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책무

1.

5월 31일.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다. 서울 날씨는 맑은 편이었다. 강의가 있는 날이었는데, 비디오 자료를 보여주는 것으로 때웠다. 야구경기가 없어서 약간 심심했다. 일찍 잠이 들었다. 열사(熱沙)의 땅에서 뜨거운 증오의 열기가 소용돌이치는 와중에 내 나이 또래의 한 젊은이가 영문 모르고 빨려들어간 것은, 꿈에서도 알지 못했다.

6월 21일. 오전 중 자다가 <긴급 오늘 저녁 김선일씨 촛불집회>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김선일이 누구지?' 잠결에 그렇게 생각 한 번 하고 다시 계속 잠을 잤다. 오후에 깨어 인터넷에 들어가보고야 알았다. "나는 살고 싶다!" 울부짖고 있었다. 내가 잠을 자고 있거나 야구 중계를 보고 있거나 냉커피를 타고 있었을 그 어떤 순간, 찍었을 영상에서.

6월 22일 밤 10시 30분. 참세상 칼럼 쓰고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에 대한 대중적 반응,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어쩌구저쩌구... 김선일씨가 계속 마음에 걸렸지만, 상황은 오래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터넷 문자뉴스 창에는 생존확인과 협상시한 연장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래, 설마...' 일찍 일어난 탓에 졸렸다. 내일 아침에 퇴고하기로 하고, 10시 30분경 침대에 들었다. 그때 황혼의 주홍빛 해가 지고 있었을 저 먼 곳에서, 목이 잘리고 부비트랩이 걸린 시신이 막 발견된 참이었다.

6월 23일 새벽 2시 40분. 전화벨이 울려서 깼다. "으응... 왜?" "너무 열받아서 전화했어. 김선일씨 살해에 대해 면피식으로 보도하는 TV를 보고..." "뭐? 죽었어?" 나도 모르게 큰 외침이 나왔다. 잠은 순식간에 달아나고 나는 어둠 속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전화 저편에서 친구가 얘기해 주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TV를 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둠은 너무 짙었다. 불을 켤 수가 없었다....


2.

22일 밤 썼던 칼럼은 다 지워버리고, 며칠 동안 괴로워하다가 지금에서야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예상된 일이었던가? 예상된 일이었다. 이미 몇 달 전 동생과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주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가항의 필부가 예상했던 일을 똑똑하신 인사들께서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심지어 한 친구는 협상 무능이 아니라 정권이나 미국이 파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방기한 냄새가 난다고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파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몇 달 전 이런 일을 예측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극우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몰아치는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금 가기 어려운 대중적 이데올로기의 성역. 그게 두려웠기 때문에 한밤중에 소식을 알려줬던 친구에게 내가 마지막으로 물었던 것은 "그래서 지금 인터넷 게시판들은 어떤데?"였었다.

그런 조짐들은 보인다. 그날 네이버 폴과 다음 폴에서는 각각 '전투병도 파병'과 '파병 반대했으나 이제는 찬성한다'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을 기록했고(지금은 떨어졌다), '알라쟁이들 쓸어버리자'라는 섬뜩한 구호가 난무했으며, 한 게시판에서 '이라크 테러단체도 결국 우리나라 일제시대의 독립투쟁단체와 비슷한 거 아닙니까'라고 올랐던 글에는 '매국노, 너도 한국인이냐, 위장한 쪽바리는 가라'라는 쌍욕들이 쇄도한 끝에 삭제당했다. 몽고벌판 말발굽에 세계를 짓밟으며 '진출'했던 것이 우리 민족의 기상이라는 황당한 억지를 쓰던 조갑제의 기상을 이어받은 조선일보는, 테러리즘에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기상으로 세계만방에 이름을 떨치자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내가 두려워했던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기대수준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한국인 테러가 발생하면 파병철회가 힘을 받는 게 아니라 반대로 배타적 민족주의의 광풍이 휩쓰는 절망적인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중에 대한 불신이 심했는지도 모른다. 대중은 훨씬 이성적이었다.

아무리 재건부대니 치안유지군이니 하는 속임수를 써도 파병이란 글자 그대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 김선일씨는 전쟁의 희생자다.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다. 이라크인들은 전쟁을 하고 있으며, 한국은 그 전쟁에 참여하고 있고, 모든 전쟁에서 군인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더 크기 마련이다. 그리고 전시에 그러듯 일시적으로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릴지라도 사람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누가 김선일씨를 죽였는지. 불퇴전으로 단합된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조선일보의 선동에 말려들지 않고 있으며, KBS와 MBC가 반인륜적 테러단체를 비난하는 정권의 책임회피용 멘트를 각색해서 보여주더라도 속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할 일은 너무나 명확하다. 우리의 힘으로 파병을 철회하고 전쟁참여를 막아야 한다.


3.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면, 죽음에 대한 나의 정서적 반응은 오히려 무감동한 편에 속한다. 친지나 지인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크게 통곡하지도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간주했다. 임종을 지키거나 생명유지장치를 쓰는 것, 장례 형식 등에 대해서 내가 취했던 태도는 "어차피 죽은 사람이 뭘 알겠어? 뒤에 남은 산 사람들을 위한 책무 아냐?"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충격과 괴로움을 회피하려는 심리반응인지도 모르지만.

가까운 지인들의 죽음에도 그럭저럭 덤덤했던 나, 고 김선일씨와는 일면식도 없다. 김선일씨 개인의 문제로만 보면, 안타깝고 억울할 따름이지만, 사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횡사하는 죽음은 지금도 무수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죄책감이었다. 파병을 막아내지 못했던 것. 억울하고 안타까운 죽음, 애도의 심정, 이런 문제가 아니었다. 잔혹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영문모르고 끌려들어가 짓밟힌 죽음이 한둘이랴만, 지금 이 역사는 내가 살아가고 실천하고 있는 역사이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은 자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다. 죽은 사람은 지금 우리의 일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책무는 늘 존재한다. 전쟁참여를 향해 달려가는 이 순간 이 역사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가해자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상주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죽음 뒤 남은 삶들에 대한 책무를 걸머진 상주다. 그리고 살아있는 당신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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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인

    무반성적 애국주의가 덮는 윤리적 문제나 성적 억압, 기타 억압의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이 문제에 개입된 국제적 이해갈등의 측면, 패권국의 정부-대학-산업-미디어 복합체로 작동하는 제국주의 비판도 함께 제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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