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시하는 주체와 감시 당하는 객체의 분류를 기준으로 크게 4가지 형태의 감시가 거론된다. 첫째, 국가에 의한 국민감시, 둘째, 사용자에 의한 노동자 감시, 셋째, 기업에 의한 소비자 감시, 넷째, 개인에 의한 개인 감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시의 유형은 날이 갈수록 그 구분의 효용이 의심스러워진다. 자본은 권력과 결탁하고, 그 결탁의 과정에서 권력은 비판주체에 대한 사전적 통제를, 자본은 통제가 만연되어 있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이윤을 획득한다. 작업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 감시는 단지 사용자의 입장에서만 편리한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된다. 공장 문밖으로 나온 노동자들은 소비자의 입장에서 기업의 전략적 마케팅의 목표물이 된다.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활동은 기업만이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용자나 국가권력에게도 보고된다. 사용자나 국가권력은 언제든지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마저도 자신의 시야 안에 둘 수 있다.
2.
이러한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해 기업이자 사용자, 사용자이자 국가권력, 국가권력이자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당사자로서 각 주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영역을 초월하여 협력체제를 구축한다. 그 협력체제들은 고유한 의미의 사적 활동의 주체인 "개인"들의 입장에서는 무척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속칭 기득권자로 통칭되는 권력의 주체들에겐 항구적인 권력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승화한다. 자본과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은 철저하게 감시의 대상을 자신들과 구분하고, 감시의 대상들이 감히 감시의 주체로 역할전환을 할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견제하고 구속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메트릭스 안에 감시의 대상을 두려 하면서도 자신들은 그 메트릭스의 구조 밖에서 존재한다. 정보는 네트워크를 조립한 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그물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자들에게는 그물 안쪽에서의 활동만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가 제공된다. 그럼으로써 구별은 가속화된다.
3.
그러나 감시의 대상이 되는 자들의 경우에 현대의 감시체계에서 근대 이전의 통제장치가 가졌던 물리적 폭력성을 감지하기는 어렵다. 아니, 오히려 온갖 반대급부를 통해 그 통제의 기제 속에 기꺼이 편입하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의 소비의 결과로 돌아오는 마일리지를 위해 그들은 자신의 소비생활 일체를 저들이 확인해주기 바란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들은 저들이 자신의 활동반경을 일일이 쳐다봐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감시의 주체들은 과거처럼 폭력을 위한 도구들을 동원하는데 많은 자원을 들이지 않을 수 있다. 더불어 폭력의 방법을 사용함에 따라 자신들에게 돌아올 수도 있었던 정치적 부담마저 덜어버릴 수 있었다. 이제는 얼마나 더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감시와 통제를 당연한 것 내지는 없으면 안 되는 것으로 감시의 대상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가 숙제로 남게 된다. 즐거운 숙제다. 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감시의 도구에 환호하며 자신들을 그 감시망 안에 두고자 하는지!
4.
감시의 주체들에게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있다. 하나는 첨단기술. 다른 하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첨단기술은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이 기술의 범주 안에 들지 못하는 자들은 곧장 미개인으로 전락한다. 감시와 통제를 자연스럽게 만드는 집단적 환상이 유포된다. 권력자와 자본 양자 모두에게 이러한 환상은 자신들의 위치를 강화해주는 기제가 된다. 감시의 주체들은 첨단기술을 내놓고 이에 대한 효용성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모든 활동을 끝낼 수 있다. 그 이후 감시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이 기술 안에 포섭되는 것은 전적으로 감시의 대상들이 할 몫이 된다. 미개인이 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으로도 감시의 대상이 되는 자들은 감시의 주체들이 유포한 환상의 포교자가 된다. 현대판 괴벨스는 굳이 분서갱유를 하거나 '퇴폐미술전(Entratete Kunst)'을 벌일 필요가 없다. 그저 다른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끝이다.
5.
그런데 결과라는 것은 항상 의도한 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의도한 결과가 아닌 다른 결과가 나타나거나 또는 의도한 결과와 동시에 다른 결과가 나타날 때, 의도했던 자들은 당황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매우 전형적인 정량적 분석방식을 동원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배제한다. 이렇게 어떤 결과를 배제하고 알리고자 하는 정보를 보기 좋게 정량화하는 작업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결과를 조작하는 자 이외의 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작과 과정과 결말이라는 행위의 모든 전개과정에서 관련된 정보는 관련된 모두에게 공유되어서는 안 된다. 그물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는 자들에게는 계속해서 허우적거리는데 필요한 정보만이 제공된다. 환상은 깨지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상을 깨지 않게 하기 위해 감시의 주체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프로파간다의 도구들을 동원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노력은 성공하기 마련이다.
6.
강남구가 설치한 CCTV 관제센터의 풍경. 강남구 일대에 설치된 272대의 CCTV는 360도 회전, 100m 줌 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경 100m범위 안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식별할 수 있다. 전부 여성으로 이루어진 모니터링 요원 15명, 상황보고업무를 맡은 경찰 3명, 보조원 노릇을 하는 의경 3명, 시스템관리를 위한 보안업체 직원 3명. 이들이 3교대로 돌아가면서 50인치 대형 모니터 26대, 19인치 모니터 26대로 272대의 CCTV가 실시간으로 전송하는 화상정보를 감시하며 검색한다. 100m~300m 거리마다 설치된 카메라는 렌즈안에 인식되는 지역 내의 모든 것을 기록한다. 강남주민들의 3분의 2는 환호한다. 강력 범죄가 40% 줄었다,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얌체족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더 많이 우리를 보아 달라. 인권보호를 위해 모니터링 요원은 전부 여성으로 배치했다. 그러므로 인권침해 여지는 없어졌다. 국제적인 추세다. 우리는 약과다. 앞으로 서울 시내 전역, 더 나가 전국으로 확대하겠다.
7.
이렇게 정량화된 통계들. 실적이 되어 나타난 의도된 결과. 그러나 감추어진 결과들이 있다. 강남에서 40%나 줄어든 강력범죄는 전국적으로 동기대비 7%나 늘었다. 강남 주변 지역의 범죄발생률은 통계로 나타나지 않는다. 풍선효과는 감추어져야만 한다. 그 덕분에 강남에 거주하는 주민은 강남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관념을 배반하는 법. 강남은 안전해졌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오히려 CCTV를 이용하는 범죄가 늘어난다. CCTV에 잡히지 않는 범죄는 그 자체로 알리바이가 성립된다. "그 시간 나는 거기 없었다"를 주장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 CCTV를 피하라. 강남은 안전해졌는가? 안전해졌다는 생각은 관념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념은 환상이 된다. 타인의 인격권이 침해되더라도, 내 인격권이 침해되더라도 '안전'하다면 다 용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시의 대상이던 감시의 주체던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0.
어디 CCTV 뿐일까? 듣도보도 못한 첨단 기술용어로 포장된 프로파간다의 이면에는 감시와 통제라는 목적이 숨어있다. 그것들이 의도하는 목적의 본질은 근대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17세기 이전의 목적의식은 21세기에도 살아남는다. 안전과 편리라는 방향제에 의해 희석된 피냄세를 감추고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비용의 지불. 감시에 있어서 비용의 지불은 감시의 대상이 온전히 부담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의 감시를 위해 자기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는 현상. 자기 자신이 감시당함으로 인해 발생한 침해 역시 본인 스스로가 구제해야하는 현상. 아니, 이러한 현상을 침해라고 여기면 안 되는 현상. 이 모든 현상을 위해 지불되는 비용이 결코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필요하다. 의심하는 순간, 그는 모범시민이 아니게 된다. 그 순간, 그는 감시받아도 마땅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의심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렌즈가 감시용이 될 수 없다. 우린 모두 빅 브라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윈스턴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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