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14일 카타르 도하
이 곳에서 열린 제4차 WTO 각료회의에서 "TRIPs협정(무역관련 지적재산권 협정)과 공중 보건에 대한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제, 의약품 특허로 인해 약값이 비싸 국민들이 약을 사 먹을 수 없는 WTO 회원국들은 제네릭(카피약)을 생산할 수 있다는 '강제실시권리'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
의약품 제조능력이 없거나 경제규모가 작아서 의약품을 자국 내에서 생산할 수 없는 국가들이 여전히 있었고, 이들은 다른 국가가 강제실시로 생산한 값싼 제네릭을 수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다시 TRIPs(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 조항이다. 여기서는 "강제실시로 생산된 의약품은 국내 수요를 주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자국 내에서 의약품을 생산할 수 없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과 중진국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었다.
결국 2001년 도하선언 6항은 2002년 말까지 TRIPS 이사회에서 해결책을 찾기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초국적 제약자본과 미국은 강제실시를 적용할 수 있는 질병의 범위나 대상국가의 범위를 몇몇의 개발도상국만으로 제한하려고 했다. 결국 이들 때문에 해결책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은 강제실시의 범위나 대상국에 어떠한 제한도 있어서는 안 된다며 제약자본과 미국에 강력히 반대했다.
2003년 6월, 이집트
WTO 비공식 각료회의에서 미국이 더 이상 '강제실시'를 적용할 수 있는 질병 범위는 문제가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소위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에 대한 해결책에 관해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간의 대립은 여전했다.
은 4항에서 "TRIPs 협정이 공중 보건을 보호하기 위한 특히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촉진하기 위한 WTO 회원국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이행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 이 4항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제약 부문의 제조 기술이 불충분하거나 제조 기술이 없는 WTO 회원국들이 TRIPs 협정하의 강제실시권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렵다는 문제의 해법을 찾을 것"을 규정했지만, 시간은 흘러갈 뿐이었고 대립만 여전히 계속될 따름이었다.
2003년 8월 30일 스위스 제네바
현지시각으로 8월 30일 WTO(세계무역기구)회원국들은 공중보건 부문의 이른바 '도하선언 6항'에 관해 합의하였다. 합의라고 해놓은 꼴이 가관이었다. 8·30합의는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는 인도적 차원에서 공중보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일 것이며, 산업·상업적 목적으로는 쓰일 수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인도적 차원의 노력은 현재 국제적 원조 단체와 각종 기금, 그리고 각국의 원조 차원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의약품 생산능력이 없는 국가의 의약품 공급 문제는 인도적 차원의 해결을 넘어 '건강권' 보장을 위한 해법으로써 필요한 의약품을 스스로 결정하고, 수입하여 공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산업·상업적 목적'이 아닌 방법으로 복제약(제너릭)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생산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강제실시가 적용될 수 있는 복제약을 만들 수 있는 제너릭 회사가 국영(내지 공공)제약회사인 경우는 전세계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다. '산업·상업적 목적으로 쓰일 수 없다'는 단서를 만족시키는 공공제약회사는 거의 없는 데다가, 이 조항은 복제약(제네릭)을 생산하는 민간제약회사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합의문에 따른 수입을 위한 강제실시는 거의 현실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게다가 강제실시 할 때마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조건을 TRIPs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했다. 수출을 할 회사가 무슨 약을, 얼마만큼, 어느 국가에, 얼마의 기간동안 수출할 것인지를 미리 알리고, 특별한 색/모양/라벨/포장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강제실시하려면, 이제 한 국가의 결정권마저도 침해당한 채, TRIPS이사회 앞에서 선진국이나 다국적 제약회사의 압력을 그때마다 감내해야만 한다. 강제실시를 할 때, 이러한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TRIPS 협정 어디에도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 결국 강제실시 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려는 짓에 다름 아니다.
2004년 7월 태국 방콕
2003년 9월 WTO 제5차 각료회의가 무산되었지만, WTO 내에서 TRIPS협정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무산된 WTO각료회의 이외에 FTA(Free Trade Agreement)를 통해서 TRIPS+라고 불릴 만큼 더욱 강력한 조항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 세계 4000만 명의 HIV감염자 중 600만 명에게 에이즈치료제가 필요하지만 560만 명이 약을 못 먹고 있다. 에이즈 약은 강제실시가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대표적인 의약품이다. UN, 세계보건기구(WHO),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은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한 각종 대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그것은 시혜적이고 일시적인 대책일 뿐, 전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에이즈환자는 치료제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이들은 단지 돈이 없어서 죽어갈 뿐이다. 몇몇 초국적 제약사의 특허권으로 인해 자신의 생계비보다 몇 배 혹은 몇십 배 비싼 약값을 지불할 수 없어 죽어가는 것이다.
민중이 의약품에 접근하여 먹을 수 있는 권리만 파괴될 뿐인데도, 태국의 탁신 총리는 미국이 주도하는 미·태국FTA협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미국은 자국 제약회사의 이해를 반영해 에이즈 약의 특허권을 주장하며 카피약 생산에 반대한다. 미국은 칠레, 요르단, 싱가포르 등과 각각 맺은 쌍무협정에서 제약회사의 특허 약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는 조항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죽음의 역사를 지워버리자
지금 열리고 있는 제15회 국제에이즈회의를 보자. 이 회의는 UN과 태국정부, 그리고 이들이 추천한 NGO가 주최한 것이다. 이번 회의의 주제는 "모든 이에게 치료접근권을"이지만, 회의조차 모두가 참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참가비 1000달러(약 120만원)을 낸 사람들, 약 1만5천여 명의 각국 정부관료, 과학자, 활동가, HIV/AIDS환자들만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초국적 제약회사는 특허권 강화를 위해 로비하고 오로지 그들의 비싸디 비싼 오리지널 의약품을 사용할 것을 강요하여 환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도, 1000달러를 낸 참가자들에게 가방, 점심, 셔틀버스 등을 제공하고 국제에이즈회의를 후원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TRIPS협정을 아예 박살내고 도하 선언의 의미를 우리 손으로 지켜가야 한다. 미국과 초국적 제약자본에 끌려다니는 각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에이즈 환자를 비롯한 가난한 환자와 민중들이 누구라도 의약품을 먹을 수 있도록 우리가 새로운 투쟁을 선포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태국정부와 UN, 그리고 각국 정부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초국적 제약자본의 특허권이 죽음의 그림자를 몰고 다닌다고, 특허권으로 생겨난 그 이윤은 수많은 환자들의 무덤 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무역협상을 하겠다고 하면서 특허권을 더 강화시킬 생각 따윈 하지도 말라고!
이미 우리에게 초국적 제약자본의 특허권은 죽음을 의미한다. '글리벡'을 못 먹은 백혈병 환자들이 그랬고, '이레사'의 높은 가격에 가슴을 치던 폐암환자들이 그러했고, '인터맥스감마'의 생산이 중단될까봐 가슴 졸이던 환자들을 우리는 이미 만나지 않았는가!
전쟁으로 이라크 민중을 비롯한 각국의 젊은이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부시와 초국적제약자본은 약과 특허를 빌미로 우리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외칠 것이다. FREE AIDS DRUG! 에이즈 약을 무상공급하라! NO to BUSH's TOXIC TRADE DEALS! 부시의 해악적인 무역정책을 반대한다!
우리가 태국에 간 것은 에이즈회의가 진정 그 제자리를 찾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에이즈 회의의 주제인 "모든 이들에게 치료접근권을!", 바로 그 주제를 제대로 찾기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초국적 제약자본과 미국에 저항하는 우리의 투쟁 뿐이다.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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