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주가 누구야? 대덕 연구단지의 한국화학연구원 식당 앞에서 복직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돌리던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과기노조)의 간부와 조합원들은 적잖이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였다. 식당으로 들어가며 유인물을 탁 펼쳐보던 사람들의 -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 첫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화학연구원에서 고영주를 몰라?” 연구단지의 다른 연구원에서 선전전에 참여한 과기노조 타 지부의 간부와 조합원들이 웃으며 묻는다.
“화학연구원 전체 직원이 932명인데 정규직이 355명이고 비정규직이 577명입니다. 그 비정규직의 상당 부분은 2000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고영주 위원장이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최근 몇 년간 입사한 사람들이고 노조에도 잘 가입하지 않아서 사실 고영주가 누군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화학연구원 지부장의 설명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이 굳어진다.
고영주는 민주노총 사무총장을 마치고 2000년 9월에 과기노조에서 영국으로 전임 파견하여 과학기술정책학 박사 과정을 시작하였으나 화학연구원 원장이 이를 인정하지 않아 무단결근으로 해고되었다. 2004년 하반기 귀국 이후 과기노조는 복직 투쟁을 시작했고 몇 차례의 선전전 후에 연말연시 화학연구원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날의 식당 앞 선전전은 그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날 사업장내 노동자의 60%가 넘는, 엄청나게 늘어난 비정규직의 실체는 새삼스럽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고 결국 노조는 복직투쟁 계획을 수정하였다. 천막농성 대신 매주 화요일 아침 정문 앞에서 출근투쟁을 시작하였다. 복직투쟁에 참여하는 인원과 연대 조직이 확산되고 있다. 조합원들은 고영주를 다시 과기노조 7대 위원장으로 95.1%의지지로 선출함으로써 복직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고영주는 반드시 복직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날로 확산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점이다. 정부출연연구소들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IMF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하였고 정규직의 자리를 비정규직이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과기노조의 2005년 초 25개 과학기술계 정부출연연구소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총 인력은 약 14,080명이고 그 중 비정규직은 7,035명에 이른다. 이 비정규직 중 석/박사 학위 소지자가 70%가 넘는다. 최근 3년간 신규 채용 인력은 80% 이상이 비정규직이었다. 이들은 유사한 업무를 비슷한 강도로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대체로 정규직의 45~70%에 그친다. 4대 보험도 극히 일부에만 적용된다. 박사학위를 받고도 월급이 70~80만원인 연구원이 대덕연구단지에 수두룩하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착취와 인권 유린의 현장이다. 지난 4월 21일 과학의 날을 전후하여 많은 언론에서 연구현장의 비정규 실태를 고발하였다. 비정규직 연구원들은 TV 얼굴 화면에 모자이크를 하며 자신들의 한 맺힌 목소리를 쏟아냈다. 2004년 하반기 과기노조의 요구로 조사에 나선 국회마저 정부출연연구소들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성토하고 정부에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대책이 없다. 아니 오히려 지금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부 비정규 입법(안) - 파견법과 기간제법 - 이 통과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 기간제 비정규직을 대거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재의 정규직도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게 된다. 기간제법 제 4조 3항을 보면 ‘사업완료를 위해 기간을 정한 경우, 전문적 지식과 기술 활용이 필요한 경우는 법에서 정한 기간(3년이든 1년이든)을 초과해서 기간제 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고 그 기간이 끝나면 해고할 수 있도록 예외를 두고 있다. 노동부도 그 예외 조항의 광범위한 성격 때문에 오히려 고민할 정도다고 들린다.
현재 정부출연연구소는 이른 바 PBS(Project Base System) 제도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는 속칭 연구사업 중심 운영을 의미한다. 연구원들이 직접 나서 연구사업을 수주하지 않으면 임금도 못 주고 기관 운영도 어려워진다. 연구사업이 끝나면 그 연구사업을 수행했던 연구원에 대한 대책이 불투명하고 따라서 연구사업별로 채용하는 비정규직 연구원이 대거 늘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정규직은 그나마 연구사업이 끝나도 해고 제한과 노조 때문에 다른 연구사업에 참여하며 고용을 보장받아왔다. 그러나 만일 기간제법이 통과되면 PBS와 맞물려 비정규직이 대거 늘어나고 정규직도 연구사업에 따라 계약과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파견제법과 기간제법은 그래서 다른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정부출연연구소의 연구 노동자들도 더욱 불안정 고용, 착취, 인권 유린, 치열한 눈치 보기와 생존 경쟁의 한복판으로 내몰 것이다.
과기노조는 고영주의 복직 투쟁과정에서 비정규직의 심각성을 의외의 방식으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정부의 비정규직 확산 법안은 폐기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연구 노동자들 사이에도 확대되고 있다. 2005년 10대 교섭 요구안에 ‘비정규직의 채용 제한과 정규직 채용의 대폭 확대’, ‘동일노동 동일임금 적용과 정규직화 제도 마련’,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PBS 제도 등 각종 관련 제도와 규정의 철폐’ 등을 포함시켰다. 비정규직 제도 개선 대정부 대 사용자 투쟁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화하는 현장감을 갖춘 밀도 있는 프로그램을 공공연맹과 함께 준비 중이다.
5월 1일 제 115주년 세계 노동절을 관통하는 한국 사회 최대의 화두는 ‘비정규직’이다. ‘비정규 권리 입법’, ‘차별 철폐’, ‘비정규직 노조 인정’,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대’, 궁극적으로 ‘불안정노동의 철폐’는 이제 막연한 구호가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생존과 해방을 위한 과제가 되고 있다. 향후 몇 년간 노사관계의 최대 격전지는 비정규직이 될 것이고 노동운동을 질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정규직의 폐쇄된 울타리에서 소극적으로 고용안정을 지키려했던 정규직 노동자들 자신이 아주 빠른 속도로 불안정 노동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결국은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5월은 그 뜨거운 투쟁과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것임을 약속하는 ‘진짜 노동자의 달’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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