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다이너마이트 역사

이상이 쓴 소설 ‘날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내가 쓰는 이글은 이렇게 시작하려 한다.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광주를 아시오? 나는 불쾌하오. 이런 때 ‘민주’까지가 불쾌하오.”

곧 태풍이 닥친다 했다. 굵은 빗줄기가 내리던 6월 중순, ‘한국현대사와 노동자‘ 강좌를 함께 하고 있던 우리는 광주로 갔다. 노동조합 간부, 그리고 해고 노동자와 함께 1박 2일 역사기행을 간 것이다. 비에 젖어 짙푸른 너른 들판의 벼와 아담한 숲, 드문드문 속살을 드러내는 검붉은 황토, 전라도 풍경은 아름다웠다.

진행자 노릇을 해야 했던 나로서는 어디 여행 가듯, 그렇게 홀가분하게 역사기행을 할 수는 없었다. ‘광주 현대사와 노동자’, 주제마저 무겁다. 여느 ‘문화답사’와는 밑뿌리부터 달랐다. 그래도 우리는 ‘천불천탑’이 있다는 화순 운주사에서 ‘못생긴 부처’와 ‘누운 부처’도 보았다.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를 튕겨내는 빼곡한 대나무 숲을 지나 소쇄원에 들러 옛 정취를 느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무리 풍경이 좋고 옛 정취가 향기롭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덤일 따름이다. 우리 역사 기행의 주요 목표는 광주 노동운동사였다.

담양에서 자는 하룻밤, 줄곧 광주에서 노동운동을 하셨던 박동환 님을 모셔서 증언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해방’ 뒤에 이 땅에 들어와 ‘좌익’ 노동운동을 하신 분이다. 특별히 좌익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쪽이 정의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4·19 뒤에 다시 광주 종연방직에서 노동조합투쟁을 하셨다. 그가 증언한 노동운동 역사도 소중했지만, 몇 가지 재미난 사실을 더 얻어들을 수 있었다.

그가 일본에 있었을 때 거리에 나온 미군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광주에 와보니 미군이 모두 중무장을 한 것을 보고 그들이 점령군임을 처음부터 알아챘다고 말했다. 그가 증언 중간에 대뜸 물어보았다. “개똥 먹어보았소?” “개똥도 약에 쓰려고 찾으면 없다”는 속담은 있지만, 설마 개똥을 먹기야 했을라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언젠가 그는 지독한 우익 테러를 당했단다. 그때 어머니께서 아들을 살리려고 개똥으로 술을 담아 먹였다 한다. 노동조합 위원장을 하던 그가 5·16 뒤에 해고되어 ‘공사판 노가다를 뛸 때’ 일당 120원을 받았단다. 세끼 밥 45원, 진달래 담배 한 갑 15원, 왕복 전차비 10원, 숙박비 50원, 이렇게 돈을 쓰고 나면 한 푼도 남지 않았다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선배 노동자가 살아왔던 삶에서 역사의 한 자락을 엿보는 것도 중요했지만, 모름지기 역사기행이라면 현장에서 직접 역사를 느껴보아야 한다. 이번 역사기행에서는 화순탄광을 핵심 고리로 잡았다. 화순탄광으로 가는 길에 너릿재를 먼저 들렀다. 너릿재는 어떤 곳인가.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식’을 하려고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광주를 갈 때 넘던 고개이다. 그들은 “완전 독립” “쌀을 달라”는 프랭카드를 들고 있었다.

“지난(1946) 8·15해방 기념 당일 전남 광주에서는 민전산하의 민주주의 각 정당단체가 중심이 되어 광주에서 처음 보는 3만여 명을 동원 대기념식이 있은 후 용감한 ‘데모’가 있었는데, 이 ‘데모’에 참가하고자 광주에서 70리나 떨어진 화순탄광 노동자 1140명은 이날 새벽 3시에 출발·······‘데모’가 끝나서 해산할 즈음에 미군은 노동자에게 빨리 탄광으로 가라고 총칼로 무지하게 찔러서 40여 명의 부상자를 냈는데 특히 김판석 동무는 칼로 다리와 머리를 사정없이 찔리우고 깊은 골짜기에 떨어뜨리어서 즉사하고 말았으며······”(1946.8.23. 전국노동자신문)

너릿재에 나무 장승 두개가 서있다. 언제 세웠을까. 나그네를 지켜주는 ‘거리신’ 역할을 했음직한 그 장승은 너릿재를 지나던 화순탄광 노동자를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그래도 민중의 오랜 염원을 싸안고 그 장승은 지금껏 굳세게 너릿재에서 버티고 있다.

장대비 속에 장승을 남겨두고 화순탄광으로 갔다. 화순탄광을 둘러보며 노동자에게 일제의 수탈정책을 설명하고 ‘공장자주관리운동’도 띄엄띄엄 설명했다.

“해방되니 일본 놈들 두말 못하고 쫒겨갔제. ······우리도 좀 살아보자고 맘먹고 직장관리 자치위원회를 곧바로 맨들었제, 긍께로 우리가 탄광 주인이 된 것이었구만·····”

이런 증언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어딘가에 ‘공장자주관리운동’을 몸소 겪은 몇 분이 살아계실 텐데, 찾을 길 없어 증언을 듣지 못했다. 생생한 역사는 이렇게 사라지나 싶었다. 마음 언짢았다.

신발 바닥에 잔뜩 달라붙은 검은 탄가루를 고인 빗물에 씻어내며 탄광 정문을 나올 때였다. 저만치 웅크리고 앉아있는 조그마한 비석이 내 눈에 얼핏 들어왔다. 으레, 회사 연혁 따위를 세긴 것이겠거니 하고 심드렁하게 그곳으로 가보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5· 18민중항쟁 사적비’가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놀라 쳐다보는 내 눈에 박힌 글귀는 더더욱 놀라웠다. 쿵쾅쿵쾅 심장을 뛰게 하고, 휙하니 내 머리를 헤집는 그런 내용이 거기에 적혀있었다. 1980년 5월 21일 밤 9시,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다이너마이트를 8톤 트럭 7대로 날랐단다. 그 다이너마이트가 ‘해방 광주’를 지켰단다. 아! 부끄러워라. 나는 이 사실조차 몰랐었다. 평생 잊지 못할 ‘화순탄광 다이너마이트 사적비’를 나는 이번 역사기행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보았다. 생생한 역사는 이렇게 살아있구나 싶었다. 마음 놓았다.

역사기행 첫날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아주 뜻하지 않게 ‘다이너마이트 사적비’까지 사진에 담았으니 마음 뿌듯할 밖에. 그러나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국립 5·18묘지’를 들렀을 때 문제가 생겼다. ‘민주의 문’을 지나 묘지로 들어서니 엄청나게 크고 뾰족한 탑이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고 그 뒤에 열사들의 무덤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뜨르르한 정치인들이 참배했다는 ‘국립 5·18묘지’ 앞에서 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 하나 부르지 못했다. 뿔뿔이 흩어져 그저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을 따름이다. 왜 그랬을까. 한 선배말로는 기념탑이 남근을 닮았고 어찌 보면 파시즘 냄새가 난다고 했는데, 거기에 주눅 들어서였을까. 기념탑으로 걸어가는 길 한 복판에 “김대중 이회창 고건 김종필”, 이 네 분이 ‘기념식수’를 해놓았는데, 우리는 미처 꽃 한 송이도 준비하지 못해서였을까. 아니면, 화순 탄광 ‘다이너마이트 역사’를 ‘국립 5·18묘지’에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민주의 문’을 나오면서 나는 확실하게 알았다. “오늘의 ‘민주’에 내일의 ‘광주’가 갇혀있구나. 미래의 ‘참 민주’를 열어가야 할 노동자는 아직 ‘갇힌 광주’ 앞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구나.”

이상이 쓴 소설 ‘날개’는 이렇게 끝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내가 쓴 이 짧은 글도 그렇게 끝맺으려 한다. ‘광주’, 노동자와 함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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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연주

    비석에 새겨진 글을 읽으며, 내가 알고있던 광주항쟁이 헷갈린다.
    도대체 알려진 사실과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어디가 역사인가?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 또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정말, 제대로 쓴 광주항쟁의 역사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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