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을 나누기에 적합한 나이란 것이 있을까? 사랑은 불시에 찾아온다고들 하고, 나이가 들었다고 애틋한 사랑을 느끼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처음 사랑을 나누기에 적합한 때는 아무래도 젊은 시절일 것이다. 첫사랑은 언제쯤 찾아올까?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을 잡은 20대 말? 아직 대학에 다니는 20대 초?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0대 말? 아니면 더 어린,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이야기에 따르면 첫사랑의 시기는 그보다도 더 빠르다. 만 14세,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로미오를 만난 나이다. 만 열 넷은 우리 나이로 열 다섯이다.
열 다섯의 사랑이라, 요즘 한국의 부모들이 이런 사랑에 빠진 자녀를 두면 그야말로 공황 상태일 게다. 열 다섯에 ‘연애질’? 아니 그런 길로 빠지면 학교며 학원은 언제 가고 대학 진학은 어떡한단 말인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짓이 아닌가. 하지만 이처럼 자녀의 사랑을 경계하는 한국의 부모들에게는 『춘향전』을 환기시키고 싶다. 성춘향이 이몽룡과 몇 살에 초야를 치르고 <사랑가>를 불렀던가?
혹자는 춘향이와 몽룡이, 줄리엣과 로미오는 허구의 인물일 뿐이라고 말하리라.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열 다섯의 사랑 나누기는 현실에선 더 흔하다. 단적으로 내 어머니가 시집온 것도 열 다섯 살 적이다.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은 조혼이 유행이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정신대 할머니들이 살을 떨며 고발하듯 당시는 처녀들이 나물 캐다가, 물긷다가 끌려가던 때, 과년(瓜年)한 딸을 둔 집안은 모두 공황 상태였던 것이다.
사랑 나누기가 정식 혼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 치고 ‘보리밭’, ‘삼밭’, ‘물방앗간’의 전설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도회처럼 다방이나 여관이 없는 시골에서는 남녀가 그런 으슥한 곳에 만나곤 하여 생긴 전설인데, 이따금 마을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던 처녀총각들이 춘향이나 이도령의 나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떨까? ‘연애질’의 빈도나 심각함으로 따지면 요새 젊은이가 더하지 않을까? 자식들을 둔 부모들은 그런 생각이 많을 거다. 혼전 연애 수준을 넘어서 혼전 성관계, 혼전 임신 사례가 늘고 있고, 미혼모의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으니 특히 딸을 둔 부모들의 걱정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부모들이 아무리 걱정을 해도 열다섯의 정렬을 막을 수는 없는 법, 지금의 현실, 과거의 추억, 역사적 사실 그 무엇을 봐도 젊은이의 삶은 이처럼 건강한 신체적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동서양의 고전에서 열 대여섯의 사랑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그린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사실이 이럴진대 왜 부모들은 자식들의 사랑 나누기를 ‘연애질’로 경계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왜 열 다섯 사랑을 공적인 사실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두어 해 전 한국영화를 전공한 프랑스인 학자와 나눈 말이 생각난다. 국내 한 대학에서 영화강의를 하고 있던 그는 파리와는 달리 서울에서는 밤늦게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여기 살고 있으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현상에 대해 궁금해했다.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해보니, 한국 사회의 열악한 복지와 깊은 관련이 있겠다는 결론이었다.
19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는 <코스비쇼>라는 인기 텔레비전 연속극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방영된 이 극은 흑인 코미디언 빌 코스비가 주연이었는데, 어린 아들 티오의 분가를 둘러싸고 부모 자식간의 갈등과 오해를 다룬 에피소드를 몇 번 내보낸 적이 있다. 아들은 열여덟이 넘었으니 독립하겠다고 하고 의사 아버지는 그게 못미더워 참견을 한다. 자연히 갈등과 오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런 내용은 당시 한국 시청자에게는 색달라 보였을 텐데,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식을 분가시키는 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한국 청소년이 부모와 헤어져 사는 것은 가정 위기나 파괴로 불가피하게 가출한 예외적 경우에 한정된다.) 반면에 <코스비쇼>에서 아버지의 참견이 코미디로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들면 자식은 따로 산다는 것이 기정 사실로 설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에서 젊은이의 분가나 독립은 사회보장의 일환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화된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80년대까지 미국의 18세 이상 젊은이는 돈이 없어도 독립이 가능했다. 사회보장 기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국서 유학을 하던 때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반지의 제왕>을 쓴 J. R. R. 토키언의 문학을 전공하던 대학원생 동료 하나도 그렇게 살았다. 당시 그는 방 한 칸 빌려 쓸 정도의 주거비용과 식비밖에 지원 받지 못했지만 그 정도면 월급을 벌기 위해 교육조교를 하지 않아도 되니 견딜 만하다고 했다. 그가 당시로서는 쓸모 없어 보이던 판타지소설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초생활을 보장해준 복지제도 덕분이었던 셈이다.
최근 들어와서 세계 도처에 ‘캥거루족’과 ‘방콕족’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장성한 자녀들이 독립하여 살지 않고 부모들의 그늘에 묻혀 사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사회주의 권의 붕괴와 함께 1990년대 이후 케인즈주의 국가가 제공하던 사회보장이 약화되고, 노동시장의 조건이 열악해져서 젊은이들의 독립이 불가능해져 생긴 현상이다.
나이 들어서까지 부모 품안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사랑은 어떻게 찾아올까? 요즘은 환경오염으로 성호르몬도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환경에서는 사랑의 자유도 줄어들 것이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는 말이 있듯이 젊은이들은 사랑을 나누려면 러브호텔에라도 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런 곳에 갈 금전적 여유가 있는 젊은이는 드물다. 옛날의 보리밭이나 삼밭, 물방앗간은 사용료가 없었다. 물론 주인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야 했지만 그 정도는 귓전으로 넘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오늘 열 다섯 풋사랑은 너무나 열악한 조건이다. 마리화나 문제로 삼밭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고, 수입 밀가루로 만든 가공식품이 늘어나면서 쌀밥조차 잘 먹지 않는 지금은 보리밭도 보리쌀에 대한 절대적 수요 부족으로 희귀한 공간이 되었고, 물방앗간은 관광상품일 뿐이다.
열 다섯 풋사랑을 위해 젊은이에겐 부모의 그늘을 벗어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성춘향과 이몽룡을, 로미에와 줄리엣을 사랑의 모델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은 불시에, 그것도 빨리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자기만의 방’, 그것은 청소년, 젊은이의 성 복지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사회적으로 보면 이것은 적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점 이후의 사회구성원에게는 의식주를 해결하는 지원을 국가가 해줘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보장하는 것, 그것도 국가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자녀의 대학 입학 걱정, 혼전 임신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부모들은 자녀의 풋풋한 사랑을 위해 오히려 국가를 다그쳐야 하겠다. 우리 아들 딸 마음대로 사랑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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