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용준]의 사회와 의료

한국 의료시스템이 붕괴되고 있다

WTO 출범이다, 서비스협정 타결이다,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개방 압력에 대하여 말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교육과 의료 개방은 경제자유구역 정책이라는 대단히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 정책을 총괄하는 보건복지부 관료들은 "의료시장 개방은 없다, 경제자유구역은 별개 문제로 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모두 의뭉스러운 짓거리일 뿐이다.

여러 사례들이 있지만, 경제자유구역 정책을 총괄하는 재정경제부가 어제 국민경제자문회의에 보고한 <서비스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살펴보면 상황은 분명해진다. 예컨대 "우선, 경제자유구역 등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자 유치 추진. 기타 지역은 지역특화발전특구를 활용, 규제 완화를 통해 개방 효과의 파급을 적극 유도"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WTO 서비스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 쌍무투자협정 체결은 국제적, 적어도 양국간 이해 관계의 조율의 필요성 때문에 그 속도감이 떨어지고 있으며, 특히 서비스협정의 경우에는 타결 전망이 결코 밝지만은 않다. 상대적으로 경제자유구역 정책이 교육 및 의료 분야 개방의 선도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경제자유구역은 참여정부의 '동북아경제 중심 건설' 과제의 열쇠어 가운데 하나다. 이 점에서 청와대와 재정경제부가 앞장서는 경제자유구역의 개방 드라이브는 장난이 아니다.

이렇듯 개방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예상되는 개방의 부정적 후과 때문이다. 경제자유구역의 의료 개방을 그려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성싶다.

1. 경제자유구역의 외국인 투자 촉진을 위해 외국인을 위한 편의 시설이 확충되어야 한다.
2. 그러므로 일정한 규모의 일급 외국계 병원 유치가 필요하다.
3. 이런 병원을 유치하려면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3-1. 외국인 환자는 얼마 안될 것이니 내국인 환자 진료를 보장해야 한다.
3-2. 의료수가 수준과 비급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므로 민간의료보험 적용이 필요하다.
3-3. 과실 송금이 가능하려면 영리법인 의료기관을 금지하는 의료법 적용 특례를 적용해야 한다.

호미로 막을 것을 일부러 가래로 막아 판을 키우는 느낌이다. 편의 시설 확충을 위해 외국계 병원 유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어느 외국인도 요구하지 않은 비약이다. 예상되는 외국인 환자 수가, 대학병원의 외국인 진료소를 확충하는 것으로 부담 못할 수준도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외국계 병원을 유치하려면 내국인 환자 진료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적과 수단이 바뀐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슬쩍 끼워넣는 것이 예의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강화 문제'다. 사실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경제자유구역에 외국계 병원 유치 어쩌구 하는 수작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문제는 경제자유구역의 범위를 넘어선다. 경제자유구역에 외국계 병원을 유치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이미 다음과 같은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1. 국내 의료계가 외국계 병원의 내국인 환자 진료를 반대한다.
2. 국내 의료기관에 대해서도 영리법인 의료기관 설립 허용을 요구한다.
3. 영리법인 허용과 함께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주문한다.
4. 건강보험의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모든 의료기관을 건강보험 요양기관으로 법적으로 강제 지정하는 것) 폐지를 요구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사실 이 정부의 바램이기도 하다. 이미 전임 복지부장관은 영리법인 허용이나 민간의료보험 도입을 시사한 바 있고, 의료 개방이나 영리법인 허용에 대한 경제 단체나 경제 관료들의 입장은 매우 확고하다. 사실 병원계와 의료계의 입장은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난다-그들에게는 더 가혹할 수 있는 자본의 통제에 들어가는데도-는 막연한 기대 심리가 존재한다.

경제자유구역에 외국계 병원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영리법인 의료기관 허용, 민간의료보험 도입,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폐지 등의 문제는 우리나라 의료의 틀에 근본적인 지각 변동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국민의 건강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쟁 논리를 향한 시스템의 변화는, 일단 일어나면 되돌리기 쉽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 악영향은 즉각적이며, 사회적 효과의 누적으로 인한 건강 상의 악영향도 배제하기 어렵다.

단언컨대, 이 문제는 근현대 한국 의료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큰 변화, 시스템의 붕괴로 가는 출발점이다. 의료 개방에 대한 정부와 자본의 은폐된 욕망과, 의료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누적된 불만과 불신은 이 붕괴 과정을 한층 촉진하고 있다. 한국 의료의 진정한 위기다.

* 칼럼에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상세한 서술은 박주영, 최용준. 임박한 의료시장 개방 : 성격과 전망. 진보평론(http://jbreview.jinbo.net) 17호. 2003년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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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의료 , 개방 , wto , 의료개방 , 최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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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탄

    정말 날카로운 눈이십니다.

  • 두두

    학교 다닐 적, 여성학 세미나 할 때 선후배들과 분개하며 나눴던 얘기로군요.. 간만에 들으니 반갑습니다..

    몇 년 전에나, 지금이나,
    참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그대로인 것들이 많습니다..

  • 새벼리

    피플타임즈 (http://www.peopletimes.net/) 새벼리라고 합니다. 강내희님의 글, 고맙게 읽었습니다. 외국어로 된 텍스트나 필름들은 원어 그대로 읽혀지는 게 올바르다고 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어대로 읽을 수 없는 내국인이 많으며, 그런 이유로 '번역'이나 '더빙'산업이 발전해 온 것 아닌가 합니다. 또한, 내국인의 편의를 위한 번역이나 더빙은 원작자의 고유한 '언어'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옮기는 이의 감성이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제2의 창작'작업이라 부를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번역이나 더빙은 그 자체로 이미 제2의 창작행위라는 것이지요. 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번역자나 더빙작업자의 '문화적 수준'이라는 생각입니다.

    어쨋든, 강내희님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인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도 대중매체의 책임이 크다>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런 강내희님의 주장이 더빙 영화를 사례로 삼으면서, 마치 '외국의 경우는 안 그런데, 한국은 지극히 봉건적이다' 라는 것처럼 읽혀지는 게 제 독해력만의 문제일까요?

    번역이나 더빙산업의 저열함을 지적한다거나 혹은 번역이나 더빙산업 종사자들의 후진 봉건의식을 지적하는 것과 <외국어에 없는 남녀 차별의 표현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한국문화의 문제>라고 진단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강내희님의 윗 본글 주제의 기반이 되는 전제가 고약스럽군요. 외국어에는 없는 남녀차별의 표현이라니???

    저의 이러 저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사회적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언어적 불평등 관계를 재생산하는 데 대중매체의 책임>을 되묻는 강내희님의 메세지에 동의하기에 유익하게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피플타임즈 미디어 비평>란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더운 나날, 건필하시길.

  • 윤희원

    윗글의 비판 지점에 동의하며...
    몇 가지 더 남깁니다

    말은 어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은 상대방에게 의사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나타내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기에 '언어'라는 체계는 언제나 상호간의 구체적인 관계,즉 그 속에서의 '권력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말이 가진 권력은 언제나 상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말인데도 상호간의 위치에 따라 어떤 경우에는 폭언이, 어떤 경우에는 성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아무렇지 않은 친근한 의사 표시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남성은 말을 놓고 여성은 말을 높이는 것, 한국 사회에서는 흔하디 흔한 현상입니다. 님은 여기서 나타나는 '권력', 그리고 이 권력을 재생산해내는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발견하셨습니다.

    님도 써놓으셨듯이 언어 사용의 문제 역시 계급적, 인종적, 종족적, 성차적, 세대적 '차별'이 각인된 문화적 코드가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용하는 데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님은 자신이 줄기차게 역설하신 내용에 위배되는 오류 몇 가지를 범하신 것 같습니다. 님이 쓰신 글의 범위에서 확대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몇 가지 지적하려 합니다.

    님은 번역문화 나아가 삶 속에서 드러나는 대화 속에도 포함되어 있는 남성 중심적 권력, 번역자와 더빙작업자를 포괄하는 문화 산업 전반에 퍼져 있는 한국 사회의 여성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나마의 성평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서구 사회에 비하면, 가부장적 풍토를 쇄신시키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인 것 같기도 합니다. 개인적 의견으로는, 서구 사회의 모습이 ‘여성/남성이 동등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혁신하지 못하는 성평등 이데올로기는 서구사회나 한국 사회나 명확히 ‘존재’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어디까지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통용되고 있는가’, 즉 확산의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요. 그것을 가늠할 때, ‘언어 속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불평등적 표현은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과 남성간의 성관계가 자유롭다’ 라는 현상들만이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영어에도 나타납니다(man같은), 낙태와 피임으로부터 여성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자유롭지 못합니다.(물론 복지나 제도적 차원으로부터 배려를 받고 있는 서구 사회의 여성들은 한국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월등한 삶의 -물질적-조건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언어를 포함하는 사회적 관습이 바뀌어 가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님께서 고치셔야 할 가장 고질적인 언어 습관이 있습니다. 바로 '매춘'이라는 용어입니다. 매춘(賣春)은 성을 파는 의미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매춘이라는 행위 자체는 성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사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을 사고 파는 행위인 '매매춘(賣買春)', 혹은 가장 명확한 표현인 ‘성매매(性賣買)’로 고쳐 사용해 주십시오.

    또한 님도 언급하셨듯 가장 구체적인 삶의 관계 속에서 이런 대화 방식이 재생산되고 있다면, ‘주변 여성이 눈치 채기 어려웠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재서술이 필요한 듯 싶습니다. ‘눈치 채기 어려울 수도 있었겠으나’, 그들에겐 이미 자신의 경험 속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되어 온 일들일 것입니다.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여성들 자신이 그런 처지 속에 있으면서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딘 존재로 일반화되게 읽힐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은 여성들이라면, 이미 느끼고 있는 문제입니다. ‘감수성’만 자극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여성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내는 언어 사용과 이를 지배하는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합니다. 님도 토론과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지만 무엇보다 주변부에 있던 여성들, 그들에 대한 억압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 수반되는 토론과정이 필요하며 이것이 여론화되고, 사회적 분위기로 장착되는 과정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시민

    몸 섞고 나서의 변화가 어디 말뿐 일까요. 다음번의 모든 행위가 그렇지요. 문제는 남여의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차이라고 봐야 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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