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치사회학자인 오페와 비젠탈이 <Two Logics of Collective Action>이라는 유명한 논문이 있다. 급진주의자로 분류되는 학자들도 아니고, 1980년에 발표된 논문이니 이제 고전 반열에 올라 전공자라면 필독 논문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오래 전에 읽었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그때 독후감은, ‘당연한 얘기를 이처럼 긴 논문으로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또 그게 유명해지는 상황이라면, 서구도 참 맛이 갔군’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다시 이 논문을 읽다가 퍼뜩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 그래서 그 대목을 잠깐 소개하려고 한다.
이 논문의 전체 요지는 간단하다. 노조는, 설사 아무리 관료화되고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노조라 할지라도, 노조라는 그 본성상 기반은 노동자들의 ‘행동하려는 의지(willingness to act)’와 열의와 연대에 근거하고 있으며, 또한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적 방식을 통해서 조직 행동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논문에서 동원하고 있는 온갖 정교한 학술적 논의와 분석틀에도 불구하고, 오래전 당시 나에겐 이 명제 자체가 오히려 두말하여 부연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서구도 참 맛이 갔나 보다’라는 독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노조가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게 되면, 자본은 파업을 ‘안 하는’ 것을 댓가로 교섭에 응하겠다고 나온다. 이에 따라 노조는 난관에 봉착한다. 투쟁 없이 교섭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손쉽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투쟁을 억제하거나 억압하다 보면, 조합원들의 ‘행동하려는 의지’와 열의와 연대가 스러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이야말로 바로 노조의 생존 기반이 되는 것들이다.
오페와 비젠탈은,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노조 지도부에게 유혹적인 대안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노조의 생존을 보증하는 기반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다. 특히 국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법과 제도에 기대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조는 제도화의 길로 나아간다. 구성원들의 ‘행동하려는 의지’ 대신, 외부의 제도를 통해 자신을 보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노조의 기반으로서 이 방식은 치명적이다. 오페와 비젠탈의 말을 인용하면, “일단 내부적 보증이 외부적 보증으로 대체되면, 그후 외부의 지원과 외부의 법적·제도적 지위를 철회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노조는 더 이상 저항할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노조는 [외부적] 보증을 보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래전 읽었을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갔던 이 대목이 갑자기 내 눈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서는, 다들 익히 짐작하실 게다.
10년 전 민주노총이 건설되었을 때, 활동가들 뿐 아니라 많은 ‘진보적인’ 학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시기 즈음하여 발표된 논문들은, 비록 건조한 논문 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할지라도, 기대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제도적 단위에서 노조가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러한 제도화야말로 노조가 나아갈 길이라고 결론의 절을 맺곤 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민주노총은 그 길로 꾸준히 나아갔다. 법적 지위를 쟁취했고, 국가가 보증하는 삼자기구나 노정기구에 참여했으며, 산별 교섭의 제도적 체계를 확립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오페와 비젠탈의 말을 빌면, “외부의 법적·제도적 지위로 보증”받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증’이 될 수는 없다. 어쨌든지간에 노조라는 것의 기반은 구성원들의 ‘행동하려는 의지’과 열의와 연대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체할 수 없는 보증이다.
최근의 사회적 교섭 논란 중에, 표면에 드러난 과정이나 각각의 전술적 의미들을 제껴놓더라도, 씁쓸하고 우울해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행동하려는 의지’를 꺾으면서까지 추구하는 사회적 교섭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의 보증?
그러나 ‘맛이 간 서구’의, 그리 급진주의자도 아닌 학자에 불과한, 오페와 비젠탈은 이렇게 말한다. “노조는 그러한 보증을 보증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기반을 외부적 보증으로 대체하려는 노조의 시도에 대해서 한 마디로 정의한다. “기회주의.” 이것이 이 유명한 논문의 마지막 결론 절 제목이다.
- 사진
-
재난 연극
- 영상
-
[영상] 현대기아차비정규직 농성..
쇠사슬 몸에 묶고 저항했지만, 끝내 비정규직..
오체투지, 비정규직 해고노동자의 희망 몸짓
영화 <카트>가 다 담지 못한 이랜드-뉴코아 ..
- 카툰
-
로또보다 못한 민간의료보험
건강보험료, 버는만큼만 내면 무상의료 실현된..
위암에 걸린 K씨네 집은 왜 거덜났는가
팔레스타인인 버스 탑승 금지
- 판화
-
들위에 둘
비정규직 그만
개자유
다시 안고 싶다
- 기획연재 전체목록
-
- 어서와요 소소부부네
- 팔레스타인평화연대의 INTERNATIONAL
- 워커스 상담소
- 99%의 경제
- 미디어택
- 비문명의 역습
- 초고령화 사회, 돌봄을 요구하다
- 나현필의 INTERNATIONAL
- 워커스 사전
- 엄한진의 INTERNATIONAL
- 여성, 노동의 기록
- 녹색스트라이크
- 화성, 어쩌다 사회주의
-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의 항변
- 랑희의 질문들
- 배성인의 혁명을 꿈꾼 여성들
- 챗GPT가 말했다. "인간보다 더 많은 색임을 지게 될 줄이야!"
- 연정의 르포
- 약속의 8회, 위기를 돌려세우는 녹색 스트라이크
- 양지로 떠오른 국정원, 이적異的 행위의 기록
- 선을 넘는 사람들
-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 2021위클리웨비나
- 이김춘택의 ‘무법천지 조선소’
- 파견미술-현장미술
- 러시아혁명 100주년 | 자코뱅 온라인시리즈
- 노동의 시대
- 배성인의 정치적 사유
- 비정규직의 세상보기
- 주례토론회
- 양규헌 칼럼
- 국제포럼
- 무슨 일 하세요?
- 소셜파워
- 반올림 이어 말하기
- 원영수의 국제칼럼
-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 정영섭의 낮은 목소리
- 윤성현의 들풀이야기
- 세월호 1년
- 제갈현숙의 봉당풍경
- 이정호의 보수언론 벗거보기
- 기사로 풀어보는 경제
- 유럽 민중의 오디세이
- 2015 총파업
- 쿠오바디스 진보정치 그리고, 노동자 정치세력화
- 편집장 칼럼
- 참세상 특강
- 마르하바, 팔레스타인!
- 일본사회운동의 편지
- 유럽경제위기
- 김한울의 표본실
- 오늘, 이곳의 투쟁
- 북아프리카 혁명
- 월드컵에 정의의 슛을
- J에게 경제를
- 명숙의 무비, 무브
- 비정규직 사회헌장
- 감시·통제 벼랑 끝 감정노동자
- 불붙는 세계교육투쟁
- 여성 살해, 침묵하는 사회
- 탈핵
-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
- 언론노동자들의 공정방송 되찾기
-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의 눈물
- 4대강 논란
- 진보전략회의 진보논평
- 참세상 책방
- 노조파괴, 그림자 정부
- 강정마을 해군기지 논란
- 조성웅의 식물성 투쟁의지
- 이득재의 줌인 줌아웃
- 통합진보당 분당
- 18대 대선과 노동자정치세력화
- 투쟁하는 세계노동자
- 복수노조, 약인가 독인가
- 참세상 국제통신
- 박진의 인권이야기
- 희망뚜벅이
- 편집위원회 정세좌담
- 무상급식
- 이원재의 예술,대화
- 쿡! 세상 꼬집기
- 방방곡곡 99절절
- 최인기의 빈민운동사
- 양한승의 정세이야기
-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 G20 서울 정상회의
- 전노협 창립 20주년 - 내가 함께한 전노협
- 주용기의 생명평화이야기
- 천안함 국민미스테리
- 근로시간면제(Time off), 충돌
- 의료 민영화 논란
- 전교조 명단 공개 파문
- 2011년 최저임금은?
- 김병기의 호주통신
- 기후변화와 노동자
- 쌍용차와 파업
- 지방선거 2010
- 2010 교육감 선거
- 임성용의 달리고 달리고
- 빛바랜 취재수첩
- 세미나네트워크 새움
- 콜트콜텍 미국원정투쟁
- 용산 철거민 대참사
- 용산참사범국민장 릴레이 기고
- 홈리스문제, 이렇게 하자
- 두 책방 아저씨
- 이수호의 잠행詩간
- 철폐연대-참세상 기획: 비정규직 10년 전망
- 콜트콜텍일본원정투쟁
- 그들만의 비정규법
- 해방을 향한 인티파다
- 혁명50년, 사회주의 쿠바 이야기
- 1단기사로 보는 세상
- '특별하지 않은 사람' 박종태의 죽음
- 배고프다! 영화
- 가자의 재앙
- 강우근의 들꽃이야기
- 박수정의 사람이야기
- 뉴코아 - 이랜드 비정규직 철폐투쟁
- 한미FTA를 저지하라
- 이정호의 미디어 비평
- 도요타반대세계공동행동
- 한반도 대운하를 가다
- 진보정당, 길을 묻다
- 38 여성의 날 100주년
- 또 하나의 왕국, 삼성
- 1·26 세계행동의 날
- 박영균의 철학으로 보는 세상
- 사이버 정치놀이터 미끄럼틀
- 2007 대통령 선거
- 대선후보들, 성소수자 인권과제 좀 들어보슈
- 아프간 피랍 사태
- 2007 남북정상회담
- 소통/연대/변혁 - 사회운동포럼
- 아그네스 쿠의 흐르는 강물처럼
- 리얼리스트 작가 선언
- 한상진의 레바논통신
- 백원담의 시와 모택동
- 맹세야, 경례야 안녕∼
- 제3회 맑스코뮤날레 - 맑스와 함께 상상하기
- 금속노조 한미FTA저지 총파업
- 비정규법 패기! 폐기!
- 한진의 사회복지노동자
- 정혜주의 바리오 아덴트로
- 평택,철조망을 걷어라
- 고길섶의 쿠바이야기
- 개토의 우울과 몽상
- 석궁이야기
- 민주노총 5기 지도부 선거
- 유영주의 전망좋은談
- 북한 핵실험과 한반도평화
- 조선남의 옥중수고
- 정대성의 독일통신
- 이영채의 일본사회운동
- 월드컵보다 아름다운 진실
- 에뿌키라의 장정일기
- 홍실이의 이상한 제국의 앨리스
- 이종회의 한미FTA 뒤집기
- APEC 밟고 WTO 돌려차기
- 민주노총 보궐선거
- 박석준의 의학철학이야기
- 황우석 사태 진단
- 2005년 하반기 비정규법 총파업투쟁
- 박영자의 북쪽이야기
- 하현의 미디어비평
- 2005세계여성대행진
- 박기범의 어떤 동화책
- 손호철의 남미이야기
- 박기범의 기소인 인터뷰
- 2004년 하반기 총파업투쟁
- 전범기소이야기
- 동화작가 박기범의 단식일지
- 김병돌의 그림세상
- 이현준의 지나가다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