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또는 몽상

언젠가 친구와 나누었던 두서없는 잡담.

친구 : 요즘은 연봉 공개가 파업 깨기 무기인가 봐. 연봉이 4천이니 5천이니 해 가면서, 당장 여론몰이를 해 버리니... 정말 ‘노동귀족’ 이데올로기가 문제야.
나 : 그런데, 거기엔 물질적 근거도 없진 않은 것 같아.
친구 :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그 연봉은 잔업 특근 수당이 다 포함된 것으로서 엄청난 장시간 노동과 노동강도로만 가능한...
나 : (-.-a) 어이, 날 교육시킬 필요는 없잖아.

나 : 개인적인 관찰이지만, 4천 5천을 벌 수만 있다면 하루 12시간 1년 360일 일해도 좋겠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그들에게는 진짜로 ‘꿈같은’ 액수인 거야. 그러니, 그런 연봉이 공개되면, 일단 내용 따져볼 것 없이, 박탈감을 느끼는 거지. 그게 노동귀족 이데올로기가 먹히는 물질적 기반이라고 봐.
친구 : 그 액수가 많은 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의 임금이 지나치게 낮은 거지!
나 : 물론 많은 불안정 노동자들의 저임금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노동귀족’이라는 일부 노동자들의 임금도 자본의 이윤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 된다는 것 역시 명명백백해... 하지만 그 얘기와는 별개로, 어쨌든 연봉 4천이면 많은 건 사실 아냐?
친구 : (다시 한 번, 나의 사상을 의심쩍어한다.)

나 : 솔직히 난, 민주노총 표준생계비 항목에 승용차가 있는 것을 보고 내심 분개했어.
친구 : 헉, 무슨 쌍팔년도 얘기냐?
나 : ‘노동자가 감히 자가용을!’ 이런 뜻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에 대한 관점이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야. 무엇보다도, 차가 늘어나는 건 환경에 해악적인 거 아냐? 진보적 관점을 견지한다면, 적어도 난 자가용 차를 사지 않는 실천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 나는 차 살 돈도 없다. -.-a)
친구 : (차가 있기 때문에 약간 찔끔) 차가 없으면 불편한 게 많아.
나 : (흥!) 그렇다면 대안은 공공교통을 확충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겠지. 표준생계비에 승용차를 넣고 차를 유지할 정도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인 노조 정책으로서는 이해가 되지만, 적어도 진보적 관점은 아니라는 거야.

나 : 승용차를 사야 하고, 에어컨을 사야 하고(보급률이 50%가 넘었다지?), 외식도 해야 하고, 애들 학원 보내야지... 그러려면 물론 연봉 4천은 많은 액수가 아니야. 그런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뼈가 빠지게 일해야 하고, 그조차 할 수 없는 노동자들은 엄청난 박탈감에 시달리고...
친구 : 그러니까 잔업 특근 없이 어떤 노동자도 그럴 수 있어야...
나 : 그런 논리를 따라, 결국 ‘임금인상’으로 귀결이 되지. 차를 사고 에어컨을 사고 문화생활도 즐기고 자식들 학원도 보내는,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만큼의 임금을 받아야겠다. 잔업 특근 안 하고 벌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런 논리 말야.
친구 : 틀린 건 아니잖아.
나 : 누가 틀렸대? 아주 정당한 요구지. 지금의 소비자본주의적 사회 기준에서 말이야. ‘인간다운 생활’이든 ‘생활 수준의 향상’이든, 그 의미는 바로 ‘소비 수준’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그런데 그건 끝이 없는 사다리야. 끊임없이 더 새로운 상품이 나오고, 소비되고,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또 뼈빠지게 일하고, 다시 새로운 상품이 나오고... 악순환이지.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임금인상을 요구해가며?

친구 : 임금인상 투쟁을 하지 말자?
나 : 글쎄, 연봉 4천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못 받는 저임금이 문제이니, 어쨌든 임금인상 투쟁을 가열차게 하자, 라는 건... 한 세기쯤 전에 미국 AFL 위원장 곰퍼스가 그랬다지. “노조의 목표는 단순하다. More!” 왜 자꾸 그 생각이 날까?
친구 : 그럼 임금인상 투쟁의 대안은 뭐야?
나 : 일단은 물론 공공성이지. 공공교통, 공공교육, 공공적인 문화생활 등등. 즉, 개별의 임금수준과 전혀 상관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이동하고 교육받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사회 말이야. 그에 덧붙여서, 나는 환경론자는 아니지만, 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위해서 확실히 소비를 줄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 ‘더 많이!’ 가 아니라, ‘더 평등하게! 더 적게!’ 여야 한다는 것이지.

친구 : 네가 말하는 대로라면, ‘자본주의’가 아니게?
나 : 휴우~ 결국 또 그 문제로 돌아오는구나. 항상 결론은 버킹검이군.(^^)... 그래, 자본주의 하에서는 불가능하지. ‘소비 문명을 떠나기’조차도 상품으로 소비되는 시대니. 그렇지만... 소비자본주의와는 다른 대안적 사회를 생각해서는 안되는 걸까? 노조가 자가용을 유지할 만큼의 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가용 소유의 규제와 모든 대중 교통수단의 무료화를 주장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일까?
친구 : 꿈같은 얘기지. 어쨌든 현재로서는 곰퍼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More!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소비! 이걸 잘 해내는 것이 성공한 노조운동이라고 간주되고 있잖아.
나 : 그러나, 노동자의 궁극적인 해방이 결국 자본주의 철폐라면, 노동운동이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을 하는 게, 그렇게 모순된 일은 아니잖아. 자본주의가 아니면 가능한 무궁무진한 대안들이 있지. 생산이 아니라 환경이 우선되는 세상,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비평을 쓰는’ 게으름(^^;)이 만연할 수 있는 세상, 기타등등... 그런데 노동운동에는 이런 상상력이 없잖아. 자본주의에서 억압받는 계급, 그에 저항하는 운동인데도 말야.

친구 : 좋은 얘기기는 하다만... 어디 가서 진지하게 할 건 아니다.
나 : 잡담이니까 하는 몽상일 뿐이야. ^^


물론 이런 얘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는 때도 없고 곳도 없다. 연봉공개가 파업깨기 무기로 사용되던 때, ‘승용차와 에어컨을 소유한 노동자’ 운운은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불안정노동자들 앞에서, ‘소비자본주의 비판’은 사치스러운 얘기로 들릴 것이다. 어쨌든 ‘현실적인’ 모든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그러나 나는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다. 어차피 상상력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정세’란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상력은 항상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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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 소비자본주의 , 상상력 , 대안적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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