전한 나라를 만들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우리도, 남은 애기들도, 또 애기들이 결혼해서 낳은 자식들도, 안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하잖아요."

"나는 부모님들 부를 때 일부러 애기들 이름으로 불러. ○○이 언니, ○○이 엄마 하는 식으로. 그래야 우리가 애기들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한 친구 놈이 그러더라고요. 야, 그거 아직도 해결 안 됐어? 보상 다 받았잖아? 이제 동창회도 좀 나오고 그래. 뭐? 해결? 대체 뭐가 해결됐는데? 내가 지금 우리 애들 팔아서 장사 하냐? 너랑은 이제 절교다, 그러고 끝냈죠. 그런 말 들으니 진짜 서운하더라고요. 해결된 게 하나도 없는데!"

"아무리 친구라도 자기가 당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거예요. 이제 다 끝난 거 아니냐고 한다니까요?"

"이제 우리도 형들 언니들 떠나보낸 동생들을 챙겨야 해. 어쩌면 우리들보다 걔들이 더 많이 힘들 수도 있어."

"우리 작은 애를 보면 항상 눈이 짓물러 있어요. 내가 보는 앞에서는 못 울고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우는 거예요."

"우리 애기들한테 참 고마워요. 애기들 아니었으면 이렇게 누님이나 형님들 만나지도 못했겠죠. 애기들 덕분에 좋은 사람들 많이 알게 됐어요. 딱 하나 소망이 있다면, 우리들 사이에 애기들도 같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거죠."

"애기들이 우릴 뭉치게 했어요. 애들 아니었으면 다른 학부모가 누군지, 옆 반 학부모들이 누군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광화문에 있을 때 엄마 부대라는 사람들이 와서 막말 할 때도 꾹 참았어요. 근데 버스 타고 국회로 돌아오면서 너무 억울한 거예요. 버스 안에서 펑펑 울었어요. 우리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요?"

"돈도 없는 것들이 경주나 가지 왜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갔냐고 하는데, 아니, 수학여행은 내가 어렸을 때도 다녀왔어요. 자식이 원하는데 그깟 제주도를 못 보내 주겠어요? 가진 걸 모두 팔아서라도, 몸도 팔아서라도 자식에게 뭐든 해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인데. 그게 돈으로 얘기할 수 있는 문젠가요?"

"요새 와이프랑 딱 한 가지 때문에 싸워요. 우리 애기 방 창문 열고 청소할 때. 우리 애기 냄새 다 빠지는데 왜 창문을 여냐고. 가끔씩 우리 애기 방에서 애기가 덮고 자던 이불을 덮고 자는데요. 그러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애기 냄새 없어질까 봐 이불 펄럭이지도 못해요. 잘 때 팔을 대자로 쭉 뻗고 자요. 내 팔 베고 자고 가라고.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 애기가 들어왔다 나갔나 싶어요."

"우리 애기는 좀 일찍 나왔어요. 나중에라도 물에서 애기가 나온 부모님들한테는 축하한다고 했어요. 그러고 나면 집에 가서 펑펑 우는 거예요. 축하를 하면 뭐 해요. 집에 가면 아무도 없는데."

"우리 애가 시체가 돼서 나왔는데, 아직도 물속에서 아이 못 찾은 부모님들 앞에선 죄인이 돼요. 저는 그게 너무 억울했어요. 아니, 대체 내가 왜 죄인이 돼야 해요?"

"그래도 너는 애기 만져 보기라도 했지, 난 만져 보지도 못했어. 냄새가 나든 얼굴이 상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자식인데? 근데 왜 만져 보지도 못하게 하냐고!"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실컷 울어 보는 게 소원이에요."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도, 우리 아이 한을 풀어 주기 전에는 못 떠나요."

"다 필요 없고, 저는 그냥 우리 애기 보고 싶어요.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요. 수천 번이든 수만 번이든 욕을 먹는다고 해도, 딱 한 번만 우리 애기 보고 싶어요. 손이라도 잡아 주고 싶어요."

"저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라도 하고 나면 마음속의 10% 정도는 풀리거든요. 그 풀린 10%로 또 내일 하루를 사는 거죠."

"내 소망? 우리 애기한테 뽀뽀 한번 해 보는 거!"

새벽 한 시쯤 우리는 자리를 정리했다. 이미 곳곳에 모기장이 쳐져 있었고 그 안에서 유가족 분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작가들과 나는 인사를 드리고 국회를 나섰다.

아직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분들이 더 많았다. 쌓이고 쌓인 이야기들을 속병처럼 품고 지내는 분들. 그러나 웃는 법을 아직은 잊지 않은 분들. 그 웃음 뒤에서 안간힘을 쓰며 지금껏 버티고 있는 분들.

그분들은 지금 국회 안에 있다. 높은 분들이 사는 거대한 성채 같은 곳에서 일주일째 견디고 있다. 그리고 해결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그분들은 아직도 아이들이 왜 이 세상에서 버려졌는지 모른다. 누가 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다. 앞으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운지 그분들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내일이든 모레든 글피든 또 다시 어머님과 아버님들을 뵈러 국회 앞으로, 광화문으로 갈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붙이는 주제에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사람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분들과 함께 담배 한 대라도 더 피우고 싶기 때문이다. 그냥 그뿐이다.

24일이면 세월호 참사 100일이다. '농성장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기록을 더는 하지 않아도 되기를, 그분들이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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