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사회의 풍경

20여 명을 살해했다는 용의자가 붙잡혔다. 정치적 사안도 아니고, 선정적 호들갑에 부화뇌동할 것도 없는 단순한 범죄사건이다. 그러니 참세상 칼럼에 쓸만한 주제는 아닐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도 이에 대해 뭐 특별한 입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건’은 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고, 사건을 둘러싼 ‘반응’은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그린다. 마치 수정구슬 속의 소우주처럼, 사건과 사건을 둘러싼 풍경은 한 사회의 축도를 비추는 영상이다. 그걸 들여다보며 나는 실소하고 의아해하기도 하고 착잡해 하기도 했다. 그 정리되지 않은 단상들이나마 끄적거리려 한다. 결국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 사회의 풍경화라면, 그 직소퍼즐의 조각 같은 단편들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첫 번째 단상, 단순무식성에 대해

나는 일부 네티즌들의 비아냥처럼 ‘사회 핑계만 대는 단순무식한 좌파’인 모양이다. 분명 용의자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붓기보다는 사회탓을 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얘기는 굳이 대꾸할 게 없다. 그러나 어떤 기사에 인용된 것처럼 무차별 살인이 ‘선진국형 범죄’로 유형화될 수 있다면, 이미 개인적 연유와는 별개로 ‘사회적 사실’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어차피 악마적 개인성이야 어찌해 볼 바 없는 것이다. 우리가 천착할 수 있는 건, 소위 선진국 즉 고도화된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극도의 소외 상황에 대해서다. 이건 핑계가 아닌데, 사회가 개인에게 책임이 있다면 나 개인도 사회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단순무식함이 그런 데 집착한다면, ‘그들’의 단순무식성(또는 잘 계산된 의도?)도 마찬가지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몇몇 신문들은 겉핥기라도 실어주기 마련인 사회비판을 애써 외면해가며 시종일관 ‘잔인무도한 살인마’를 부각했으며, 난데없이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사형제폐지 찬반 폴을 실시했던 네이버의 행동은 한 덧글이 지적한 대로 ‘유도설문’에 가까웠다.
불우한 가족 환경과 이혼 등 가족해체에 원죄를 들씌웠던 몇몇 보수주의자들의 논리도 쓴웃음을 짓게 했다. ‘건강한 가족에 건강한 개인이!’이라는 표어는,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누구의 가족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은폐한다. 계급과 성의 문제가 교차하는 장으로서 가족에 대한 이른바 건전가족론의 이데올로기성에 관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번 사건의 경우 그닥 가족에 귀결시킬 건덕지가 많지 않았음에도 예전 일까지 들춰내며 어거지 쓰는 데에는 실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이란 만병통치약, 아니, 차라리 모든 문제점을 던져놓고 손 털어 버리는 쓰레기통이다. 그래, 과연 누가 단순무식한 것일까? .......^^;

2. 두 번째 단상, 궁금증과 의아함

보도된 내용들을 보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왜 인권침해의 쟁점이 제기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었다. 용의자에게 미결 사건들을 덤터기 씌울지 모른다는 우려만은 아니다. 그건 그래도 법정에서 가려질 테니.

경찰의 얘기에 따르면, 용의자가 사귀던 여인에게 전과자라는 사실이 들통나 차인 것이 여성 살해의 시작이랬다. 그리고 그 사실이 들통난 것은 함께 여행 중에 불심검문에 걸려서였단다. 여행 중에 흔히 당하는 불심검문만 해도 심각한 문제인데, 그렇게 당한 불심검문-신원조회 내용이 동행자에게까지 공개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인권침해 아닌가?

그러나 이 정황에 대해 해명하기는커녕, 언론들은 오히려 하나같이 경찰의 무능력(?)을 질타했다. 불심검문 때나 절도혐의로 입건되었을 때, 가택수사 등 철저한 조사를 했다면 살인범임을 밝혀낼 수 있었을 거란다. 아니, 현장에서 몇만 원 훔치다가 들킨 사람에게 가택수사를 하고 아무런 증거와 연관성도 없는 살인혐의를 추궁한다면 이게 될 말인가? 그가 전과자라서?

내 입장이라 상상해 보면 소름 끼치는 일이다. 길 가다 불시에 검문당하고, 신원조회 내용이 동행자에게 공개되고, 사소한 일로 경찰서에 가기만 하면 뜬금없이 살인혐의를 추궁받고…

나는 이 모든 정황이 정말 궁금하고 의아했지만, 누구도 이런 점들을 질문하거나 해명한 것을 보지 못했다. 너무나 사소해서일까? 그런데 나 혼자만 궁금해 하는 정말 사소한 일인 것일까? .......-.-a

3. 마지막 단상, ‘보도방’이란 단어

내가 그 단어를 처음 들은 건 10년 전이니, 언제부터 사용된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정확한 어원도. 내가 그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수습기자로 경찰서를 돌 때였다. 술취한 아저씨들이 널부러진 밤의 경찰서 풍경에 익숙해질 무렵, 우중충한 형사계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고 앳된 소녀들이 우르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옆에는 몇몇 남자들이 조서를 받고 있었고. 보도영업 단속이 있었던 거다. 보도라는 말이 보지도매의 준말이라는 걸, 그때 경찰에게서 들었던가, 선배 기자에게서 들었던가?

유래가 정확한지 확인할 길이야 없지만, 그 뜻을 처음 들었을 때의 기분은 참혹한 것이었다. 그런 후 10년 만에 그 단어가 여기저기 울리는 것을 다시 듣는다. 그것도 참혹한 사건과 함께. 언어의 참혹성과 몸의 참혹성, 그 둘은 별개가 아니다. 남근의 폭력성은 언어와 몸에 참혹하게 각인된다.

성기로 환원된 여성의 몸은 ‘도매금’이란 말이 지칭하듯이 가장 하찮은 상품으로 구매자의 손에 쥐어진다. 내키는 대로 쓰고, 때려 부수고, 그리고 토막을 낼 수도 있는 것이, 도매금으로 넘어온 싸구려 물건이다. 극단적인 예라고? 모른 척 하진 말자.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는(그리고 경험하는?) 얘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담론에서 인간으로서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용의자의 정신분석을 하려는 건 아니다. 사회 핑계만 대는 단순무식한 나는, 정신분석을 하려면 이 사회의 정신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골적이든 좀더 점잖은 어조든 ‘창녀’는 그런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무수한 게시판 글들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보도방’을 입에 올린 신문들은, 용의자가 ‘일반 여성’도 살해했을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니까 성매매 여성들은 ‘일반’ 여성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여성과 성기로서의 여성이라는 이 구분. 나는 운 좋게 일반 여성에 속해 있다고 가슴을 쓸어내릴 수가 없다. 나 역시 몸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므로. 이 사건이 참혹하다면, 그리하여 이 사회가 참혹하다면, 그 참혹성은 내 몸으로 돌아온다. 보도의 세상에서, 나와 내 몸은 과연 인간일까? 어디까지 언제까지 인간일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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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티고네

    오랜만에 들어와서 글 읽어보다가
    한글자 남기고 갑니다.

    강한 것은 아름다운가...라는 그 마지막 말에
    정말..정신이 번쩍 듭니다.

    항상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하구요~
    끝으로..이 글..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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