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섭]의 밑에서 본 세상

밥꽃양을 기억하기 위하여

미디어참세상이 열린 직후 칼럼 필자 명단을 보다가 몇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20명에 이르는 필자 가운데 여성은 고작 4명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이어 한동안 잊고 있던, 어쩌면 잊고 싶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글은 내 기억속에서조차 희미해져가는 '밥, 꽃, 양'을 다시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노동자 영상보고서 - 밥, 꽃, 양'이 있다. 1998년 여름 울산 현대자동차 총파업 직후 정리해고되어 3년 가까이 복직 투쟁을 벌인 식당 소속 여성노동자 144명의 투쟁을 그린 영상 기록이다.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완전한 원직 복직을 쟁취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지만 그럭저럭 일단락됐다.(2001년말 '인물과 사상'에 쓴 글의 잘못을 뒤늦게 정정한다) 그래서 외부인에겐 잊혀져가는 사건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3년여 동안 이들의 투쟁을 기록한 '밥, 꽃, 양'이 2001년 9월 제2회 울산인권영화제 상영작으로 결정되면서,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9월7일 임인애, 서은주, 홍은영 감독 등으로 구성된 '라넷'이 영화제 조직위의 사전검열기도에 항의해 상영을 거부한다고 밝힌 것이다. 조직위쪽에서 이 영상보고서의 한 장면이 문제가 된다며 '사전 시사'를 요구했으며, 이는 인권영화제의정신을 훼손하는 검열 행위라고 라넷은 상영 거부 이유를 밝혔다. 문제가 된다는 장면은, 98년 총파업이 277명의 정리해고 합의로 마무리되기 사흘전인 8월 21일 집회에서 식당 여성노동자가 마이크를 빼앗기면서 발언이 제지되는 부분이다.

라넷의 상영거부 선언 이후 나온 조직위쪽 인사들의 설명은 종잡을 수가 없다. 사람마다 말이 달라지고, 사실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또 바뀌고, 결국 조직위는 공식 인터넷사이트 게시판을 폐쇄하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영화제마저 무산됐다. 관련 단체인 울산인권운동연대는 활동을 일시 중단했다. 이런 와중에 두 달 동안 발표된 성명서와 관련 글만도 100건이 넘는다고 한다.

게시판을 폐쇄하자 라넷은 'larnet.jinbo.net'이라는 검열 항의 사이트를 만들었고, 논란과 검열 항의는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이 항의 사이트에 모였던 이들은 그 해 12월 서울에서 '밥꽃양 이야기 모임'을 열었고, 2002년 3월 31일 서울 이화여대에서 상영회를 개최했다. 이 상영회에는 500명을 훨씬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노사모' 회원 몇몇은, 그들이 좋아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나가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밥꽃양'은 수많은 사람을 서로 다른 이유로 힘들게 했다.

많은 운동단체들이 어떤 형태로든 정리해고와 영화 검열 논란에 얽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이 사건은 복잡하다. 복잡함은 인맥과 관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노조 내부에서 나타나는 여성 등 소수자의 소외 문제, 노조집행부와 평조합원의 의사소통 문제, 연대의 문제, 인권의 문제 등등 수많은 쟁점들이 고리처럼 얽혀있다. 그 무엇보다 분명한 쟁점은, '여성=비숙련 노동자'라는 폭력적인 배제의 논리가 효율을 앞세운 자본에서 시작돼 국가를 거쳐 노조 내부까지 한치의 주저함 없이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연결고리는 미세할지언정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검열 파문 3년, 정리해고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문제 하나 제대로 풀린 게 없다. 게다가 밥꽃양 사태에 대해 분명히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람 이야기조차 별로 들은 바 없다. 큰 스승 한 분 이야기를 빼고는. 물론 내가 보고들은 것이 적은 탓이리라.

사실 이렇게 늘어놓고 있는 나 또한 내세울 게 없기는 마찬가지다. 또 내가 익숙한 건 화면속 밥꽃양일 뿐이지, 질기도록 긴 그 여름날의 밥공장이 아니다. 그래서 밥꽃양에 대해 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자신이 없다. 하지만 2004년 7월 20일로 '검열거부 1048일'을 기록한 채 버티고 있는 'larnet.jinbo.net' 사이트를 외면하는 것은 몇 배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 밥꽃양은 아직도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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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 , 밥꽃양 ,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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