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선택하는 데 투표가 가당한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인지 모른 채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과,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기에 삶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

사회적 교섭을 강행하려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노동계급을 죽음으로 몰고 갈 사람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회적 교섭이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3월 11일 토론회에서 발제한 강승규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사회적 교섭을 정의하는 명제는 이렇다.
- 사회적 교섭은 강력한 대중투쟁을 위한 교섭전술이다.
- 사회적 교섭은 우리의 요구를 쟁점화하고 관철하기 위한 수단이다.
- 사회적 교섭은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이다.
- 사회적 교섭 참가는 사안에 따른 참여, 불참, 합의 거부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전술적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첫 번째 명제는 대중투쟁을 전략으로 보고 사회적 교섭을 전술로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명제는 참이다. 그러나 이 명제를 설명하기 위해 덧붙인 말은 "투쟁과 교섭은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투쟁과 교섭은 전략과 전술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전략으로 규정된다.

백 번 양보해서, 강 부위원장이 사회적 교섭을 전술로 규정했음을 인정하더라도 대의원대회에서 표결에 부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최고 의사결정기구가 결정한 것은 집행부가 함부로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수단이나 전술의 문제라면 구태여 최고 의결기구를 통할 것이 아니라 집행부 수준의 논의와 논쟁을 거쳐 유연하게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최고 의결기구의 결정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전술의 문제를 전략의 문제로 끌어올려 사회적 합의기구에 참여하는 것을 기정사실화 내지는 제도화하려는 기도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지막 명제와 연결해 볼 때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사회적 교섭이라는 전략 아래에 참여, 불참, 합의 거부 등이 전술로 배치된 것이다. 결국 사회적 교섭이라는 전략을 선택해서 사안에 따라 참여, 불참, 합의 거부라는 수세적 전술의 가능성만 남을 뿐이다. 여기에서 강력한 대중투쟁은 자연스럽게 배제되는 결과가 생겨난다.

두 번째 명제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투쟁과 교섭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요구를 쟁점화하고 관철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교섭이 선행되어 노동자들의 요구가 관철된 적이 있는가? 교섭은 투쟁을 통해 쟁점화된 요구들을 두고 그 수용정도를 타진하는 마지막 단계의 협상테이블일 뿐이다.

그리고 사회적 교섭은 진정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인가? 마찬가지로 물을 수 있다. 투쟁과 교섭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결의 장인가? 교섭은 오히려 계급 이데올로기 대결을 은폐시키고 계급화해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장이다.

물론 사회적 교섭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도 그 자체로 부정할 수만은 없다. 한 번 시위에 2, 3백만이 집결하는 이탈리아의 경우도 1990년대 후반에는 사회적 교섭이 이루어진 바 있다. 1970년대 초반 독일에서도 그러했으며, 오스트리아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및 네덜란드 등에서도 사회적 교섭이 진행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코포라티즘이라 불리는 이러한 사회적 교섭과 합의는 특별한 조건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과거 계급정당의 색깔을 분명히 했던 정당이 비록 수정주의로 흘러갔다 하더라도 여전히 친근로자적 입장과 정책을 분명히 하며 집권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회적 교섭이 생성되는 시기에는 언제나 그러했다. 자본주의 질서에서는 본질적으로 자본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노동자의 편에 무게를 실어주는 정부가 존재해야만 일정한 힘의 균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균형이 있어야만 진정한 교섭도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노무현 정부가 갈수록 자본의 노랑색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다.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다. 이러한 정부가 사용자와 함께 마련한 정책 보따리를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위원회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과연 투쟁전략 속의 교섭전술일 수 있는가? 구태여 사회적 교섭을 하려면 적어도 사민당 수준의 정당이 집권할 때까지 만이라도 기다려야 하는 것이 타산지석의 교훈이다. 뚜렷한 요구조건을 가지고 투쟁을 통해 관철하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정부와 사용자가 이쪽 테이블에 올 때에만 교섭전술은 성공할 수 있다.

어떠한 조건을 보더라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사회적 교섭을 전략으로 선택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민주적인 절차인 표결을 물리력으로 무산시킨 것이 형식논리적으로 볼 때 정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데 투표가 가당한 일인가? 삶과 죽음을 선택하는 데 다수결 민주주의를 들이댈 수 있는가? 무엇이 삶의 길이고 무엇이 죽음의 길인지 좀더 깊이 있게 분석하고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태그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정병기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