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동화]의 이라크통신

9월 4일, 계속되는 폭탄 공격

10시쯤 살람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오늘은 아침부터 많이 바빴어요. 하이달이 아침 7시 반부터 와서 인터뷰할 사람들(알 사드르 거주민)을 소개해 주어 인터뷰를 했고 그 들이 가자 마자 살람이 와서 앞으로 할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지요.

갑자기 "쿠~~~웅" 살람과 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주위를 살폈지요. 유리창은 깨지지 않았어요. 저는 바로 카메라를 집어 들고 옥상으로 향했지요. 살람도 뒤 따라 왔구요. 옥상에서 쳐다보니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려가는 게 보였어요. 하지만 건물에 가려 폭탄이 터진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었지요. 하지만 대단히 가까운 곳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요.

폭탄이 터진 곳으로 몰려가는 사람들

바로 살람과 함께 밖으로 나갔지요. 시간이 조그만 지나면 미군들이 와서 전체를 통제할 테니 그 전에 무슨일이 발생했는지 알아보려구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가면서 살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물어보더군요.

장소는 3일전에 있었던 폭탄사고와 동일한 도로였고 이전의 폭탄사고는 저희 집을 기준으로 약간 왼쪽으로 20미터 떨어졌는데 이번 폭탄 사고는 오른쪽으로 약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고 이전 사고와 비슷하게 도로에 매설된 폭탄이 터진 것이었어요.

도로 한 복판에서 있는 분리대 사이에서 폭탄이 매설되어 있었고 이게 터졌어요.

주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미군 차량이 지나갈 때를 노린 듯 했지만 미군의 차량이 지나가고 난 후에 터져서 미군의 피해는 없고 이라크 인 두 명이 사망했고 수명이 부상당했다고 하더군요.

자세히 가서 보고 싶기도 했지만 벌써 이라크 경찰들이 총구를 들이대면서 사람들을 제지하기 시작했고 괜히 한국인의 존재를 알려서 좋을 것 없을 것 같아서 잠깐 동안 지켜보다가 살람에게 ?살람, 돌아가자!?라고 하였지요.

시간대도 사람들의 통행이 많을 때이고 제가 거주하는 곳은 상점들이 가득한 곳이라 민간인 피해가 적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어요.

출동하는 미군 차량

조금 지나니 미군들이 오더군요. 벌써 이번 주에만 집 근처에서 두건의 폭탄사고가 발생했네요. 이유와 목적이 어찌되었든지 간에 더 이상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한참동안 이 곳에서, 이 들에게 평화가 무엇일까? 를 생각했어요. 그리고 무뎌질 대로 무뎌진 제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어요. 더불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

살람 알라이꿈 알라이꿈 살람(평화가 그대에게, 그대에게 평화가)


9월 3일, 폭탄사고와 함께 시작된 9월

오늘(3일) 같은 건물에 3층인 새로운 임시거처로 이사를 했지요. 상진이 형도 이번 주에는 지금 쓰고 있던 방 계약이 끝나서 조금 서둘러서 이사를 했어요. 그간 거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준 상진이 형에게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거금 6천디나르를 들여서 맥주도 6캔을 사서 어젯밤 같이 맥주마시면서 그동안의 감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어요. 어디에서 지낼지 아직 고민 중이고 만약 구한다면 앞으로 이라크 어린이들과 함께 지낼 공간도 더불어 이용 가능한 곳이어야 하기에 좀 더 시간을 두고 현재 이라크 상황을 지켜보려 합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받고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서, 그 지역 사람들과 같이 지내고 호흡하면서 살고, 집의 기능도 단순한 저의 주거공간이 아닌 현재 제가 이라크에서 몸담고 있는 CWB의 활동공간(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제공)으로도 이용하려고 하니 무엇보다 어느 지역으로 들어가야 할지 여러 차원으로 고민을 해야 해요. 몇 군데 후보지가 있기는 한데 좀 더 현지 사람들하고 의견을 나누어 봐야 하구요. 더불어 한국의 팀과도 상의를 해야 하구요. 이런 저런 이유로 집을 구하는 문제는 좀 더 미루어질 것 같아요. 일단 한달이라는 시간은 벌었으니 천천히 신중히 생각해 봐야지요.

이틀 전, 9월이 시작하는 날, 살람과 함께 바그다드 외곽의 관공서에 갔지요. 살람이 관공서에서 서류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오랜만에 보는 리야드(CWB 회원)와 함께 택시를 타고 관공서에 도착한 시간이 약 12시쯤, 리야드는 관공서 안으로 들어가서 서류를 받는 절차를 받아나갔고 살람과 저는 밖에서 9월에 있을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더위에서 약 한 시간정도 기다렸을까 리야드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면서 일이 잘 안된 듯 나왔고 살람이 다시 들어갔지만 발급 받아야할 서류를 받지 못했나 봐요. 안에 있던 직원들이 사람들이 뻔히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냥 퇴근을 해 버렸고 이러한 모습에 살람은 화가 나서 막 항의를 했지만 경비원들에게 제지를 당하면서 그냥 쫓겨났지요.

살람이 많이 화가 난 듯 보였어요. 계속 아랍어로 무어라무어라 하더군요. 날도 많이 더웠고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아무런 성과없이 다음날을 기약해야 하니 더욱 그렇겠지요. 그래서 돌아오는 택시안에서 살람에게 ?살람 내가 쥬스 살 테니깐 리야드랑 같이 우리 집 앞으로 가자. 응??살람은 ?그래!?

집이 얼마 안 남았는데 평소보다 차가 많이 막혔고, 미군들이 제가 거주하는 집 근처에 모여서 차들을 다 돌려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았지요. 그래서 택시에서 내려서 살람이 인근에 있는 이라크인에게 쟤네들이 왜 저러는지 물어보았더니 십분 전에 제가 거주하고 있는 집 근처에서 폭탄사고가 있어서 지금 미군이 통제하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어요.

살람과 저는 많이 놀랐지요. ?바로 집 근처인데.......?정확한 폭탄 지점이 어딘지 궁금해서 그 쪽으로 가고 있는데 중무장한 미군 한명이 나에게 와서는 ?이곳은 통행이 금지된 곳이다. 들어올 수 없다. 취재도 할 수 없다.?라고 하더군요. 그날은 제가 카메라 가방을 가지고 간 날이라 미군이 보았을 때 저를 기자로 알았나 봐요. 사실 카메라 가방 안에는 한국 언론사인 말지에서 만들어준 기자증이 있긴 하니 꼭 틀린 사실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아냐. 나는 저곳을 가려는 것이 아니라 내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너희 탱크가 있는 저 쪽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내가 머물고 있는 집이야. 그러니깐 이 길을 가로 질러서 가야 돼.?라고 응답을 했더니, 그 미군은 다시 ? 흐흐, 나는 바보가 아니다. 지금 이 곳은 조지 부시대통령이 와도 출입을 허가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평소 같았으면 사고지점에 들어가려 하면 총구를 정면으로 겨누고 고압적인 목소리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렀을 텐데, 지금 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미군은 저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고 있다는 걸 알았고 ?아! 이 미군하고는 이야기가 통 하겠구나.?라고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카메라 가방을 열어 보이며 계속 설명을 했지요. 사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하니 조금만 더 이야기 하면 들여보내 줄 것 같아서 한 3분정도 계속 설명을 하니깐 그제 서야 ?지나가도 좋다. 하지만 촬영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가로 질러가는데 안에 있던 미군이 와서 제지를 하려 하다가 제가 상대한 미군이 기자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해서 계속 집 쪽을 향해 갈 수 있었어요. 머리위에는 헬기가 지나가고 집 근처는 미군과 이라크 경찰들로 둘러싸인 체 미처 모르고 지나가려 했던 차들은 미군의 제지로 인하여 돌아가기 위해서 후진을 하고 앞의 사실을 모르고 쫓아오던 차들은 영문도 모르는 체 되돌아오는 앞차를 보면서 자신들도 후진을 하려 하면서 일대는 혼잡한 상황이었어요.

지나가면서 미군들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을 쳐다보면서 어디에서 폭탄이 터졌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지요. 사람들이 많이 통행하는 가라데 안쪽 대로변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었고 근처의 상점의 유리창은 박살이 난 상황이었고 미군들은 가장 가까운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저기 수색을 하더군요.

집 근처 자주 가는 슈퍼로 들어가서 살람과 리야드를 위해서 음료수를 두개 사면서 평소 안면이 있는 주인아저씨에게 상황을 물었지요. 제가 돌아오기 약 10분 전 쯤에 폭탄이 터진 것이고 폭탄 지점은 저희 집에서 약 직선거리로 4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어요. 이 사고로 인하여 이라크인 한명이 사망했고 수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대로변에서 떠진 것으로 보아서 미군의 차량이 지나갈 때를 노려서 반대편 옥상건물에서 폭발물을 던진 것 같다고 했어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냥 덤덤했어요.

사진을 몇 장 찍고 싶었지만 미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방팔방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라 도저히 엄두가 안 났어요. 사진을 찍다가 적발이 되면 카메라 박살나는 것은 둘째 치고 운이 없으면 총을 발사할 수도 있으니깐요. 살람과 리야드를 보내고 가방을 방에 놓고 카메라를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갔지요. 올라가서 보니 딱 건물 3개 뒤에서 폭발물이 터진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조금 실감이 나더군요. 미군들이 반대편 옥상에서 수색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러던 중 한명과 눈이 마주쳐서 저는 그냥 내려왔지요.?며칠 잠잠한 것 같더니 여전하구나.?

몇 시간 뒤 폭탄이 터진 곳으로 갔지요. 건물 유리창은 깨진 채로 현관문은 잠겨 있었고 폭탄 지점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어요. 직접 피해를 입은 상점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근처 상점은 계속 영업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지나가고 있었어요. 그날 저녁 이라크 뉴스에는 집 앞에서 있었던 폭탄사고에 대해서는 보도되지 않았어요. 얼마나 많은 이러한 사건들이 묻히고 있는지 짐작이 되더군요. 대신 이라크 뉴스에는 미국의 공화당 전당대회에 대한 소식을 한 참 전하더군요. 정말 빌어먹을 친미 방송들입니다.

9월 들면서 나자프와 남부도시의 전쟁 상황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고 미군들은 나자프, 알 사드르 시티에서 철수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계속 미군은 팔루자와 사마라, 바쿠바지역에 공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부지역에서는 저항세력의 공격이 멈추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렇게 바그다드의 두 번째 9월을 맞이했습니다.


8월 29일

1. 계속 되는 교전(交戰)

8월 26일 쉬아파 중교 지도자 알 시스타니가 영국에서 돌아왔어요. 이유는 나자프 해결을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그는 미군과 이라크 임시정부군이 나자프에 군사작전이 있기 하루 전에 영국에 심장병 치료차 갔었어요. 그동안 심장질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타이밍 상 작전 하루 전 출국이라 여기저기서 미국과의 밀약(密約)때문이라는 원성의 목소리가 높았지요. 참고로 알 시스타니는 이라크 쉬아파 다수에게 존경을 받는 종교지도자이고 그의 영향력은 현재 이라크 내에서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한 그가 나자프 사건이 난지 3주가 지나서야 해결을 위해서 귀국한다는 이야기에 한편으로는 가증스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태의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기대를 했었어요.

27일 새벽 이라크 방송사는 특종으로 시스타니-사드르 나자프 교전 종식 합의. 사드르, 5개항 평화안 전격수용에 관하여 보도를 하더군요. 뉴스를 보면서 ?그래. 이것으로 조금이나마 나아지겠지. 더 이상 나자프 사람들은 전기도 물도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지요.

다음날 미군은 다시 팔루자를 폭격했어요. 일반 주택가를 폭격해서 수십 명이 죽거나 사망했어요.

그리고 오늘 미군은 다시 사마라를 폭격했어요. 또 수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죠.

오늘 살람이 알 사드르 시(市)에 들어가서 그 곳의 희생자를 만나려 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알 사드르 시는 미군에 의해 통행제한 상태였고, 오후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통행금지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살람은 꼭 유령도시 같았다고 했어요. 그나마 외곽이 그렇고 시내 안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고.

얼마나 많은 폭격이 이 곳에 있는지 이제는 저도 모르겠어요. 매일 밤 들리는 헬기 소리에 ?아! 쟤네들이 또 어디를 폭격하러 가는 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안정될 거라는 이야기는 미군과 이라크 임시정부의 브리핑 안에서 만 이고 이를 그대로 받아 적는 외신들의 자기희망뿐이겠지요. 밖으로 보여 지는 것이 사실은 아닌 듯 합니다.

2. 계속되는 납치와 살해 위협

얼마 전 이탈리아 기자가 나자프에서 납치가 되었다가 며칠 뒤에 죽음을 당했어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무장세력 중 하나인 ?검은 깃발?이라는 단체가 공식적으로 한국군 파병에 관련하여 더 이상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과 한국인에게 용서를 배풀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는 곧 협상 없이 바로 처형을 하겠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프랑스 기자 2명이 납치를 당했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외국인에 대한 납치와 처형에 대해서 이라크 인들은 분노해 하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저항세력 내에서도 일부 무장 세력에 의해서 행해지는 외국인 납치와 처형에 대해서 여러 차례 비판하고 때로는 경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러한 행위가 지속될 경우 자신들의 손으로 공격하겠다고 했습니다. 팔루자에서는 무장 세력들에 의해 억류된 외국인 노동자를 팔루자 주민들이 구출한 적도 있습니다.

이 곳의 이라크 인들은 스스로 구별을 합니다. 미군과 점령군, 그에 동조하는 무리에 대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진짜 저항세력과 이라크 사회내의 혼란과 그 외 집단적 이유 때문에 공격과 납치등을 일삼는 가짜 저항세력(이라크인들은 이들을 범죄집단, 테러집단이라고 하더군요.)으로.

하지만 밖에서 보는 시각으로 이라크의 저항세력은 하나로 여겨질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게 작용한 것 같아요. 온통 미군의 피해, 점령군의 피해, 외국인에 대한 피해만 초점을 맞춰서 보도를 하고 그에 비하여 일반 이라크인들의 피해, 그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지도 않고 다룬다고 하더라도 뒤틀어서 다루기 때문이겠지요.

실제로 미군의 14개월까지의 주둔과 점령이 이 곳 이라크 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지에 대해, 이라크 인들이 가지고 있던 반미감정의 변화, 팔루자 민간인 학살, 왜 지금까지 전력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지, 왜 여전히 정수가 안된 물을 이라크 인들이 마셔야 하는지....... 점령체제 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 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분석에 대한 기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온통 사건, 사고, 죽음, 혼란 등으로 채워진 이라크 내용들을 제외하고는요.

전쟁이 끝난 직후 몇 몇 이라크 내 의식 있는 젊은이들과 기자들로 구성된 신문들이 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돈과 여력이 없어서 대부분 자체폐간이 되거나 점령당국에 의해서 강제 폐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점령당국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돈과 힘을 이용해서 방송사를 만들고 신문을 발행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보도를 하고 기사를 편집합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의 눈과 귀를 봉쇄한 셈이지요. 그렇게 되면 이라크는 점령당국과 돈과 권력에 의해서 재생산되고 이를 해외의 사람들이 ?이게 이라크이구나.?라고 인식을 하겠지요.

이야기가 이상한 곳으로 빠졌네요.

돌아가서 현재 일부 무장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외국인 납치와 처형에 대해서 이라크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항세력들이 하나의 명령체제 속에서 독자적인 시스템을 갖추었다기 보다는 수많은 구성인자들이 각기 다른 신념과 믿음을 기반으로 상이한 방법을 추구하기에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가장 저변에 깔려 있는 것들은 미국에 대한 분노이고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일 것입니다. 이는 미군의 주둔으로 인하여 계속 키워지고 있구요. 결론적으로 미군의 주둔이 계속되고 그로 인한 이라크 인들의 고통이 계속 될 경우 외국인 기자, 노동자들에게까지 벌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사태는 지속될 것입니다.


8월 25일, 직접 경험한 일과 간접 경험한 일

며칠 전 집을 구하기 위해서 살람과 살람 친구분과 이동 중이었습니다. 복잡한 바그다드 시내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와 만나는 외곽도로 편도 4차선의 널따란 도로를 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어요. 한국으로 치면 서울 외곽순환도로정도 되려나? 잘 가다가 갑자기 차량들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속도가 줄더니 약 시속 100킬로도 다니던 주위의 차량들이 대부분 시속 10킬로 정도로 서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았던 저희 차량은 이리저리 앞으로 헤쳐 나가기 시작했고 얼마 안 되어서 차량들이 왜 이렇게 서행을 하는지 알 수 있었지요. 편도 4차선 넓은 도로에서 미군의 험비차량이 후미(後尾)에, 중간에는 미군 탱크가, 선두에는 미군의 험비차량이 이렇게 미군의 탱크와 차량이 4차선 중 가운데 차선을 탱크의 속도에 맞춰서 일렬로 운행 중이었고 맨 후미의 미군 험비차량의 미군이 총구를 아래로 향하고 뒤에 쭉 따라오고 있는 이라크 어느 차량도 자신들을 추월하거나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지요. 차선도 일차선이 아니라 편도 4차선이 되는 넓은 도로에서 미군 탱크와 험비차량 때문에 수백 대의 이라크 차량이 규정속도 약 80킬로 되는 도로에서 시속 10킬로로 답답히 뒤꽁무니에서 약 사 오십 미터 뒤에서 쫓아가는 꼴이 되었지요. 이미 제 입에서는 '!@#$%^%$#$%^&^'욕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앞좌석에 있던 살람과 살람 친구도 기가 막힌 듯 '저것 봐! 저게 미군이야. 누군가 앞으로 나오면 바로 총으로 쏴버릴 꺼야.'

한 오 분을 그렇게 쫓아갔을까? 옆에서 비슷한 속도로 가고 있던 덤프 트럭이 조금 씩 조금씩 속도를 높여서 미군 험비차량 과 최대한 옆으로 떨어져서 추월을 하려고 했지요. 이에 뒤의 차량들도 그 덤프차량의 꽁무니 뒤로 붙었고. 그랬더니 후미 험비차량 위에서 총구를 쥐고 있던 미군이 손짓으로 '접근 하지마. 뒤로 가.'라고 표시를 합니다. 순간 덤프트럭은 속도를 줄이고 다시 저희들과 비슷한 속도로 운행을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니 옆으로 갈 수 있는 샛길이 나오더군요. 차량들은 일제히 그 길로 빠졌고 한꺼번에 샛길로 빠진 차량들 속에서 한참을 씨름하니 다른 도로를 이용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늦게 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지요. 사실 그 당시 속으로는 미군차량에 의해 강제로 서행을 당할 때 그냥 미친 척하고 미군차량의 바깥으로 추월을 하면 진짜 총을 쏘겠느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오늘 살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그렇게 하지 않길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졌어요.

이틀 전, 바그다드 외곽도로에서(같은 도로는 아니에요.)미군의 탱크 행렬이 이동 중 일 때 미군들은 또 그런 차량 통제를 했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라크 차량(오래된 중고 차량이 대부분입니다.) 중 한대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인하여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고 속도를 줄이지 못한 차량은 경적과 전조등을 켜면서 나름대로 미군 험비차량에게 신호를 보내려고 했는 듯 했어요. 탱크가 커브를 틀려고 할 때 이라크 차량은 핸들조작을 해서 탱크의 옆을 스치듯이 들이 받고 한 쪽 벽에 부딪쳐서야 멈출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 때 미군의 험비차량은 그 차량에 대해서 기관총을 발포했고 그 운전사는 현장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리고 살람은 미군의 주둔으로 인하여 이라크들은 계속 피를 흘려야 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실상 눈으로 보지 못하면 믿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어요. 특히나 미군에 관련된 사건, 사고의 경우에 그렇지요. 작년에 제 주변에서 아부 그래이브 교도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속으로는 믿지 않았어요. 아부 그래이브 교도소에서 미군들이 이라크 사람들을 성 고문 한다거나, 수감되어 있는 이라크 여성, 심지어는 남성들도 강간한다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처음 접하면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거려도 속으로는 '에이! 설마. 뭔가 와전(訛傳)된 거겠지.'했지요. 그런데 올해 4월 아부 그래이브의 진실이 알려졌을 때 개인적으로 당시 내가 들었던 말이 모두 사실 이었구나 라는 걸 깨달았지요.

지금도 매일 많은 미군에 관련된 사건 사고를 접하고 보고 듣습니다. 와중에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도 많아요. 인간의 탈을 쓴 사람이, 이성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에 계속 여기에서 발생하는 비인간적 행위를 인정하는데 저항하고 부정하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깨닫습니다.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 무엇을 남겼는지? 미국의 점령 하에서 지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쟁과 폭력이 무엇을 양산하는지? 점령이 지속되면서 어떻게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8월 22일, 이라크 어린이들에 대한 소고(小考)

이라크에는 참 어린이들이 많아요. 각 가정마다 적게는 4명에서 많으면 1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있지요. 종교적으로 전통적으로 다산(多産)을 권장하는 사회이고 가족 중심, 부족 중심 사회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아요. 이라크의 어느 집을 방문해도 얘들이 바글바글 해요. 제가 작년에 방문했던 어떤 집은 한 집에서 3식구가 모여 사는데 얘들이 20명이 넘은 적도 있었어요. 그 얘들하고 놀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제가 아이들에게 깔려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에요.

이라크 어린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으로 교육을 받고 커나가고 가족 내에서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면서 예의범절 및 사회 내 질서들을 하나씩 배워나갑니다. 일반 이라크 가정을 방문하면 그 집의 어린이들은 깍듯이 예절을 지키고 아버지나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타인이 주는 어떠한 것도 거절을 하더군요. 계속 어른들의 눈치를 보다가 어른들이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지.'하고 그러면 '슈크란(고마워요.).'하면서 속으로는 엄청 좋아하면서도 어른 앞이라 내색을 안 하면서 받아요. 어찌 보면 예전 우리의 가족중심의 사회일 때의 모습과 유사하죠. 하지만 일단 어른들의 사정권에서 멀어지면 상황은 돌변하지요. 처음에는 외국인을 약간 경계하다듯 하다가 조금 안면이 익으면 모든 게 신기한 듯 만져보고 건들어 보고 그러다가 이리저리 장난을 같이 하면 올라타고 엉기고 달라붙고.......똑같죠. 한국의 어린이들하고. 흐흐흐 귀여운 것들...흐흐흐

제가 어릴 때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 저희 집에는 아들 만 둘이고 제가 둘째였는데 어릴 때부터 장남의 역할을 부모님이 많이 강조를 했지요. 그래서 제 형은 어릴 때부터 굉장히 어른스러웠고(너무 어른스러워서 참 많이 부담스러웠지요.) 부모님들에게 제가 잘못했는데도 제 대신 맞을 정도로 책임감도 높았지요. 저의 파트너인 살람집에도 아이들이 여섯 명인데 그 중에 제일 위가 도하(12살)이고 그다음이 무스타파(11살)이에요. 근데 장남인 무스타파는 굉장히 어른스럽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의가 발라요. 밑에 있는 후세인, 핫산, 그리고 친척 꼬마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엉기고 들러붙을 때 무스타파는 옆에서 무게 잡고 앉아 있어요. 그리고 아이들이 조금 오버 한다 싶으면 자기가 아이들을 손수 떨쳐주지요. 그리고 살람도 무스타파에게만 지시를 하고 무스타파는 제 동생들을 다시 교육시키는 것 같아요. 다른 집도 비슷한 것 같아요. 어쩔 때는 많이 안타깝기도 해요. 그리고 집안에서 큰 딸은 어머니 역할을 하지요. 집 안에 아이들이 많다보니 당연히 어머님의 손길이 일일이 아이들에게 다 미치지 못하고 그러면 막내들은 부모님에게 안기는 시간보다 큰 언니나, 큰 누나에게 안기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에요. 그래서 얘가 얘를 안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지요. 한국이야 요즘은 아이들을 하나정도 낳고 많으면 둘이나 셋을 낳아서 기르다보니 자연이 아이들이 약간은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경우를 종종 보지만 여기 아이들은 지들끼리 놀다가 여기저기 널 부러져 자고, 놀고 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요. 아이들의 모습을 한 참 보고 있으면 꼭 한국의 삼 사십년 전에 이야기로 들었던 가족 내의 어린이들의 모습과 겹쳐져요.

이라크의 근현대사는 전쟁과 분쟁, 그리고 강대국의 억압과 강탈로 채워져 있지요. 물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요. 그 안에서 가장 피해를 받는 계층중 하나는 어린이들이에요. 특히나 미국 주도의 이라크 경제제재 때에는 백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영양실조, 의약품 부족과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해서 죽었고 경제제재 동안 이라크 내의 5세 미만 영아 사망률은 13%이상(UNICEF자료 참조)이었지요. 약 50만 명의 5세 미만의 이라크 어린이들은 죽었고 이는 걸프전과 경제제재 기간동안 이라크의 5세 미만의 아이들 5000명이 매달 죽어갔다는 수치입니다. 누구로 인하여 그들이 죽었을까요?

이러한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이 곳에서 거의 모든 가정마다 자신들 자식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들이 있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미국과 서방의 선진국들 - 그들도 이라크 아이들을 죽인 간접 장본인 중 하나이지요. 그들은 미국이 제시한 이라크 경제제안에 결과적으로 승인을 했고 걸프전 때나 그 이후로도 지속되었던 미군과 영국군의 수없이 많은 폭격도 유엔의 이름으로 동의했고 작년에 있었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정치적 이유로 승인을 했으니깐요. 특히 아주 아주 미국다운 한국은 그 중심에 있다고 봅니다. 수십 수백만의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 이 이 나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나라 이름도 아름다운 나라(美國) 가 지금껏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 나라의 동맹 때문에 지금도 전쟁터인 이 곳에 근 4000명 가까운 군인을 보낸 정부에 대해서 역겨움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일방적인 선언으로 전쟁이 종료되었다고 알려진지도 거의 16개월이 지나고 있네요. 이 곳의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 까요? 오늘 오후에 tv를 보는데 이라크 방송에서 작은 시위에 대해서 방송을 하더군요. 기백명의 이라크 인들이 손수 만든 피켓을 들면서 구호를 씩씩하게 외치더군요. 그 중에 제 눈을 띠게 하는 것은 수십명의 아이들의 모습이었어요. 한 6~7살 쯤 되었을까? 시위에 참석한 아이들이 「우리에게 교육과 의료품을」이 적힌 피켓을 들고 어른들이 하는 구호를 따라 하고 있었고, 인터뷰를 했던 한 꼬마아이는 계속 '마꾸(없어).....마꾸(없어)....마꾸....마꾸...'하더군요. 아마도 필요한 무엇이 없다고 계속 하소연 하는 것 같았어요.

보다 많은 아이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어요. 거의 60도에 육박하는 고온 속에서 아이들은 한통의 석유통을 옆에 세워두고 손에는 피티병을 절반 자르고 끝 부분에 고무호스를 연결해서 자동차 기름을 주입하기 위한 깔대기 용도로 사용할 것을 들고 도로 옆에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고, 바나나도 팔려고 하고, 화장지, 껌, 신문등을 팔려고 거리로 나오고 있어요. 그나마 무언가를 팔려고 나온 아이들은 나아요. 그러지 못한 아이들은 그냥 사람들에게 손을 벌려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지요. 이게 잘 안되면 범죄행위를 시도하지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원래 이라크는 가족 중심의 사회이기에 집안 내에서 통제가 이루어졌고 가장을 중심으로 한 강한 결속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아이들이 밖에서 구걸을 하거나 범죄행위를 하면 가족 전체의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강한 질책과 처벌을 한다고 그러더군요. 하지만 현재 이라크의 실업율이 50%이상을 육박하다보니 사회를 지탱하던 가족의 단위도 서서히 무너져 가기 시작하고 이에 아이들도 돈을 벌어야 하는 조건으로 몰리게 되고 그리고 가족의 테두리가 무너져가면서 아이들이 범죄의 대상으로 때로는 주체로 내 몰리고 있어요.

앞서 밝힌 것은 실업율과 연관된 이라크 어린이들의 현실을 거칠게 요약한 것이고 그것보다 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오랜 전쟁으로 인하여 전쟁의 문화 - 죽고 죽이는, 가슴속의 분노를 총으로, 칼로, 폭탄으로 분출시키는 - 가 계속 확산되고 고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내의 혼란과 갈등, 폭력상황, 전쟁 상황을 양산하는 요소를 생산하는 기재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심성에까지 파고들어서 폭력을 가장 손쉬운 해결방안으로 대체시키는 지독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물론 이런 상황을 몰고 가는 외부적원인(전쟁 상황, 점령군의 주둔, 계속되는 생활고)이야 이해가 되지만 동의할 수는 없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싸늘하고 공격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는 이라크 아이들을 접할 때 이는 저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라 전쟁을 기획하고 진행시키고 동조하는 어른들의 책임임을 통감하면서 가슴 한편이 아파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안에 저도 있음을 느낍니다. 그들이 단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것들을 박탈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전쟁이 있기 전, 한국에 있을 때 읽었던 이라크 아이의 편지 문구가 생각이 납니다.

'저희들을 죽이지 마세요. 저희는 평화를 원합니다.'


8월 18일, 미군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하이달이 오후에 왔어요.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어요. 묻기도 전에 하이달은 집 근처에서의 교전에 대해서 이야기 하더군요. 이라크 경찰과 저항세력과의 교전이 있었다고. 택시타면 20분이면 오는 거리를 2시간이나 기다려서 오게 되었다고.

나자프에 대해서 물었어요. 하이달은 미군이 성지 나자프안의 이맘 알리 사원내로 침입하기를 꺼려하고 있다고. 하지만 몇 시간 전에 이라크 임시정부 국방장관이 저항세력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서 수 시간 내에 이맘 알리 사원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저항세력들은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거라고 했어요.

'미군이 이맘 알리 사원내로 침입하기를 꺼려한다.' 속으로 욕이 나왔어요. 이미 미군은 형식상으로 이탈리아 군(나자프 및 중남부 지역은 형식적으로 이탈리아 여단의 책임지역입니다.)에게 작전권을 이양 받아서 이미 수백 명의 저항세력과 민간인들을 학살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계속 진행중이구요. 그런데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쫓겨서 최후의 보루인 이맘 알리 사원 내에서 결사 저항하고 있는 저항세력을 앞에 두고, 탱크와 헬기로 온 나자프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사원내로 들어가기를 꺼려한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소식을 통해서 이라크 각지의 사람들이 미군의 학살을 막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나자프로 모여서 저항세력들과 동조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이맘 알리 사원 앞에서 미군들의 학살에 반대하는 시위를 할 때도 미군은 헬기를 이용해서 그들을 위협하고 살해하려 했어요. 그런데도 사원내로 들어가기를 꺼려한다고 너스레를 떨다니. 바꿔 말하면 미군들은 쉬아파 최대 성지인 이맘 알리 사원 앞에서 정도만 너스레를 떨지 그렇지 않은 온 이라크 땅에서 그들 마음대로 이라크인들을 죽이고 부상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내년 1월 이라크 국민회의 구성을 위한 사전 모임이 끝났어요. 모임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아직 모릅니다. 와중에 나자프에 모여 있는 저항세력들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 수 십 명의 협상단이 나자프에 미군헬기를 타고 갔다가 거부당했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진짜로 저항세력들과 협상을 하려면 일단 나자프 전체를 봉쇄하고 있는 미군 측의 위협을 물리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항세력들은 벌써 10일 이상 미군에 의해서 봉쇄가 되어 있고 더군다나 계속되는 교전으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수배의 사람들이 부상당해 있는 상황이고 또한 최악의 상황으로 계속 내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하는 협상단이 가서 무엇을 협상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군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라크 인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미 수백 명의 사람들이 미군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죽었고 부상당했습니다. 열흘 이상 물도 전기도 주지 않을 상황에서 미군은 나자프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가 이제 너희들을 죽일 테니,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어서 여기를 떠나라.'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는 '어서 말을 들어. 안 들으면 내가 먼저 죽일 테다. 나는 미군에서 주권을 이양 받은 공식적인 너희들의 지도자야.'

지금이 새벽 3시 30분이군요. 하이달이 저를 방문한 때가 18일 오후 6시였습니다. 그때까지 이라크 임시정부군은 이맘 알리 사원 안으로 진격하지 않았고 그들이 제시한 시간도 몇 시간 남았었지요. 지금은 약속한 시간도 지났어요. 어젯밤 늦게까지 이라크 뉴스를 시청했는데 별다른 뉴스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은 진격을 시작하지 않았나 봅니다.

현재 이맘 알리 사원내과 그 인근에는 4천명이상의 사람들이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다수의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구요. 만약 이라크 임시정부군이 이맘 알리 사원내로 진격해서 작전을 시작하면 정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것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수백, 수천의 이라크 저항세력과 민간인이 죽을거에요.

지금까지 미군의 만행에 의해 숨진 이라크 인들의 명복을 기원하면서....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동화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 toto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 속에 삶이 나의 삶이기에,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이기에 이 얘기들이 좋아요~^-^

  • 개울

    알엠님 정말 저거 치우시려면 힘드시겠어요. ^^; 저렇게 귀여운 한별이가 저렇게 못된(!) 취미를 가지고 있다니... -_-
    저도 개인적인 글, 삶이 묻어있는 글이 좋아요. 그런데 내 글을 쓸 때는 나를 너무 드러내기가 부끄러워요. 참 이중적이에요.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