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식민주의, 탈현대적 공공성의 가능성을"

[특별기획 : 이제는 민중언론](1) -신자유주의와 대안언론

<편집자주>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물들어 가는 21세기 속에서 미디어의 역할은 어느 때 보다도 커지고 있다. 인터넷의 발달과 의사소통의 세계화로 과거에 비해 더 심각한 정보감시와 통제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멕시코 사파티스타와 베네주엘라의 사례에서처럼 노동자 민중의 반격 가능성도 커져가고 있다. 민중언론 '참세상'의 창간에 맞춰 국내외 필자들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맞선 21세기 민중언론의 역할을 조명해 본다.

1.
신자유주의의 내용은 이의 비판자와 신봉자 사이에 전혀 달리 해석되고 있다. 한 편에서는 모든 악의 근원으로 해석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를 비판하는 사회운동에 있어서 신자유주의는 특별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오늘과 같은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적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 누구인지를 정치적 공간 속에서 명확히 지칭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스스로를 “통화주의자”나 “신고전주의자”로 부르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위기적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개혁을 밀고 나가는 “현대주의자”라고 자부한다. 오히려 이들은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을 과거에 안주하는 보수적인 “반개혁주의자”라고까지 비판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이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현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1973년 9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유혈쿠데타로 붕괴시킨 이래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와 레이건 정부가 속속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는 그간 “포드주의”에 기초했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처하는 효과적 처방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 신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와 결합하면서 중심부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부에서도 - 특히 라틴아메리카에서 - 80년대에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90년대 말에는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금융위기 - 아시아(1997/8), 브라질(1998/9), 러시아(1998) - 가 보여준 것처럼 사실 과대 포장된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큰 기대를 걸었던 신경제(new economy)가 어이없이 붕괴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위기는 신자유주의로 하여금 잠시 그 동안 통화주의에 입각한 구조조정정책에 대하여 자기반성을 하게끔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동서냉전기의 신자유주의는 체제경쟁이라는 조건 때문에도 스스로가 자본의 이해관철양식을 어느 정도 제한했었지만 “지구적 자본주의”와 동의어가 된 신자유주의는 이제 어떠한 한계도 설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지극히 공격적으로 된 신자유주의는 주변부의 민중은 물론, 중심부의 이른바 중산층까지도 불안 속으로 내몰고있다. 또 신자유주의는 가령 케인즈적, 맑스적, 또는 종속이론적인 대안들 모두 다가 공허한 것이라고 공격하며, 시장권(市場權)이 곧 인권(人權)이라는 철저한 경제인(homo oeconomicus)의 철학을 설파하고 있다.

2.
바로 이와 같은 조건에서 민중의 삶을 본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담론체계의 개발에 있어서 넓은 의미의 공공성(公共性)과 좁은 의미의 언론(Media)이 지니는 의미는 특별하다. 냉전이 한창이었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서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했던 “비판적 공공성”의 영역확보를 위한 노력은 우선 후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이 이해와 직결된 공공성을 문제 삼았다.

이 같은 공공성이 그 동안 시민사회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졌던 “시민적 공공성”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내재적 비판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도 시민적 공공성을 여전히 이상화하고 있다고 다시 비판되면서 “대안적 공공성과 “대안적 매체”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제기 되었다. 점차 활발해진 여러 사회운동(여성, 평화, 반핵 등)도 스스로 여러 가지의 대안적 매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동서냉전이 끝나고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90년대 초부터 그러한 대안적 공공성이나 매체의 영향력은 가령 문화적 담론과 같은 영역에 제한되었고 ”걸프전쟁“, ”신세계 질서“, ”지속적 발전“과 같은 극히 중요한 정치적 현안문제에서는 다시 주변으로 밀렸다. 이 같은 현상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도 지배적인 공공성이나 매체는 이전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현재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른바 비판적인 토론의 장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슈트어트 홀(Stuart Hall)이 지적한 것처럼 지배적인 공공성이나 매체는 “경험의 구조화된 연결” 또는 “코드” 안으로 대안적 공공성이나 매체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안적 공공성이나 대안적 매체는 내용보다는 표현의 형식을 중시하면서 지배적인 공공성이나 매체가 선전하는“사회적 합의”를 주로 희화(戱畵)화 하거나 풍자(諷刺)하는 방식을 통해 “밑으로부터 새로운 매체”(indymedia)의 개발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이와 같은 중심부의 일반적 대응과는 달리 신자유주의의 지속적인 압력 앞에 그대로 노출된 주변부의 대안적 공공성 또는 매체는 가끔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의 성공적인 사례를 멕시코의 <민족해방 치아파군(軍) EZLN>이 보여주었다. 자신들만의 언어세계, 국제적 정보망, 정치와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극적인 표현의 양식 등이 잘 결합된 이러한 대안적 공공성은 “탈식민주의적”이면서도 “탈현대적”인 공공성의 가능성도 보여 주었다.

대안적 공공성은 지배적인 공공성의 완전한 타자(他者)가 아니라, 집단적인 저항으로 개발한 일상적 삶 속에서 지배적인 여론이나 사회적 규칙들마저 자기 안에서 소화시키면서도 또 이를 넘어서려는 기획이라는 뜻에서 탈식민주의적이자 탈현대적이었다.

3.
이러한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던 대안적 공공성 또는 대안적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는 한국사회를 위해서도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의 보급률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있는 사회적-기술적 조건 속에서 대안언론의 가능성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언론학적인 전제들이 무엇인지도 자세히 검토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본의 이해관계로부터 언론의 논거(論據)나 논리가 깨끗이 분리되지 못한 한국적 풍토에서 사람과 사건 그리고 제도에 관한 사실과 논거들이 다양한 정치적 이해와 높은 수준에서 논쟁할 수 있도록 대안언론은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뉴스원(源)으로부터 사실적이고 논거가 분명한 배경 설명이나 일차적 자료를 기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이는 동시에 매일 매일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 뒤에 숨어 있는 구조적 문제를 파헤치는 노력으로 연결되어야한다. 국내와 해외로부터 다양한 정보는 물론, 지배적 언론으로부터 배제된 민중의 이해가 무엇인지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른 바 주류(主流) 또는 사회적 강자의 문제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대안언론은 단지 정치적으로 옳거나 또는 그르다고 판단된 개별적인 이미지와 내용을 교묘하게 선전하는 시끄러운 확성기는 아니다. 이미 대안언론에 참여했거나 또는 앞으로 참여할 집단의 현실화될 수 있는 바람은 물론, 현실화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실망까지도 계몽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그러한 언론은 이미 수세(守勢)적인 의미의 대안언론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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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 민중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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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질

    기사 中, '무엇보다도 자본의 이해관계로부터 언론의 논거(論據)나 논리가 깨끗이 분리되지 못한 한국적 풍토에서 사람과 사건 그리고 제도에 관한 사실과 논거들이 다양한 정치적 이해와 높은 수준에서 논쟁할 수 있도록 대안언론은 만들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뉴스원(源)으로부터 사실적이고 논거가 분명한 배경 설명이나 일차적 자료를 기록하는 작업은 필수적이다.' 참세상의 많은 기획에 비하면, 아직 돌아오는 논쟁과 메아리가 적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어떻게 다양한 논의가 가능한 장이 있을건지.

  • socio21

    공공의 장으로서의 대안언론을 이야기하지만, 공적 장이라는 것 역시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겠지요. 사실 대안언론의 기능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로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공통의 경험을 통한 연대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대안언론을 사고할 때, 진보진영이 소리칠 수 있는 공간만을 구성하는 데 여념이 없었을 뿐,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소리들을 서로 듣고 공유할 수 공간을 구축해내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흡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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