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용준]의 사회와 의료

병원 파업과 환자 건강

병원 파업이 벌써 닷새째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파업 장기화 때문에 의료 공백이 생길까 우려가 커지고, 병원 로비에는 힘차게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파업이 며칠째 지속되면서 노동자들이 병원 구내에 붙인 벽보에는 이따금씩 불만 섞인 환자 보호자들의 낙서가 눈에 띄지만, 생각보다 환자들의 동요는 크지 않은 것 같다. 병원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틀림없이 인력이 부족할 텐데 아직 눈에 띄는 일손의 공백은 없다. 새로 환자를 받기보다 기왕에 입원한 환자나 응급 환자를 돌보는 데 힘을 쏟는 모양이다.

의학을 공부하고 학생들을 가르친다고는 하지만, 환자를 직접 진찰하고 치료하는 의사 노릇과는 거리가 먼 분야를 전공하는 탓에 병원에 자주 들르거나 오래 머무는 일은 흔치 않다. 그런 내가 벌써 일주일째 병원 근처를 서성이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 사정 때문이다. 열흘 전에 통원 진료를 받다가 초음파검사에서 우연히 간암이 발견된 장인어른이 입원한 것이다. 처음에는 간 센터에 병실이 없어 다른 병동에 입원했다. 이 병원의 치료 방침은 중증 간 질환을 앓고 있는 모든 환자들은 간 센터, 적어도 소화기내과 병동으로 옮겨서 진단과 치료를 겸한다는 것인지라, 병실이 나기를 기다리며 사흘을 보냈다.

이럴 때 답답한 것은 환자보다는 보호자다. 특히 나 같은 의사일수록 조급증은 더해진다. 가족들이 내게 의지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언제 병동을 옮길 수 있을까요?”
“원래 간 질환 앓고 계시는 분들이 만성인 것 아시잖아요.”
“그렇죠? 큰 병원이니 여기저기서 환자들이 많이 몰려들 테고.”
“게다가 간 센터에 병실이 나긴 했는데, 나이트(night) 번 간호사가 부족한가 봐요. 데이(day) 번은 괜찮은데…….”

이 얘기다. 대개 24시간 입원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는 하루 3교대로 근무한다. 그것을 병원 사람들은 데이, 이브닝(evening), 나이트 번이라고들 한다. 검사나 수술 등 의학적 시술들은 대개 낮 시간에 이루어지므로 간호사 수도 데이 번이 많다. 오후 네다섯 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 정도까지 근무하는 이브닝, 나이트 번 간호사들은 원래 수가 적은 편인데, 파업으로 적정 수의 간호사가 근무하지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파업에 동정적이었던 간호사가 얘기하는 것으로 봐서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다행히 입원 나흘째, 파업 첫날 오후, 소화기내과 병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간암 치료를 위한 첫 번째 시술을 무사히 마쳤다.

나 같은 의료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런 경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체로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되는 미디어 참세상의 방문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기왕에 입원한 환자들은 제쳐 두더라도, 입원한 환자 못지 않게 진단과 치료가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환자와 그 보호자들의 처지에서 본다면 말이다.

응급의학 전문의인 내 친구의 말로는 “응급 환자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응급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는 모두 응급 환자”란다. 이렇게 보면 병원 파업이 장기화됨에 따라 환자와 가족들의 분노는 점점 더 커질 것이고, 그 분노는 실체가 모호한 병원 측에 쏠리기보다는 직접 환자를 돌보는, 파업에 참여하는 병원 노동자들에게 집중될 것이다. 지하철이나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때마다 ‘선(先) 정상화, 후(後) 노사협상’의 ‘쓴 소리’하는 원로들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고 보면, 그보다 더한 병원 파업이 장기화될 때 똑같은 말씀을 하지 마시란 법은 없다. 그리고 대체로 그렇듯이 이런 말씀에 따른 일의 수순은, 문제의 잠복과 확대 재생산일 뿐이다.

나는 이번 병원 파업이 문제의 잠복과 확대 재생산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나무만 보다가 숲을 보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더 큰 문제의 일부일 뿐이고, 당장의 문제 해결에 급급하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의 원인을 놓치게 된다는 얘기다. 비유컨대, 파업으로 겪는 환자들의 불안감과 불편함은 빙산의 일각이요, 숲 속의 나무 한 그루다. 사람의 생체 리듬을 빼앗는 일상화된 3교대 근무, 비정규직 확대로 인한 불안정한 근무 조건, 공공성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공공보건의료기관의 현실, 주 5일 근무의 요구에 맞선 변형 6일 근무제의 강요, 이것이 빙산의 저변이고 나무를 둘러싼 숲의 그림이다.

의사를 의성(醫聖) 히포크라테스와 허준에,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에 비유하는 것은 의료인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기대치를 표현하는 것일 게다. 모든 의료인이 다 그에 값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들은 환자와의 만남 속에서, 세상의 주인인 노동자로서 긍지를 키워나가는 가운데, 다른 누구보다도 환자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환자의 곁에서 직접 그들을 돌보는 사람들이다. 모든 환자들이 응급 환자라지만, 그래도 의학적인 ‘응급’은 있고 의학적 ‘적시(適時)’란 것이 있다. 파업이 아무리 진행되어도, 나는 응급실이 비워지거나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들은 없을 것이라 믿는다. 파업에 참여하는 병원 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외면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병원 파업이 미봉됨으로써 더 많은 응급 사태, 더 많은 환자들의 고통을 부르는 병원 현실과 보건의료의 문제점이 감춰질까 두렵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경제 발전이, 이 순간에도 산업재해와 직업병으로 고통 받고 숨져가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삼은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병원 노동자들의 어려운 노동 환경과 고용 조건을 담보로 당장의 불편함을 해소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출산을 앞둔 어느 간호사의 유산은, 눈에 띄는 사례일 뿐이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미국 의학연구원은 미국에서 한 해 동안 병원에서 발생하는, 예방 가능한 의료과오(medical error)로 인한 사망자 수가 44,000-98,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낮게 잡아도 교통사고, 유방암, 또는 AIDS로 사망하는 미국인의 수를 웃돈다. 의료과오 '전염병(epidemic)'으로까지 불리는 이러한 상황을 빚어낸 첫째 원인은, 체계가 없는(non-system) 미국의 의료체계다. 좋게 말하면 다원화된, 솔직히 말하면 분절된 미국의 의료체계 아래서 환자들의 병력과 상태는 옳게 이해되기 힘들다. 나아가 진료 과정을 들여다보면, 의료진의 업무량 과중, 부적절한 업무스케줄, 동기부여 부족 등 원인들이 지적되고 있다.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일까. 적어도 병원 의료의 수준은 일급이라는 나라만의.

그 점이라면, 병원 노동자들이 제기하는 파업의 전제가 그 점이라면, 간암을 앓고 있는 환자의 보호자의 처지에서도 나는 병원 파업을 지지한다. “의사 선생님도 아프세요?” 일반외과 병동을 돌던 인턴 시절, 몸살로 근육과 뼈마디가 쑤시던 내게 한 환자 분이 하신 말씀이다. 그 파업은 더 많은 환자에게 건강과 생명을 가져다줄 것이다. 건강하고 활기찬 병원 노동자가 일하는 병원에서라면, 환자들은 틀림없이 병을 치료하고 생기를 얻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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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아

    전쟁할 당시에는 어려움에 처한 이라크인들을 구한다고 했으면서 승전한뒤에는 이렇게 인간이하의 취급을 할지는 생각도 못했어요. 정말 너무도 하네요... 김선일씨 사건도 어찌보면 미국에 이러한 점으로 우리나라가 당한것이라고, 생각해요!!! 왜 우리나라가 잘못된 길을 가는 미국정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나요!!! 정말로 답답합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라크인이나 한국 사람이나 미국이라는 나라에 희생되는 불쌍한 양한마리 같습니다.. 너무나도 답답합니다...

  • 진영이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글이네요.

  • 두시간

    좋은 글 계속 부탁해요. 퍼 날러야지.

  • 오동지

    우리 동네는 쪼맨한 촌동네 인데도 차가 없으면 살기가 힘든 동네로 변해가고 있어요. 예전에 동네 마다 한 개씩 있던 구멍가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거든요. 우리집에서 2.5km정도 떨어진 대빵만한(물론 서울의 그것과 비교하면 쨉도 안되지만--;) 마트 때문에요.
    이제 우리 동네 애들은 길에서 100원 주어도 과자 사먹으러 달려갈 수 없게 되었지요. 마트는 너무 머니까요. 운전을 할 줄 모르는 남겨진 할머니 할어버지들도 이제 반찬꺼리를 사려면 전보다 고생이 커져버렸구요.

    은숙이 누나 말대로 자본가나 행정가들이 우리의 삶을 폭력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차가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 자체도 참 끔찍하지만 이미 그렇게 만들어 놓고 돈 없으면 차도 못타게 하는 세상은 더 끔찍합니다. 돈 없는 야생동물들이 살 곳을 점점 잃어가는 것처럼 돈 없는 사람들이 살 땅도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 고도리

    나이먹어서 클래식 듣는 사람은 먼감?

    우리집은 농사꾼집안이었고, 여러가지 음악을 라디오로
    접하다가 요즘은 클래식을 듣는데....

    이상한 논리군요...

  • 산업예비군

    본인은 클래식 음악을 어려서부터 즐겼다. 그러나 본인이 상류층 내지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것은 아니다. 반드시 자신의 계급적 조건이 자신의 문화적 취향까지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클래식 음악이 반드시 가장 권위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경제자본이 없는 노동자가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를 즐겨듣는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괜시리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음악은 본인의 취향에 따라서 듣고 편안함을 느끼면 되는 것이고, 우연히 브람스의 음악을 듣고도 하루 아침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취향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클래식 음악을 고상한 귀족의 안락함과 편안함, 부르주아 계급의 전유물과 등치시키지 않고, 이를 노동현장 내지는 생활현장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외화로 감상할 수도 있다. 베토벤이 귀족들 앞에서 곡을 연주했다고 해서 그의 곡이 곧 귀족들의 것은 아니며, 베토벤이 귀족을 위해 작곡한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베토벤, 브람스 등 많은 클래식 곡들 역시 노동자를 포함한 인류의 공동자산이다.

    본인은 조주은님이 "경제자본이 없는 노동자들은 위계화된 스타일과 취향 속에서 중산층 이상이 누리는 스타일과 기호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이 그나마 즐기는 문화는 천박한 것으로 위치지어져 있다"고 보는 관점속에서,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문화는 천박한 것으로 위치지어져 있다고 보고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고상한 문화'에 대한 정의를 누가 했던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조주은님 본인이라고 답하겠다.

    따라서 조주은 님의 주장처럼 "실로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공격과 다른 세상에 대한 대안은 계급별로 구별지어져 있는 취향과 스타일에 대한 경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그러한 경계를 인위적으로 없앨 수도 없을 뿐더러 계급별로 취향과 스타일이 구별되어 있지도 않다. 물론 계급적 조건이 많든 적든 개인의 취향과 스타일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음악을 포함한 예술이 개개인의 자유로운 인격의 발현을 담아 내고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 조주은님의 주장대로 계급과 출신, 성별에 관계없이 어느 누구도 다양한 악기에 대한 접근권과 연주에 대한 권리는 확보되어야 한다--악기에 대한 접근권은 계급적 조건이 상당부분 좌우한다. 그러나 연주에 대한 권리는 지금 확보되었다고 본다--. 여기에 곡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추가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 최근 무료로 곡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대부분 유료로 전환되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무료로 제공되던 곡이 상품화--자본주의의 특징이기 때문에 예상되었던 것이지만--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것이 최소한의 접근권을 확보하는데 있어서 필요조건일 것이다.

    여기서 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아버지들이 주말에 골프나 조기축구라는 문화생활을 즐길 때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때를 박박 밀어주며, 남성들이 심야에 감동적인 영화한편을 즐기며 문화적인 기호를 발전시켜갈 때 여성들은 직장일, 집안일로 녹초가 된 고단한 몸을 이불에 누이고 있다"는 조주은 님의 상황인식이다. 본인이 판단컨대, 여성들이 직장일, 집안일로 녹초가 된 고단한 몸을 이불에 누이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현 시기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신자유주의하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은 착취를 당하고 더 많이 희생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주말에 골프나 조기축구라는 문화생활을 즐기고 심야에 감동적인 영화한편을 즐기는 남성 노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부분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런 남성의 이미지를 대비시킨 것이 일면 이해도 되지만,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피지배계급은 현재 많은 사람이 생존경쟁속에서 조기축구할 시간을 제대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며, 아울러 절대빈곤으로 추락하면서 가족끼리 영화 한편 감상할 금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조주은 님의 눈 앞에 펼쳐진 "가족의 남녀간 여가를 포함한 문화생활의 위계가 여성들의 소외와 억압을 유지·재생산하는데 일조하는 것" 보다 훨씬더 생생한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 민노당원

    최근에 문화자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길래 안그래도 책좀 사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산업예비군님의 글은 논리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현재 피지배계급은 생존경쟁 속에서 조기축구할 시간을 제대로 확보하고 있지 못하며
    절대빈곤으로 추락하면서 가족끼리 영화 한편 감상할 금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거야 말로 심각하게 계급별로 구분되어져 있는 여가생활과 취향 아니겠습니까? 있는 놈들은 여가생활 한다며 골프치고 해외여행다니는데 피지배계급은 축구도 못하고 영화한편 감상 못한다니 말입니다. 그리고 제발 노동자계급 비하하지 마십시오. 저 제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이고 제 부인도 일하는데요. 지역에 있는 노동자들끼리 모여서 일요일에 공찹니다. 그리고 노동자들마다 다르겠지만 가끔 영화한편 보는 노동자들 많습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너무 낮춰보지 마십시요!!!

  • 길가다...

    -_-; 참...네..
    대충 글의 맥락과 요지를 파악하가 넘어가도 될 것들인데...

  • ..

    공감하기 힘든 글이군요.
    그 어려운 이론을 이렇게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끼워붙이시다니...

  • likebau

    그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위에서 얘기한 정도까지 내 정보가 수사의 대상에 올랐다는 것이 무지 기분 나쁜데요.

    혹 다른 방법을 동원해 이번 사태를 조사할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 실험의 정당성

    내것은 문자도 큰일이고, 남의 것은 실험도 권리가 된다면, 결국 , 빅브라더였던 자신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네 것이든, 내것이든,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하고, 내 것(취향, 혼자있을 권리, 이용당하지 않을 권리등)이 소중하듯, 남의 것도 소중하다는 공감이 있어야만, 사생활침해를 막을 수 있다.
    내것과 남의 것이 다르다는 극도의 이기심은 나도 결국 이용되는 누군가처럼 되어질 뿐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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